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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189화 (189/210)

◈ 189.

이진한은 즉시 전투태세를 취했다.

「삼라만상」으로 공간을 분리해 그들이 도망가는 것을 봉쇄함과 동시에 마르바스와의 싸움 때처럼 주변이 피해 보는 것을 방지했다.

츠즈즈즈─.

사방이 잿빛으로 물들어간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허무 속, 수많은 창칼이 솟아나며 모순된 섭리를 이루게 했다.

손가락 하나만 까딱한다면 수많은 공격이 쏟아져 내릴 그 상황 가운데, 이진한은 에우리스테우스 옆에 선 존재의 기운이 어째서인지 익숙하다는 걸 느꼈다.

“…사도?”

“그렇다.”

대현자의 눈이 표시해준 데이터를 떠올리며 묻자, 사도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일전 마법으로 통한 무의식 저편에서는 흐릿한 얼굴이었지만, 지금은 뚜렷한 인간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이렇다 할 특이점은 없는 평이한 생김새.

그와 반대로 눈동자 안에 깃든 기묘한 빛은 단번에 시선을 이끌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

이진한은 경계를 지우지 않았다.

에우리테우스는 검성과 손을 잡은 적이다. 전체적인 수준은 자신에게 미치지 못했으나, 그 완력만은 충분히 주의할 만한 수준이었다.

“저쪽과는 구면인데. 얼마 전에 피 튀기게 싸웠지, 아마?”

“대략적인 이야기는 이미 전해 들었다. 설마 너와 충돌하게 될 줄은 이쪽도 예상치 못했다고 전해두지.”

사도는 슬쩍 에우리스테우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에우리스테우스는 먼 옛적에 있었던 사도의 후손이다. 그 사도는 태초의 반신으로 우리의 신을 보좌하던 역할이었지.”

“…그렇다면 어째서 검성의 손을 잡은 것이지?”

“그들의 동향을 감시하기 위해서이지. 마르바스는 잔재 중 일부를 지니고 있으니.”

사도는 성가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금은 그들에게서 이탈했다. 더 깊게 관여하기 위해서는 마왕과 계약을 맺어야 할 필요가 있으니 말이야. 설사 사도라 할지라도 마왕의 마기는 감당키 어렵다.”

“그걸 알려주려고 날 찾아왔다?”

“그건 이유 측에도 끼지 못한다. 오늘 너를 찾아온 것은 드디어 때가 도래했음을 알려주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는 건.”

“신의 잔재를 해방할 준비는 끝났겠지, 검은 현자여.”

사도의 말에 그는 침묵했다.

솔직히 말해서 아직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신의 잔재를 해방하면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흘러갈 터.

만일 저들이 자신에게 거짓을 고하는 것이라면 자신은 마왕이나 검성보다 더 강대한 적과 맞서 싸우게 될 가능성도 있었다.

“준비는 끝났다. 끝났지만….”

헤으응에게 넘겨받은 잔재의 리스트는 총 39개.

본래라면 각 성지는 독립된 구역으로 존재했지만, 세 자매의 도움으로 모든 가디언과 연계해 《지혜》의 키워드로 그들을 지배하에 두는 것에 성공했다.

즉, 이쪽이 마음만 먹는다면 잔재의 해방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아직 핵폭탄의 스위치를 누를 각오를 세우지 못했다.

“아직 고민하고 있는가.”

사도는 그런 이진한의 표정을 흘깃 바라보더니 이내 조소를 흘렸다.

“이전에 말했듯 이건 거래다. 우리는 좀 더 수월히 목표를 이루고, 너는 너와 네 동료의 비틀린 운명을 바로잡을 기회를 얻을 수 있는 등가 교환이지.”

“…모시는 신을 부활시키는 건 너희들의 숙명이 아닌가? 그런 것치고는 그리 간절해 보이진 않은데.”

“천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우리가 흘러가는 세월을 그저 구경만 했다고 생각하는가. 말 그대로 목표를 수월하게 달성하기 위해서 너와 협력하려는 것이다.”

이미 상당한 준비를 끝내놓았다는 소리였다.

제법 설득력 있게 들려오는 것은, 비단 그들뿐만 아니라 비슷한 목적을 지닌 마계 세력 일부와 손을 잡고 합작해온 전과도 있기 때문이리라.

‘거기에 사도 한 명의 힘도 예사롭지 않아 보여. 저들이 다수라면 물밑에서 무언가를 준비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테지.’

오히려 지금까지 고대 신의 잔재가 봉인된 성지를 전부 공략하지 못한 것이 의아할 정도였다.

…아니면 그러지 않은 다른 이유가 있던가.

“한 달 뒤, 마계의 군세가 오스칼 제국으로부터 대륙을 향해 진군을 시작한다지. 우리는 그때를 노릴 것이다. 선과 악이 뒤엉키고,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혼돈의 도가니 가운데.”

새로운 신을 모실 것이다.

그리 말하는 사도의 목소리는 잔잔한 광기에 차 있었다.

“준비는 되어 있더니 다행이로군. 대계에 차질이 없도록 그때에는 잘 부탁하지. 뭐, 선택은 네 몫에 달려 있겠지만 말이야.”

할 말은 그걸로 전부 끝이라는 듯 그는 가볍게 손을 휘저어 「삼라만상」으로 만들어진 잿빛 공간에 균열을 만들어냈다.

이진한은 그들이 떠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지만, 굳이 그러지 않은 채 잠자코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

에우리스테우스와 함께 걸음을 옮기던 사도는 문득 무언가를 떠올린 듯 이내 자리에 멈춰 섰다.

“그녀를 조심해라. 가증스러운 여신의 하수인을.”

의미심장한 목소리였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상념에 빠져 있던 이진한은 갑작스레 툭 튀어나온 말에 당황하며 고개를 들었다.

“여신의 하수인? 프레이?”

“그래. 여신이 내린 신탁이라면 불구덩이라도 웃으며 뛰어들 족속들이다. 이미 뇌가 절여져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구분할 판단력조차 남아 있지 않지. 잘못하다간 함께 휘말릴 수 있으니 거리를 두어라.”

누가 누구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인가.

자신이 보기에 뇌가 더 절여진 것은 네놈들 쪽이다. 그런 말이 혀끝까지 치솟았지만, 이진한은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입을 닫았다.

***

다음날.

날이 밝음과 동시에 일행을 불러 모은 이진한은 그녀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잠깐 북쪽 숲에 다녀올게.”

“북쪽 숲이요?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엘레오노라의 물음에 그는 슬쩍 아스칼론을 들어 올리며 답했다.

“마르바스와의 싸움에서 꽤 기운을 소모했거든. 북쪽 숲에 있는 고대 신의 잔재로 보충할 필요가 있어.”

“그런가요. 오늘 일정은 널널해서 같이 가도 될 것 같은데.”

“괜찮아. 혼자 빠르게 다녀올게. 다른 이들한테는 마수 잡으러 갔다고 해주고.”

“알겠습니다.”

미르엘은 맡기라는 듯 굳건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프레이와 유리아는 동석하지 않은 상태였다.

사도의 말대로 그녀들의 뇌가 절여져 여신의 꼭두각시가 되어버렸을 수도 있었기에 지금 당장은 조금 거리를 둘 생각이었다.

“그럼 다녀올게.”

일행에게 손을 흔들며 의회의 건물을 떠난 이진한은 곧바로 텔레포트 게이트로 발걸음을 옮겼다.

도원경, 그리고 마르바스와의 싸움에서 남은 피로감이 아직 전신에 남아 있다.

이왕 그곳으로 돌아간 김에 온천에 몸이라도 담그고 와야겠다며 마음먹었다.

웅웅.

몇 번을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은 텔레포트 게이트를 넘어 단번에 노스 벨헤드렘에 도달했다.

그다음 말에 탄 뒤 성을 달려나갔고, 그대로 척박한 대지를 가로질러 북쪽 숲까지 단숨에 도달했다.

캉! 캉!

숲 앞에서는 설화석을 캐내는 작업이 한창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래도 숲의 마녀들과 맺은 규정대로 분리된 구역은 철저하게 지키는지 그 가장자리에는 얼씬조차 하지 않았다.

이진한은 멈추는 일 없이 숲 가운데로 나아갔고, 손쉽게 결계 너머로 진입했다.

-아, 안녕하세요.

그 앞에서 그를 맞아준 것은 어린 하와와였다.

마지막으로 본 지 아직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눈에 띄게 성장한 그녀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수줍은 모습으로 반가움을 표했다.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네. 언니들이 잘 대해주세요.

“그래. 좋겠네.”

이진한이 그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어줄 찰나, 저 멀리에서 두 인영이 추가로 모습을 드러냈다.

-베르너 님!

-하와와도 참. 혼자 나가다니.

헤으응과 호에엥 역시 반가운 얼굴로 나와 그를 맞아주었다.

세 자매와 함께 숲을 가로질러 저택에 도착한 이진한은 응접실에 들어가자마자 본론을 꺼내들었다.

“이전에도 말했지. 고대 신의 잔재를 해방해야 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그러셨죠.

“괜찮겠어?”

그녀들은 《영원》에게 명령 받아 대에 대를 거듭하며 이 땅을, 봉인된 신의 잔재를 지켜왔다.

아니, 이곳 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 있는 성지 역시 모두 마찬가지일 터.

그런 그것을 자신의 선택 하나만으로 해방해도 괜찮은 것일까.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저희는 그저 이걸 지키라는 명령을 부여받은 존재들이라서요. 하지만 베르너 님의 말씀이라면.

“그런가. 고마워.”

-이전에 말씀드린 대로 이곳을 비롯해 모든 가디언들에게는 영웅 중 하나인 《지혜》에게 권한을 할당해 마스터키를 발동해놓았어요. 원하신다면 명령을 내리는 것으로 일시에 해방이 가능하답니다.

“그래. 일단은 다시 방비를 단단하게 해줘. 마족들이 노려올 수도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대략적인 이야기를 끝낸 이진한은 곧바로 저택의 지하로 향했다.

봉인된 신의 잔재까지 가는 길은 이전의 하와와가 제 심장을 대가로 막아버렸지만, 「삼라만상」을 익숙하게 다룰 수 있게 된 이진한은 어렵지 않게 그 통로를 열었다.

“…다시 봐도 장대한 광경이네.”

짤막하게 감탄을 토해낸 그는 난간에서 뛰어내려 고대 신의 잔재에 다가갔다.

툭.

가볍게 그 위에 손을 올리자 이루어 말할 수 없는 강대한 힘이 뿜어져 나와 몸 안으로 흡수되는 것이 느껴졌다.

도원경에서의 성과인지 이전보다 받아들이는 힘의 총량이 비약적으로 늘어난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이제는 상태창에 표시되는 수치가 깨질 정도로, 한계를 넘어섰다는 표현이 조금 더 정확한 것 같았다.

삐이.

그때 후드에서 누워있던 까망베르가 불쑥 고개를 내밀더니 휘몰아치는 마력 파동의 줄기 중 하나를 거칠게 물어뜯었다.

그러면서 순식간에 그 기운을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이진한이 어찌할 새도 없이 그것을 흡수해버렸다.

“어엇!”

작은 아이 정도만 했던 까망베르가 순식간에 성체 와이번을 뛰어 넘는 크기로 자라났다.

조금 더 과장을 보탠다면 아룡 중 최상위 종족인 드레이크를 뛰어넘을 정도의 몸집이었다.

크릉.

까망베르는 칠흑같은 새카만 비늘을 자랑하며 멀뚱히 서 있던 이진한에게 얼굴을 비벼왔다.

몸은 커졌어도 행동은 그대로였기에 그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킁.

그 손길을 만끽한 까망베르는 다시 후드에 들어가기 위해 머리를 들이밀었으나, 자신의 몸집이 너무 커졌음을 깨닫고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소형화 포션부터 개발해야겠는걸.”

그 광경에 이진한이 쓴웃음을 지었을 찰나, 녀석의 전신으로 세찬 마력의 여파가 뿜어져 나왔다.

“…엇?”

집채만 했던 까망베르의 크기가 순식간에 갓난아이만한 정도로 줄어들었다.

창공의 군주 핏줄을 이어서 그런 것인지 마법도 쓸 줄 아는 영물인 듯했다.

까망베르는 기쁜 듯 작게 울음을 토해내고는 다시 이진한의 후드 안쪽으로 폭 들어가 모습을 감췄다.

“이건 또 의외의 전력인데.”

저 정도 덩치라면 싸움에 있어서도 큰 도움이 될 터.

단순히 크기 조절 마법 말고도 다양한 마법을 체득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흠.”

이진한은 내친김에 아스칼론과 그라나다를 꺼내 쥐었다.

용아청성창이나 다른 무구들은 외부에서 흘러들어온 힘을 담을 그릇이 되지 못한바.

오로지 성검과 마검만이 고대 신의 잔재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을 감당할 수 있었다.

파아앗!

바포메트가 그라나다를 통해 그 기운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다.

그 역시 격이 높아진 것인지 이전보다 받아들이는 힘의 단위가 한껏 늘어난 듯했다.

츠즈즈즈─.

아스칼론에서 로네가 실체화했다.

새하얀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바닥에 내려선 그녀는 신기하단 눈빛으로 고대 신의 잔재를 매만졌다.

“이건….”

“고대 신의 잔재다. 천 년 전에 우리가 쓰러뜨렸던.”

“이걸 부활시키려고 하는 건가요.”

“…솔직히 아직 모르겠어. 혹시 그녀가 남긴 말이 있어?”

“글쎄요. 대전쟁 시절의 이야기를 하실 때는 항상 슬퍼보이셨으니까요.”

“그런가.”

짧게 숨을 토해낸 이진한은 로네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이 힘을 흡수할 수 있겠어?”

“네, 문제는 없어요. 그보다 무언가 바뀔 것 같아서 말씀드리려 나온 거예요.”

“…바뀔 것 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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