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
숲 가운데서 모습을 드러낸 건 이 근방을 종횡한다는 마수 무리였다.
까망베르에게 이리아를 맡긴 이진한은 마검을 바로 세웠다.
그것이 무슨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마수들은 일시에 몸을 날리며 그들을 갈가리 찢을 것처럼 몸을 날려왔다.
서걱─!
그라나다의 궤적이 가볍게 그 피륙을 베어 가른다. 사실 손가락 한 번 까딱하면 이 숲 전부를 태워버릴 수 있었지만, 머리가 복잡해 직접 움직이고 싶은 마음이 컸다.
마치 양 가운데 늑대가 날뛰는 것처럼 이진한은 무참히 마수들을 베어나갔다.
그렇게 그 수가 수십에 달했을 찰나, 달빛으로 환한 하늘로부터 시커먼 점 하나가 이쪽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쿵─.
묵직한 충격파와 함께 커다란 광음이 터져 나왔다.
그 여파로 인해 흙과 돌조각이 섞인 파편들이 사방으로 흩날린다. 물론 이진한 쪽으로 날아온 것들은 그 앞에 펼쳐진 무형의 벽에 가로막혀 바닥에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넌 뭐냐?”
황소만 한 덩치를 지닌 괴한이 성난 근육을 꿈틀거리며 일그러진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마인인가?”
“허. 요즘도 이런 새끼가 있네.”
“주위에도 몇몇 있군.”
이진한은 고개를 들어 지평선 너머를 바라보았다.
이곳부터 저들의 활동 반경 안쪽인지 마인으로 보이는 기운이 몇몇 느껴졌다.
까딱 잘못했다면 척후대와 충돌하거나, 바로 직전 진하율과의 만남까지 방해받았을 터.
잠시간 생각하던 이진한은 까망베르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먼저 야영지로 돌아가 있어. 이놈들 정리하고 갈 테니까.”
-크릉.
까망베르는 힘껏 고개를 끄덕인 것으로 몸을 돌려 지나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우두커니 서서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마인은 허탈한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오늘은 이미 씻어서 손에 피 묻히기 싫었….”
“네 손에 피 묻을 일은 없을 거다.”
턱.
순식간에 그 지척으로 쇄도한 이진한이 활짝 핀 손으로 마인의 얼굴을 움켜쥐었다.
“…!”
반응할 틈조차 없는 그 갑작스러움에 마인의 두 눈이 커다래졌을 찰나, 이진한은 그의 얼굴을 움켜쥔 채로 힘껏 땅을 박찼다.
쿵!
마치 미사일처럼 치솟은 둘의 신형이 한참 멀리 떨어진 곳으로 처박혔다.
깊은 크레이터가 생긴 가운데 이진한의 손에 붙들린 마인이 팔다리를 버둥거렸다.
시커먼 마기를 흩날리며 어떻게든 그 손아귀에서 빠져나오려 발악했지만, 그럴수록 제 머리를 옥죄는 힘이 강해졌을 따름이었다.
“…아니지. 귀찮게 하나하나 찾아다닐 필요는 없겠네.”
툭.
마인의 머리를 놓아준 이진한은 가볍게 매무새를 정돈했다.
갑작스레 풀려난 마인은 자신이 처한 상황이 이해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크레이터 한가운데에서 멍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뭐해. 동료들 안 부르고?”
“…뭐?”
“네까짓 게 혼자 날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아?”
멸시가 담긴 한심스러운 시선에 마인은 울컥했다.
마계의 침공 이후 마인이 되면서 제국 내에서는 신처럼 군림하던 자신이다. 이때까지 그런 취급을 받은 적이 있던가.
하지만 자신이 아무리 발악한다고 할지라도 혼자의 힘으로 저 남자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피잉─!
그는 하늘 위로 손을 들어 올려 마기를 쏘아 보냈다.
어두운 밤하늘에서도 확연하게 알아볼 수 있는 그 잔향은 곧 주위를 향해 퍼져나갔고, 그것에 이끌린 마인들이 피 냄새를 맡은 마기처럼 순식간에 그곳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내게 기회를 준 걸 후회하게 해주마.”
속속이 다가오는 기척들에 마인은 씩 웃으며 한껏 뒤로 물러났다.
지금은 마왕의 명령 때문에 제국 내부만을 휘젓고 다니며 제 세력을 구축하는 데 힘쓰고 있지만, 도시, 아니 일국이라도 손쉽게 무너뜨릴 수 있는 전력이다. 제깟 것이 아무리 강하다고 할지라도 이 정도 숫자를 혼자서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은가.
“어떤 미친놈이 소집 신호를 보냈어.”
“아, 딱 좋은 때였는데. 별일 아니기만 해봐라.”
마인이라 그런 것인지 저마다 자유분방한 태도를 보이며 땅 위에 내려섰다.
얼핏 보아도 서른 이상의 다수다. 전쟁을 위해 마인을 늘린 것인지 예상보다 더 많은 숫자가 그곳에 닥쳐왔다.
‘이곳에만 이 정도면 제국 전체로 보았을 때는 몇백 단위는 되겠군.’
쉬이 볼 전력은 아니었지만, 의회 역시 놀고먹기만 한 것이 아니다.
인과율에 따라 세상이 밸런스를 맞춰가듯 대륙 곳곳에서 무명의 실력자들이 속속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거기에 더불어 기존 강자들의 경지 또한 빠른 속도로 가파르게 성장했으니, 서로 자웅을 겨뤄볼 만할 것이었다.
“그래서, 누가 소집한 거지?”
마인 중 한 명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이 크레이터는 무엇이고, 무슨 연유에서 자신들을 이곳으로 불러 모았는가.
그러자 아까 이진한에게 얻어맞았던 마인이 손을 뻗어 그를 가리키며 큰소리로 외쳤다.
“저놈! 저놈이 너희를 다 불러 모으라고 했다! 한 번에 쳐 죽여준다고 말이지!”
“뭐?”
마인들이 일시에 시선을 돌려 이진한을 바라보았다.
마기가 풀풀 흘러나오는 검을 쥐고 있기에 당연히 같은 마인 동료라 생각했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마기에 물들지 않은 순수한 인간이었다.
“허, 참. 그게 뭔 소리야 대체.”
“인간의 장난질에 놀아난 거라고?”
그들이 저마다 인상을 찌푸리며 귀찮음을 표했을 때, 마인은 정말로 억울하다는 듯 외쳤다.
“저놈 더럽게 세다고! 혼자서는 못 이겨!”
“쪽팔린 줄 알아라. 마인이라는 새끼가.”
“윽….”
날 서린 욕지거리에 마인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러자 가장 가까이에 있던 다른 마인이 한숨을 내쉬며 이진한 쪽을 향해 가볍게 손을 뻗었다.
“아서라. 저 떡대 새끼가 어지간히 무서웠으면 우리까지 불러줬겠냐. 더 윽박질렀다간 오줌 싸겠….”
서걱.
허공으로 가벼운 파공성이 흩날렸다.
한 줄기 미풍을 자아낼 정도의 옅은 파장이었지만, 주위에 서 있던 마인들이 저마다 심상치 않음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저적, 저저적─.
이진한을 향해 손을 뻗었던 마인이 손끝에서부터 잘게 다진 조각이 되어 흩어져갔다.
“…어?”
그는 제 몸에 닥친 상황이 이해되질 않았는지 작은 의문성을 내었지만, 이내 전신이 가루가 되어 흩어졌을 따름이었다.
“아. 이러면 흡수를 못 하는데.”
이진한은 그라나다를 내려다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고대 신의 잔재보단 아니었으나, 저마다 마왕이나 고위 마족의 기운을 받았으니 마인들 역시 좋은 에너지 원이었다.
“무슨….”
순식간에 분위기가 뒤바뀌었다.
그 주위에 있던 이들은 날 선 적의를 보였고, 일부 눈치가 빠른 이들은 기회를 엿보며 자리를 벗어날 틈을 노렸다.
그런 가운데 이진한은 왼손으로 가볍게 수결을 맺으며 「삼라만상」의 마법을 발동했다.
쿠우우웅─.
그들이 서 있는 땅을 기준으로 얼마간 떨어진 영역까지 잿빛 그림자가 뒤덮기 시작한다. 반원 형태로 뻗어 나간 그것들은 순식간에 주위 공간을 장악하더니 이내 반원 형태의 세계를 만들며 그들 모두를 가둬버렸다.
“씨팔, 뭐야!”
“함정? 함정인가?”
“벗어날 수 없어!”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한 마인들이 순식간에 땅을 박차며 사방을 가로막은 벽을 두들겼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벽 자체도 사라져버렸고, 그 너머에는 끝을 모르는 허허벌판만이 펼쳐져 있게 되었을 따름이었다.
“나가고 싶으면 덤벼라. 날 죽이면 이곳을 가두는 마법도 풀리게 되니.”
이진한은 어깨를 으쓱이며 그들 가운데로 걸어 나갔다.
“….”
마인들은 사방으로 흩어진 가운데 서로 시선을 마주쳤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을 빠져나가려면 저 녀석을 죽여야 하는 것은 분명해 보인바. 그때까지는 서로 협력하자는 암묵적인 합의였다.
“뭐해. 안 덤벼?”
이윽고 그들 앞에 선 이진한이 그라나다를 어깨에 올리며 으쓱이자, 눈치를 보던 마인들이 일시에 몸을 날렸다.
파아아앗!
마기의 격류가 거센 해일처럼 몰려들기 시작했다.
수십의 마인이 뿜어낸 기운이다. 아무리 이진한이라 할지라도 상처 하나 없이 막아내기엔 힘들 것으로 보였다.
“딱 좋은 상황이네. 시험해보고 싶은 것도 있었고.”
하늘 높이 들어 올려진 마검의 검신 위로 농밀한 마기가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왔다.
고대 악마로서, 이제는 거의 마왕에 준하는 격을 지니게 된 바포메트의 힘이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었다.
「악마화」
온몸이 바포메트의 마기로 뒤덮이며 모든 능력치가 일시적으로 대폭 향상되었다.
“후우.”
이진한은 샛노랗게 갈라진 두 눈을 뜨며 전신 가득히 차오른 전능감에 옅은 한숨을 토해냈다.
이것만으로도 신이 된 감각이거늘, 정말로 신이 된다면 어떠한 느낌일까.
눈 앞에 펼쳐진 세상에는 형형색색의 파장들이 각기 다른 파동을 내뿜으며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살기를 뿜어낸 마인들은 마치 슬로우 모션으로 재생한 것처럼 아주 조금씩 이쪽에 가까워지고 있는 상황.
그 가운데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자신 분이었다.
‘여기서 성검까지 사용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악마화의 최대 출력 상태에서 성검까지 쥔다면 검성이나 마왕과도 능히 자웅을 겨뤄볼 수 있으리라 생각되었다.
하지만 아직 그것을 제어하는데 숙련도가 미숙해 둘을 한꺼번에 다루려면 의식적으로 힘을 제한할 수밖에 없었다.
쿠우웅─!
그라나다가 크게 울부짖으며 다시 한번 거센 마기의 격류를 토해냈다.
눈앞에 있는 마인들을 모조리 잡아먹어 버리고 싶다는 욕망을 표출하듯, 형상화된 마기는 날카로운 이빨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집어삼켜라.”
바포메트의 감정과 동화된 이진한은 그가 바란 대로 마검을 휘둘렀다.
단 일 검.
단 일 검에 「삼라만상」으로 만들어진 영역 내부가 시커먼 마기로 가득 찼다.
마인이라 할지라도 그 지독한 힘에 잠식되어 쓰러졌으며, 일순간 버텨냈다고 할지라도 사방에서 튀어나오는 날카로운 이빨에 전신을 물어 뜯겨 한 줌의 핏물이 되었을 따름이었다.
“후우.”
마인들의 힘마저 흡수하자 미칠듯한 고양감이 차올랐다.
이래서 마인들이 저들과의 계약을 끊어내지 못하는 것일까.
모든 마인을 쓰러뜨리고 힘을 흡수하는 것을 끝낸 이진한은 초인적인 절제력으로 악마화를 끝내려 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죽은 마인들의 시체 사이에서 뿜어진 사이한 기운이 한 곳에 응집되더니 커다란 눈을 만들어냈다.
-…네놈은, 누구지.
마왕, 아니 격이 부족한 걸 보니 고위 마족인 듯했다.
샛노란 동공 가운데 크리스탈 같은 다각형의 문양이 시시각각 움직이며 기이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진한은 그 모습에 피식 웃으며 그라나다를 들었다.
“보면 모르나? 눈은 장식으로 달고 다니는군.”
콰르릉!
하늘에서부터 시커먼 벼락이 내리꽂혔다.
이진한은 가볍게 그라나다를 휘두르는 것으로 그것을 막아내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대답 한번 과격하군.”
-하찮은 인간 주제에. 마인이 되었다고 이몸과 맞먹으려 하느냐.
“맞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마검의 날이 흉포하게 일렁인다. 저런 눈동자 정도는 당장 베어낼 자신이 있었지만, 문득 그보다 더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농담이고. 우리 마왕님께서 잡스러운 마인이 너무 많다고 하셨거든. 그래서 모두 정리해서 한 곳에 힘을 집중시킨 참이다.”
-마왕께서? 어떤 분을 지칭하는 것이지?
“내 마기를 보고도 모르겠나. 당연히 마르바스 님이다.”
-….
눈동자가 시뻘겋게 충혈되었다.
열을 받아도 잔뜩 받은 듯 달아올라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부풀었다.
-긴말하지 않겠다. 내 당장 마르바스 님께 간언할 터이니, 네놈은 움직임을 중지해라.
파스스스─.
녀석은 분노에 찬 목소리를 끝으로 사라져버렸다.
이진한은 그 모습을 보며 정말 오랜만에 시원한 웃음을 터트렸을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