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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190화 (190/210)

◈ 190.

“네.”

로네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이진한은 아스칼론을 들어 올렸다.

로네는 성검과 링크되어 있다. 그런 그녀가 무언가를 느꼈다는 건 성검 쪽에서의 변화일 가능성이 컸다.

스윽.

검신을 쓰다듬자 서늘한 감각이 손끝 아래 드리운다. 티 하나 없는 순백으로, 신의 잔재를 머금어서 그런 것인지 이전보다 더 영롱한 빛깔을 뿜어내는 것 같았다.

“아스칼론도 진명 개방이 머지않았나.”

어찌 되었든 자신에게는 좋은 이야기였다.

용살검과 달리 최상위 등급의 무구인 성검과 마검은 설사 그랜드 소드 마스터에 올랐다고 할지라도 진명 개방에는 검 자체의 각성이 필요했다.

당연히 그라나다 쪽이 더 먼저 될 줄 알았다.

그라나다는 이곳에 온 초기부터 꾸준히 전투 경험을 쌓았고, 그 원초인 바포메트와도 끈끈한 관계를 쌓아 지금에 이르렀다.

이전부터 몇 번 신호가 있기도 했고, 잔재의 힘을 흡수한 것으로 바포메트의 격이 크게 올랐다.

솔직히 왜 고대 악마가 용사인 자신을 좋아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쓸 수 있는 수단이라면 망설임 없이 사용할 뿐이었다.

퉁퉁.

힘의 흡수가 끝난 성검으로 잔재를 두드렸다.

성검과 마검 그리고 그 이외에도 많은 힘을 끌어다 썼으나, 잔재에서 느껴지는 힘은 이전과 그리 차이가 없었다.

“마왕은 대체 얼마나 강한 거지.”

마계 세력은 마왕의 강림을 위해 고대 신의 잔재를 원하고 있다. 그렇다는 건 이것이 필요할 만큼 막대한 힘이 필요하다는 것일 터.

이 전부가 소모되는 것은 아닐 테지만, 적어도 절반 이상은 들어가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이라면 나도.’

대현자 하위 모든 전투 클래스가 초월지경에 도달했다.

그 위에 있는 신화인지 뭔지 하는 건 아직 보이지 않았지만, 이전의 경험으로 보아 서로 제약 없이 싸운다면 어느 정도 대등하게 맞설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거기에 성검과 마검까지 진명 개방의 각성을 한다면 정말로 승산이 있지 않을까.

-현자님!

잠시간 잔재를 바라보며 상념에 잠겨 있을 찰나, 저 위쪽에서부터 호에엥이 그를 불러왔다.

“무슨 일이야? 설마, 마인이라도 쳐들어왔어?”

꽤 다급해 보이는 모습에 이진한은 성검과 마검을 모두 챙겨 들었다.

-그건 아닌데, 드래곤이 현자님을 찾아왔어요! 안면이 있는 사이라던데요? 지금 헤으응 언니가 결계 밖에서 대치하고 있어요!

“드래곤?”

이진한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신을 찾아올 만한 드래곤이라면 나탈리밖에 없다.

이쪽에 온다고 이야기해놓지 않았으니 일행에게 물어 찾아온 것일 터.

무슨 급한 일이 있기에 직접 발품을 팔아가며 이곳까지 온 것일까.

-따라오세요!

그는 호에엥의 안내를 받아 결계 밖으로 향했고, 이내 자신을 기다리던 붉은 머리의 미남자와 만날 수 있었다.

“베르너 님!”

“크루시아?”

레드 드래곤 크루시아, 다른 왕국에서 유희를 보내고 있을 그가 어째서인지 그곳에 자리했다.

“무슨 일이야. 아직 유희 중일 텐데.”

“혹시 최근에 나탈리를 만나신 적이 있으십니까?”

크루시아는 다짜고짜 그것을 물었다.

굳은 낯빛을 하고 있기에 무언가 심상치 않은 것을 느낀 이진한은 잠시간 기억을 되새겼다.

“나탈리? 한 달은 더 된 것 같은데. 그 이후로는 서로 바빠서 못 봤다.”

성국의 초대를 받았을 때 마왕과 결탁한 흑십자단의 술수에 당한 이후 이쪽을 찾아온 것을 끝으로 보지 못했다.

“혹시 무얼 한다고 들으신 적 있으십니까?”

“자기 나름대로 마계 쪽을 조사해본다고 했는데, 왜 그러지?”

“제길….”

크루시아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저도 소식이 끊긴 지 한 달이 지났습니다. 단순히 소식만 끊긴 게 아니라, 용언으로 구성된 드래곤끼리의 연결도 먹통이 되어버린 걸 보면….”

운신할 수 없을 정도의 상처를 입었거나, 혹은 죽었거나.

차마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한 채 고개를 푹 떨궜다.

“근 한 달간 대륙을 전부 뒤졌습니다.”

유희는 당연히 포기했다.

보통의 드래곤이라면 개연성 있는 상황을 조성해 무대에서 퇴장했겠지만, 크루시아는 그럴 여유조차 갖지 못했다.

남매 같이 자라왔던 나탈리의 행방불명이다.

이것저것 잴 때가 아니었기에 그것을 깨닫는 즉시 자리를 박차고 나와 주변을 샅샅이 수색했다.

대륙 곳곳을 넘어 동면에 든 드래곤들의 레어까지 뒤진 끝에 결국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오스칼 제국. 아마 그곳에 혼자 간 것 같습니다.”

“네가 찾을 수 없었다면 그렇겠지.”

드래곤이 한 달간 이 악물고 수색한 끝에 찾지 못했다면 그곳밖에 답이 없었다.

하지만 마왕을 비롯한 고위 마족이 우글거리는 제국은 아무리 드래곤일지라도 쉬이 발을 들이기에는 어려운 장소였다.

“도와주실 수 없겠습니까.”

크루시아는 간절한 표정으로 그리 물었다.

“그래. 어차피 이쪽에서도 척후대를 보내려 하고 있었어.”

마르바스가 말한 때까지 아직 얼마의 시일이 남아 있다.

슬슬 저쪽의 상황을 파악하고 구체적으로 계획을 수립해야 했기에 의회에서도 비슷한 말이 나오고 있었다.

“우리가 직접 나서서 수도 한복판에서 난리 치지 않는 이상 마왕이나 고위 마족급이 나설 일도 없겠지. 그러니 빠르게 들어가서 탐색하고 오자.”

아직 마왕이 강림한 낌세는 없다.

고작 해봐야 마르바스처럼 화신체로 그 격의 일부만 가져왔을 터.

그 정도는 어렵지 않게 상대할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그래. 혹시 모르니까 마음 단단히 먹고.”

이진한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

의회에서는 곧 오스칼 제국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한 척후대의 준비를 꾸렸다.

그 구성 인원은 이진한이 직접 꾸린바.

성왕 프레이 역시 동행하고 싶어 했지만, 그녀의 위치를 생각해 거절하고 유리아를 비롯해 여러 팔라딘과 사제들로 대신했다.

그 뒤로는 휘몰아치는 불꽃 기사단의 부단장인 헨더슨과 단원들 그리고 이터널 학파의 호베르트 등 30명가량의 인원으로 편성되었다.

그 광활한 땅을 수색하러 나가는 것이다.

다소 적은 느낌이 있었지만, 어디에 또 배신자가 숨어 있을지 모르니 최소한으로 인원을 구축했다.

척후대가 제국으로 출발한 것은 마계의 공세가 시작되기 전까지 대략 보름이 남은 날.

제국 국경은 안쪽으로부터 피난해오는 인파의 행렬로 가득한 상태였다.

“…수도 주변 도시는 이미 장악당한 뒤랍니다. 생존자는 없고, 언데드만이 가득하다더군요.”

사람들 사이를 들쑤시며 정보를 캐내 온 헨더슨이 굳은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솔직히 어느 정도 피해가 있으리라 생각은 했지만, 이건 예상보다 훨씬 규모가 컸다.

“수도 주변의 대도시가 대충 열네 곳이었지.”

“각각 백만이 넘는 규모입니다.”

“…그 절반만 잡아도 칠백만이네.”

마계 군세의 무서운 점은 단순히 인간을 학살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죽인 인간은 언데드가 되거나 망령의 재료로 합쳐져 새로이 태어난다. 당연히 그 강함은 보통 사람보다 더 강하고, 전선에서 병사로 활약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었다.

“제국의 인구가 대충 3억. 아직 전부 대피하지 못했으니….”

“시간이 갈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겠죠. 저들도 그걸 알고 한 달이라는 시간을 잡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진한은 툭 튀어나온 언덕 위에 서서 넓은 평야를 내려다보았다.

제국의 시민들이 저마다 초췌하고 피폐한 모습으로 짐을 잔뜩 짊어진 채 국경을 넘고 있었다.

여기 있는 건 그중 일부였다.

이미 넘어간 이들도 많았고, 아직 이곳에조차 도달하지 못한 이들 역시 많았다.

“베르너 님!”

정보를 얻기 위해 흩어져 있던 엘레오노라가 손을 흔들며 그들에게로 뛰어왔다.

그녀는 쥐고 있던 구겨진 지도를 펼치며 제국의 지형이 표시된 그림을 가리켰다.

“음식이랑 맞바꾸고 얻은 정보에요. 저희가 들어가려면 이곳 라프네스 강줄기를 타고 서쪽 영지를 돌파하는 게 가장 무난할 것 같아요.”

마계 군세는 쏟아져 나오지 않을 뿐 제국 내부를 활보하고 있었다.

이미 공격받은 영지는 두 자릿수가 넘어갔기에 최대한 충돌을 피하면서 우회해야 할 듯싶었다.

“좋아. 일단 이 루트로 출발한다. 헨더슨 대원들을 모아줘.”

“알겠습니다.”

곧 결집한 척후대는 밀려 나오는 피난민들의 흐름을 거슬러 제국 안쪽으로 달려나갔다.

이 안쪽으로부터는 적의 영역권. 언제든 습격당할 수 있기에 척후대는 각자 감각을 날카롭게 곤두세웠다.

하지만 그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을 지나 사흘째에 이르자 모두 이상함을 느꼈다.

“흔한 마물조차 없군.”

“이 정도까지 왔으면 적어도 흔적은 보일 줄 알았는데.”

어느 야산 아래 있는 후미진 공터에 자리 잡은 척후대는 이제껏 수집한 정보를 공유하며 의아한 분위기로 이야기를 나눴다.

“마물이라기보단 같은 인간 측에 의한 약탈이나 강도가 더 많았습니다.”

“누가 마물이고 누가 인간인지 참 구분하기도 힘들군요.”

이진한은 모닥불 위로 장작을 내던지며 턱을 괬다.

“조사를 위해선 더 깊숙이 들어갈 필요가 있나.”

“사실 여기도 국경 부근이나 마찬가지예요.”

“3일이나 말을 탄 채 달려왔는데 국경 부근이라니. 땅덩어리가 얼마나 큰 거야.”

엘레오노라의 말에 헛웃음을 토해낸 이진한은 슬쩍 고개를 돌려 척후대 구석에 있던 크루시아를 바라보았다.

“어이.”

“현, …베르너 님.”

“흔적은 느껴져?”

크루시아 역시 나탈리를 찾기 위해 탐사대와 동행한 상태였다.

원래였더라면 신원이 불명인 이는 포함시키지 않았을 터이지만, 프레이에게 슬쩍 드래곤이라 알린 것으로 동의를 받아냈다.

“…나탈리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드래곤의 잔향이 희미하게나마 느껴지긴 합니다. 자세한 건 더 안쪽으로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여차하면 나랑 둘이서라도 가보자.”

다른 이들은 위험하겠지만, 드래곤인 그라면 제 몸 정도는 지킬 수 있을 터.

여차하면 폴리모프를 풀고 드래곤인 상태로 날아서 도망치면 되는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라이더 스킬도 있었지.’

‘월드’에서도 드래곤을 사역하고 싶었지만, 어지간한 성검이나 마검보다 비싼 탓에 아쉬움만 달랬다.

여차하면 크루시아의 머리에 탄 채 싸워볼 수도 있는 것일까.

그런 시답지 않은 생각을 하며 얼마간 있었을까, 척후대는 회의를 끝내고 내일을 위해 잠자리에 들었다.

“….”

이진한 역시 상념을 끝내고 잠자리에 들 찰나, 침낭에 누워있던 이리아가 살며시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리아?”

잠이 오질 않는 것일까.

잠시간 자리에서 뒤척이던 이진한 역시 몸을 일으켜 그녀가 나아간 방향을 따라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강?”

울창한 숲 가운데 한 줄기 강이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그 가운데 서서 어두운 하늘 위에 떠 오른 달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목욕이라도 하려는 것인가.

그는 눈치껏 자리를 비우려 했지만, 어째서인지 이리아가 옷을 입은 채 물에 들어가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리아?”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이진한은 조심스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일까.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린 이리아와 시선을 마주친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청명할 정도로 푸른 눈동자 가운데 아무런 감정조차 깃들어 있지 않다. 그때 정신의 한 부분과 연결되어 있던 실피드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해왔다.

-베르너 님, 이건…!

하지만 말을 전부 내뱉기도 전에 시끄러운 노이즈가 귓가를 엄습하며 실피드와의 연결을 끊어냈다.

그 갑작스러운 현상에 인상을 찌푸린 이진한이 머리를 부여잡았을 찰나, 물 가운데 있던 이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이진한.”

그 누구도 알지 못할 이름이 그녀의 입에서 토해져 나왔다.

“오랜만이야.”

사뭇 부끄러운 듯 옅은 미소를 지으며 물망초 빛깔의 머리카락 끝을 매만진다. 그 익숙한 모습에 이진한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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