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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193화 (193/210)

◈ 193.

폐허가 되어버린 오스칼 제국 수도의 중심지.

황제가 기거하던 황성은 그나마 멀쩡한 형태를 유지한 채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작금은 마르바스 휘하 마족과 그 세력이 머무는 가운데, 낯선 인영이 그 위에 발을 내디뎠다.

“요하넬은 어디 있지?”

“….”

다리우스는 이쪽을 찾아온 불청객이 있다는 소리에 황궁의 정문으로 향했다.

산발이 되어 흩날리는 시뻘건 머리카락, 세로로 기다랗게 갈라진 샛노란 눈동자를 지닌 고위 마족이 그 위에 서서 거친 투기를 뿜어내며 자리했다.

‘이자는.’

「타락을 지켜보는 눈동자」 아르카주.

중간계로 현현한 마족 중 나름대로 유명한 이름이었기에 다리우스는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지?”

마계 서열 2위 아가레스의 계보를 잇는 그가 어째서 자신의 스승님을 찾는 것인가.

하지만 인간의 몸을 의태한 아르카주는 그 물음에 헛웃음을 토해냈다.

“하, 무슨 일?”

“…윽!”

다리우스가 반응하기도 전에 손을 뻗어 그 목을 움켜 쥐었다.

두 다리가 지상에서 뜨여 하늘로 떠올랐을 때, 아르카주는 분노로 잔뜩 일그러진 얼굴과 함께 다리우스와 시선을 마주하며 으르렁거렸다.

“미련한 버러지 새끼들. 마기를 조금 받았다고 진짜 마족이 된 줄로 착각이라도 한 것이냐.”

“….”

다리우스는 시뻘게진 얼굴로 제 목을 조르는 아르카주의 손을 떼어내려 애를 썼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그것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숨만 점차 가파라질 뿐이었다.

함께 정문으로 나온 다른 원탁의 멤버들이 주춤하며 다가온다. 하지만 이내 아르카주가 내뿜는 미칠 듯한 마기에 압도되어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쯧. 되었다. 네놈의 주인에게 말을 전하라. 쓸모 없다지만,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

다리우스는 짙은 모멸감에 이를 악물었다.

본래라면 제국 내에서 자신에게 이리 말할 수 있는 이는 스승님을 제외하고는 존재하지 않았다.

검성의 후계자로서 이름이 드높았으며, 마주치는 그 누구마다 존경을 표하지 않는 이가 없지 않았는가.

울컥한 마음에 마기를 발산했지만, 두 눈을 스산하게 뜬 아르카주가 재차 기세를 뿜어내 그의 마기를 찍어눌렀다.

“컥…!”

압도적인 힘의 격차에서 내상을 입은 다리우스가 피를 토해낸다. 가볍게 손을 휘둘러 그것을 털어낸 아르카주는 같잖다는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그 알량한 목숨을 이어나가고 싶다면 네 주인에게 똑바로 고해라. 한 번만 더 이쪽의 행보를 방해한다면 아가레스 님께서 용서치 않으실 거라고 말이야.”

“…그, 게 무슨 이야기요.”

“쯧쯧. 밑의 사람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다니. 네놈 휘하의 마인 한 명이 날뛰고 있다. 마르바스 님께서 시킨 일이 진짜인지는 모르겠지만, 애써 늘린 마인을 전부 쳐 죽이며 힘을 흡수하고 있더군. 애초에 마인의 숫자를 늘리려고 애쓴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고 있겠지? 그러면서 힘을 한군데 뭉친다고 사냥하다니, 기가 차지도 않아.”

꽈악.

목을 붙잡은 손아귀에 힘이 더해졌다.

조금만 더 이 상황이 지속된다면 다리우스의 머리가 터져 나가버리고 말 터.

아르카주는 이를 갈다가 손아귀의 힘을 풀며 그의 몸을 내던졌다.

“마르바스 님의 이름을 보아 죽이진 않겠다. 하지만 그 마인은 처분해야 할 것이야.”

“…그게 대체 누구요. 우리는 그런.”

“모르는 척하겠다고? 그 검은 머리 마인의 같잖은 얼굴이 내 기억에 선명하거늘.”

“…검은 머리”

“그 마검을 쓰는 녀석 말이다. 하여튼 똑바로 전하거라. 이다음 내가 또다시 여기에 오게 된다면 그때는 마르바스 님의 이름으로도 네 놈의 목을 지켜주지 못할 것이니.”

할 말은 다 했다는 듯 아르카주는 손을 털며 황궁을 나섰다.

잠시간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다리우스는 자신의 처량한 신세에 두 주먹을 꽉 쥐었다.

“검은 머리, 마검.”

“설마.”

아르카주가 남긴 단서에 대한 대답은 뒤쪽에 있던 원탁에게서부터 나왔다.

다리우스가 슬쩍 고개를 들자, 칼슈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제 검의 손잡이를 매만졌다.

“…그 남자인 듯합니다.”

“베르너.”

「지혜」의 검은 현자.

그가 제국 안에 들어와 있단 소리인가.

꽈아악.

살을 파고든 손톱이 깊은 상처를 만들어냈다.

마인이 되어도 피는 새빨갛기 그지없다. 다리우스는 그것을 보며 이를 갈았다.

‘다, 다 그놈을 만나고서부터 잘못되었다.’

단 한 번의 실패로 스승님의 총애는 사라졌고, 귀찮음과 멸시의 시선만이 따라다녔다.

이제는 이전처럼 대업에 비중 있는 일을 맡기 힘들 정도로, 새로이 마인이 된 이들에게 밀려나는 신세가 되었다.

“다리우스.”

“…!”

돌연 살짝 열린 정문 사이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리우스는 떠났던 아르카주가 다시 돌아온 줄 알고 흠칫 놀랐지만, 그 사이로 들어온 것은 같은 마르바스의 계보를 잇는 마족이었다.

“아르카주가 다녀가던데. 무슨 일이 있었나?”

“…작은 오해가 있었다.”

다리우스는 한숨과 함께 제 목을 쓰다듬으며 간략히 사정을 설명했다.

이 마족의 이름은 카이낙.

초창기부터 제법 우호적인 태도로 자신과 협력하며 관계를 쌓아왔다.

“검은 현자라. 마왕님들도 인지하고 계시는 이야기지. 헌데 지금은 크게 신경 쓰긴 힘드실 거야. 현세에 강림을 위해 인과율의 조정을 하는 지금, 가시 같은 존재일 테니. 우리 주인님 정도가 아니라면 화신체로 싸울 생각도 하지 못했겠지.”

“그렇지.”

아르카주가 섬기는 마왕은 마계 서열 2위로 마르바스보다 몇 단계나 더 높았다.

그렇기에 아르카주가 그리 강하게 나올 수 있었던 것.

하지만 마르바스 역시 한 자릿수 위계로 결코 낮은 위치가 아니었다.

“자네가 처리해보는 건 어떤가. 이번 기회에 저번 실수도 쇄신하고 말이지.”

“나는 이미 패배했다. …이들과 함께 싸웠는데도 말이지.”

그날의 기억은 치욕스러운 것이었다.

용사 한 명 정도는 손쉽게 해치울 수 있을지 알았건만, 그리 참혹하게 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너는 어떻지, 카이낙? 너라면 메피스토나 맥스웰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을 텐데.”

“무리야. 용사의 힘이 개화한 이상 순수한 마족은 절대적으로 불리해. 마왕 급이 아니라면 그 앞에 서는 순간 순식간에 가루가 되어버릴껄.”

“…그러면.”

“하지만 순수한 마족이 아니라면 다르지. 인간과 섞인 불완전한 마인이기에 너희들에게는 승산이 있다는 것이야.”

“부끄러운 말이지만, 서로 간에는 압도적인 격차가 있다. 일반적인 수단으로는 따라잡지 못해.”

“그래. 일반적인 수단으로는 말이지. 그래서 말인데….”

카이낙은 히죽 웃으며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엄지손톱만 한 작은 씨앗이었다. 외피가 시커멓고, 마기가 아른거리는 것을 보니 예사로운 씨앗이 아닌 듯싶었다.

“…이건?”

“마룡의 심장을 잘라내 내 나름대로 가공한 거다. 섭취 시 힘을 증폭시켜주지.”

“마룡의 심장.”

드래곤 하트라는 소리가 아닌가.

다리우스가 두 눈을 크게 뜨자, 카이낙은 슬쩍 그것을 내밀며 말했다.

“실험 대상을 찾고 있어서 말이지. 어떤가. 난 자네가 이걸 먹으면 능히 용사를 쓰러뜨릴 수 있으리라 보는데.”

“…부작용은?”

“어지간해선 없을 거네. 마룡의 기운이 활성화되면 마기의 출력이 서서히 높아지지. 욕심부리지 않고 딱 두, 세배 정도만 받아들이면 괜찮지만, 적정선을 넘으면 이성을 잃고 폭주하지. 그렇게 되면….”

“그렇게 되면?”

“모든 힘을 쥐어 짜낸 뒤 죽는다. 물론 적정선만 유지하면 되네.”

“그렇다면 부작용은 없겠지?”

“그래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지금껏 자네에게 도움이 되는 걸 많이 주지 않았던가. 섭취만 한다면 적어도 지금보다 두세 배는 지금보다 더 강해질 것이네.”

정말로 매혹적인 이야기였다.

그 근간이 되는 밑바닥에는 마룡의 심장이 있으니 아예 없는 것을 짜내는 것은 아니리라.

“실험쥐가 되라는 소린가.”

“특별히 이번에는 공짜로 해주지. 자네들 것도 있네. 어떤가?”

카이낙은 다리우스 뒤에 있던 원탁의 인원수만큼 추가로 씨앗을 꺼내 들었다.

“받지.”

다리우스는 망설임 없이 그것을 받았고, 원탁 역시 마찬가지로 씨앗을 쥐어들었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무엇이지?”

“마룡의 심장이라면 네게도 매혹적일 텐데, 왜 스스로 흡수하진 않는 것이지?”

“아.”

카이낙은 짙은 미소와 함께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마룡의 심장을 직접적으로 흡수하면 마족일지라도 꽤 부담이 가는 일이라서 말이야. 그래서 이렇게 가공하는 것으로 섭취한다네. 이번에는 마인 전용으로 만들어져서 나로서도 무용지물이 되어버렸지.”

궁금증은 해결되었냐는 그 시선에 다리우스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건투를 비네.”

카이낙은 용건이 끝났다는 듯 가볍게 손뼉을 치는 것으로 자리를 떠났다.

그 울림은 마치 악마의 속삭임처럼 참으로 달콤할 따름이었다.

***

마인들을 모조리 쓸어버린 이진한은 곧바로 척후대와 함께 이동했다.

“…제가 또 정신을 잃었었나요? 잠에 든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그다음부터는 좀.”

이리아는 아리송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자리에서 일어나 강으로 간 것은 그녀의 의지가 아니었는지 까망베르에게 업혀 본대에 합류할 때까지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네 핏줄에 기록된 존재가 나왔었다.”

“핏줄이라니. …그러면 설마.”

“그래. 《창조》와 만났지.”

이리아는 두 눈을 크게 떴다.

“날 위해 후손으로 전해지는 핏줄에 영혼 일부를 심어 놓았더라고. 그 덕분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렇군요. 저도 만나보고 싶었는데 아쉽네요.”

혈계 전승의 마법이 발동되는 조건은 자신에게 연정을 품을 것이라 했다.

하지만 그것까지 말한다면 부끄러워할 것이 분명했기에 굳이 이야기하진 않았다.

“천 년 동안 내려온 마법이라. 대단하네요, 역시 영웅인가요.”

“천 년이나 잠들어 있다가 깨어난 사람도 있는데요, 뭐.”

미르엘과 엘레오노라가 우스갯소리를 하며 슬쩍 이진한을 바라보았다.

무슨 파라오나 미라를 말하는 듯한 시늉에 그가 쓴웃음을 지었을 찰나, 척후대 선두에 있던 핸더슨은 주먹을 꽉 쥐어 올림으로 일행에게 신호를 보냈다.

“주위에 마수입니다. 여기서부터는 강행 돌파하겠습니다.”

그 뒤부터는 끊임없는 이동의 연속이었다.

약 나흘간 제국의 반절을 주파했고, 간간이 마주치는 피난민들에게 돈이나 식량으로 정보를 사며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다.

“여기가 분기점입니다.”

제국에서 두 번째로 큰 대도시인 데르구비아를 앞두고 있을 무렵이었다.

잠시 휴식을 위해 텅 빈 마을에 자리 잡은 척후대가 휴식을 취하는 사이, 헨더슨과 호베르투가 이진한에게로 다가와 말했다.

“꽤 멀리까지 나아왔습니다. 더 깊숙이 나아간다면 정보는 더 얻을 수 있겠지만….”

“이미 수집한 정보도 적지 않습니다. 슬슬 후퇴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흠.”

둘의 조언에 이진한은 팔짱을 꼈다.

슬슬 마주치는 마수의 빈도도 높아졌고, 주위를 알짱거리는 마인의 기척도 짙어졌다.

자신의 존재가 알려졌을 테니 이 앞으로 더 나아간다면 고위 마족 같은 존재와 마주칠 수 있는 우려도 있을 터.

‘냉정히 생각한다면 후퇴하는 게 맞지만.’

이진한의 시선이 한쪽 구석에 홀로 있는 크루시아에게로 향했다.

그는 나탈리를 찾기 전까지는 제국을 벗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일단 밤이 깊었으니 오늘 하루는 여기서 쉰다. 날이 밝으면 결정을 내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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