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
이진한은 이때까지 자신의 진짜 이름을 그 누구에게도 발설한 적이 없었다.
엘레오노라에게도, 미르엘에게도, 일레이나에게도, 그리고 지금 눈앞에 있는 이리아에게까지도.
그렇다면 그녀는 어째서 자신의 이름을 저리 정확하게 알고 있을까.
머릿속으로 떠 오르는 한 가지 결론에 이진한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율?”
목소리의 끝이 살짝 떨렸다.
희미한 기대와 어렴풋한 두려움, 그리고 제일 많은 그리움을 담아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이리아, 진하율은 살짝 부끄러운 듯한 웃음을 흘렸다.
“그래도 한 번에 알아봐주네.”
“….”
이진한은 지체할 것 없이 강 속으로 뛰어들었다.
옷이 젖고 한가을의 싸늘한 한기가 몸속으로 파고들어 왔지만,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그는 개의치 않은 채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일단은….”
진하율은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이진한을 바라보며 가볍게 손을 뻗었다.
그러자 잿빛 바람이 일어나 주위를 감싸는 것과 동시에 그의 허리춤에 있던 템페스트를 끄집어내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무슨…?”
“나와 접촉했다는 게 저쪽에 알려지면 너도 여러모로 귀찮아질 테니까.”
주위를 감싼 잿빛 바람이 템페스트를 완전히 감쌌다.
진하율은 그 모습을 보며 씁쓸한 표정으로 손을 내렸다.
“정령 중 내 편을 들어준 건 전대 바람의 정령왕 밖에 없었거든.”
“네 편?”
“그래. 일단 조치는 해놓았으니까 내 존재를 눈치채진 못했을 거야.”
이진한은 잿빛 바람들을 바라보았다.
대현자의 눈으로도 파악할 수 없는 높은 격이다. 마치 이곳에 왔을 초기에 마왕 마르바스나 고대 악마인 바포메트의 존재와 마주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하율, 너는….”
“후대의 몸에서 깨어난 거냐고? 아쉽지만, 아니야. 여기 심어진 건 혈계 전승으로 이어진 의식의 잔재일 뿐이니까.”
“의식의 잔재라고?”
“그래. 본체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나로서도 알 방법이 없어.”
“….”
“내 혈육이 너에게 연정을 품으면 심어진 마법이 발동하도록 작동해놓았는데, 과연 같은 핏줄이라 그런지 남자 취향도 같나보네. 잘 작동해서 다행이야.”
“…랭케 가문의 후손들은 네가 낳은 게 아니라 만들어낸 거라며.”
“그런 것까지 알아?”
“실피드가 말해줬다.”
“이래서 입 싼 녀석은.”
진하율은 투덜거리며 손가락으로 강의 표면을 튕겼다.
“나만 그런 게 아니야. 다른 녀석들도 저마다 하나씩 남겼어.”
“알아 《영원》이랑 《안식》건 만났어.”
“그래? 용케도 천년이나 남아있었네. 나 빼고 다 없어질 줄 알았는데.”
“….”
이진한은 잠자코 진하율을 바라보았다.
머리색과 눈동자를 제외하면 그가 기억하고 있던 현실의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다. 사실 마지막이 조금 좋지 않게 끝나서 이렇게 마음 편히 대화할 기분이 나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그의 불편한 심기를 눈치챈 듯 진하율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직 기억 없지?”
“…천년 전을 말하는 거라면.”
“사실 없는 게 나을지도 몰라. 여기 처음 오고 나서부터는 별일이 다 있었으니까. 다 그 빌어먹을 여신 때문이긴 하지만.”
“그래. 그 부분 먼저 묻고 싶은데.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기록에 따르면 자신들은 분명 고대 신을 쓰러뜨리고 목표를 달성했다.
그렇다면 그 이후에 지구로 돌아가는 것을 거부하고 이 세계에 남기를 희망했다는 것일까.
“다 빌어먹을 여신 때문이라고 했잖아. 우리는 전부 돌아가는 걸 희망했어. 아무리 이곳의 환경이나 처지가 좋다고 한들 평생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하지만 여신이 우릴 배신했지.”
길고 긴 여정 끝에 돌아온 것은 보상이 아니라 차디찬 배신이었다.
최초의 약속과 다르게 여신은 그들이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며 못 박았고, 서로 연결되는 소통의 창구를 일방적으로 무너뜨렸다.
“처음에는 어찌 되나 싶었는데, 그래도 이쪽에서 쌓은 명성이나 힘이 있으니까 살아가는 것에는 딱히 문제 될 건 없었어. 그래도 우리가 당하고만 있을 사람들은 아니지?”
진하율은 문득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여긴 어디야?”
“오스칼 제국의 도시 중 하나야. 마계가 제국 수도에 게이트를 열어 점령했지. 이제 얼마 뒤에 대륙을 싸우겠다며 선전포고까지 했어.”
“마계?”
“그래. 그러니까….”
이진한은 그간 있었던 일들을 간략히 말해주었다.
마계 세력, 고대 신의 사도들,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잔재까지.
모든 이야기를 들은 진하율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 거기까지 도달하긴 했나 보네. 대충 예상한 거랑 비슷해.”
“예상? 비슷하다고?”
그 말이 주는 의미에 이진한은 두 눈을 크게 떴다.
천 년 전부터 지금까지, 돌아가는 상황이 이렇게 되리라는 걸 예상하고 있었단 말인가.
하지만 진하율은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웃음을 터트리며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툭 쳤다.
“그렇게 놀랄 일이야? 예상을 한 장 본인께서?”
“…내가?”
“그래. 네가.”
“어떻게? 그때는 대현자도 아니었는데.”
진하율은 다시 한번 웃음을 흘렸다.
“아직 상태창이랑 그런 거 있지?”
“어? 어.”
“그게 왜 지금까지 남아있을 것 같아?”
“…무슨.”
“여신은 우리에게 이곳의 인간으로 살라면서 그간 내린 권능을 모조리 빼앗아갔어. 상태창 역시 마찬가지고. 지금 네게 있는 건 네가 직접 만든 거야.”
“상태창을 만들었다고?”
대화를 나눌수록 의문과 경악이 계속되었다.
“그래. 과거의 너는 지금보다 훨씬 위대한 존재였으니까.”
진하율은 먼 과거를 그리는 듯한 눈으로 기억을 회상했다.
“얼추 보니 초월지경은 전부 달성했나 보네.”
“그래.”
“이제 거기서부터 시작이야. 천년 전의 너는 지금보다 훨씬 강했어.”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대현자에 도달한 건 반년 전의 일인데.”
“도달한 게 아니라 천년 간의 봉인으로 퇴보된 경지를 되찾은 거지. 봉인에서 풀려난 직후에는 약체화된 상태였을 거야. 시간이 지나면서 찬찬히 그것들을 다시 찾고 있는 거고.”
“…내가.”
이진한은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천년 전의 자신이 지금보다 더 강했다고?
“그래. 사도들의 말로는 최소 반신 격에 준하는 존재라고 하던데. 그러니까 인간의 몸으로 천년을 버틴 건가? 하지만 그마저도 여신에게 닿는 것이 부족했어.”
비록 여신에게 닿지 못했지만, 영웅들은 그에게서 가능성을 보았다.
그래서 한 곳에 힘을 모았고 추후에 또 한 번의 기회를 기약하기로 했다.
“…배신자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재회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
“배신자?”
“그래. 우리 중에 누군가 배신한 사람이 있어. 자기 혼자 지구로 돌려보내준다고 했는지는 몰라도 여신의 손을 잡다니. 미친 거지.”
동료 중에 누군가 배신했다는 것일까.
저마다 모두 신뢰가 돈독한 관계였다.
이진한은 도무지 그들이 자신을 배신했다고 믿기 어려웠다.
“뭐, 배신자는 끝까지 밝히지 못했으니까 넘어가고….”
“잠깐만. 그러면 고대 신은 악신이 아니었던 거지?”
“그래. 그건 여신이 세운 프레임이야. 사도를 만났다면 말해줬을 텐데?”
“쉽사리 믿을 수 없는 이야기니까.”
“하긴, 그래. 여신과 고대 신은 서로 반목하는 존재일 뿐 선과 악의 대변자는 아니야. 그들이 네게 접촉해오는 것도 예상한 일이긴 하네.”
“그러면….”
“그들과 협력해서 다시 신을 세우고, 여신을 끌어내려야지. 그래야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가니까.”
“…가능할까?”
이진한은 살짝 복잡한 심경을 담아 그리 말했다.
당장 마왕이나 검성 같은 존재들과의 싸움도 불분명한 가운데 신적인 존재와 맞서 싸우라니.
착!
진하율은 두 손을 들어 그런 이진한의 뺨을 두들겼다.
그러곤 그 촉감을 되새기려는 듯 마음대로 문지르며 한껏 진지해진 눈빛으로 말했다.
“할 수 있어. 너라면. 기억 쪽은 어쩔 수 없지만, 곧 네 온전한 힘을 되찾게 될 거야.”
“어떻게?”
“오스칼 제국 쪽에 안배해놓은 걸로 알고 있어. 마침 여기서 활동한다고 하니 잘 되었네.”
“수도는 이미 마계한테 점령당했는데?”
“수도까지 갈 필요는 없을 거야. 때가 되면 찾아오게 조치했을테니까. 너 자신을 조금 더 믿어봐.”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자세하게 이야기해달라.
그렇게 말하려던 찰나, 이진한은 자신을 바라보는 진하율의 눈동자에서 잿빛 색이 점차 꺼져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웅웅─.
주위를 둘러싼 바람 역시 조금씩 일렁이며 사라져버릴 듯 힘 빠지는 소리를 토해냈다.
진하율은 그것들을 바라보고는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한번 이진한의 뺨을 문질렀다.
“말하고 싶은 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안타깝네. 시간이 야속하다.”
진하율은 아련한 표정과 함께 옅은 미소를 지었다.
서로 물에 젖어 있어 차갑기 그지없지만, 뺨에 닿은 그녀의 손길은 따스했다.
“….”
진하율의 입술이 달싹이며 무언가를 말하려 했다.
하지만 이내 움직임을 멈추고는 다시 진지하게 뜬 눈으로 그를 바라봐왔다.
“하나만 명심해.”
“…어.”
“여신이든 고대 신이든 다 믿지 마. 오로지 네 판단대로만 행동해. 후회라면 천년 전에 충분히 했으니까.”
“하율아.”
“됐어. 미련만 더 커지니까. 이 아이한테나 잘 해줘. 나라고 생각하고. 생김새는 비슷하잖아?”
“성격은 딴판이던데.”
“그게 내 진짜 성격이라는 거겠지. …하여튼.”
진하율은 손가락을 들어 이진한의 뺨을 쿡 찌르며 작별 인사를 고했다.
“잘 살아. 나처럼 후회하지 말고.”
“…그래.”
사아아─.
잿빛 바람이 모두 흩어졌다.
멈춰 있던 시간이 다시 흘러갔고, 주위는 깊은 밤의 적막에 잠겨 한치의 인기척조차 느낄 수 없게 되었다.
풀썩.
진하율은 곧 눈을 감더니 그대로 의식을 잃고 쓰러져 내렸다.
이진한은 그런 그녀의 가녀린 몸을 품에 안아 들고는 하늘 높이 떠 있던 다를 바라보며 깊은 탄식을 내뱉었다.
-…? 뭐였습니까?
“…그녀가 발을 헛디뎌 강에 빠졌다.”
-이런. 덤벙거리는 성격이군요. 하긴 《창조》부터 그러긴 했습니다. 현자 님이 더 잘 아시겠지요.
“그러긴 했지.”
이진한은 피식 웃은 채 강 뭍으로 걸어 나왔다.
그녀의 말대로 실피드는 멈춰진 시간 동안 있었던 일들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한 모습이었다.
“이제 돌아가자. 피곤해 죽겠다.”
작은 불꽃을 일으키는 것으로 젖은 옷을 바싹 말려낸 그는 척후대가 있는 곳을 향해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어두운 숲 안쪽에서 느껴지는 수많은 살기에 멈춰서며 고개를 들었다.
불쑥─!
로브 후드에 잠들어 있던 까망베르가 튀어나와 그 앞에 섰다.
새끼처럼 보이던 몸집이 순식간에 불어나 집채만한 크기로 자라났고, 매끄러운 검은 비늘과 함께 날카로운 이빨을 보며 숲 안쪽을 향해 날카로운 적의를 곤두세웠다.
-크르르르.
와이번이라기보단 작은 드래곤과 같은 형태였다.
이진한은 품에 든 이리아의 몸을 까망베르 등에 올려놓으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녀를 부탁한다.”
-키잉!
힘차게 고개를 끄덕여오는 까망베르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이진한은 곧 마검을 뽑아 들었다.
직전까지의 일로 머릿속이 복잡하기 그지없다.
한바탕 날뛴다면 조금은 정리가 될 터.
“오너라.”
마검의 날을 세운 이진한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