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188화 (188/210)

◈ 188.

《지혜》의 검은 현자가 맞느냐.

그 물음에 장내는 침묵으로 뒤덮였다.

“….”

이진한을 바라보는 수많은 시선에 기대와 희망, 그리고 여러 복잡한 심경이 깃들어 있었다.

잠시간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과 눈을 맞춘 그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의 표시를 뜻했다.

“그래. 내가 《지혜》의 검은 현자다.”

스스로 내뱉기에 낯간지러운 말이었지만, 이제는 제법 적응을 해버렸다.

그 말에 좌중은 기이한 열기에 휩싸인다. 일부는 현시대의 용사가 검은 현자라는 사실에 놀라움을 토해냈고, 일부는 그간 이진한이 세운 업적을 떠 올리며 후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또 일부는 아직 의뭉스러운 표정으로 그의 말을 전부 신용하지 않았다.

용사의 힘이 강대하고 수많은 업적을 세웠다는 건 알고 있지만, 천 년 전의 영웅 그 장본인이라는 건 또 다른 이야기였으니.

“…혹, 적법한 계승자라는 말씀이십니까.”

“아니면 그런 종류도 있지 않습니까. 환생이라든지, 전생의 기억을 깨달았다든지.”

그들은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이진한이 다시 입을 열 찰나, 뒤늦게 회의장 문을 열고 들어온 한 남성이 말해왔다.

“본 왕의 이름과 국가의 명예를 걸고 맹세하오. 천 년 전 영웅의 한 분이셨던 「지혜」의 검은 현자, 그 본인이 맞으시오.”

“…베르하임 국왕?”

베르하임 국왕을 알아본 누군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단순히 일국의 왕 때문이 아니라, 그가 그의 나라 전체가 열렬한 현자의 신봉자임을 다들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블랙 워커의 정점인 그가 말한다면 그 무게가 차원이 달라지는 법.

그것에 동조하듯 이진한의 옆에 있던 성왕 프레이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성왕의 이름과 성국의 명예를 걸고 말씀드릴게요. 베르너 님께서는 여신의 선택을 받은 용사이시자, 검은 현자님이 맞습니다.”

“같은 영웅인 《영원》의 계보를 이은 늙은이도 말을 보태지.”

“미력하나마, 저 역시 휘몰아치는 불꽃의 기사단 부단장의 자리를 걸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의 내막을 알고 있던 이들이 하나둘씩 일어나서 뒤를 바쳐주기 시작했다.

물론 전체에 비하면 소수였지만, 한명 한명이 각지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막대하다고 할 수 있다.

분위기에 휩쓸린 것인지, 아니면 이진한에게 잘 보이려 하는 것인지 안면이 없던 이들 역시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며 자신의 이름과 명예를 걸어왔다.

“….”

이진한은 그 모습이 제법 웃겼으나, 진지한 장내의 분위기를 보아 참고 넘어가도록 했다.

“그런….”

“그렇다면 정말로 검은 현자 님이시란 말인가.”

“천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왔다니. 믿기지 않는군.”

그 상황에 일부는 또 이진한의 정체가 드래곤이나 혹은 그에 준하는 존재가 아닐지에 대한 가능성도 떠 올렸다.

그 가운데 쐐기를 박은 것은 뒤쪽에서 잠자코 있던 엘레오노라였다.

혹시나 자신을 알아보는 이가 있을까 싶어 모자를 푹 눌러 쓴 것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그녀는 묶은 머리를 풀어헤치며 이진한의 옆으로 걸어 나왔다.

“…저는 엘레오노라 폰 오스칼이라 합니다.”

“…!”

상황과 어울리지 않은 소개였긴 했지만, 그녀의 이름이 주는 파급력에 다들 두 눈을 부릅떴다.

황제의 암살과 역모를 꾸미던 악녀로, 한참 전에 제 기사와 함께 붙잡혀 제국 수도에서 처형당했다는 이가 아닌가.

아직 일부를 제외하고는 자세한 내막을 모르기에 엘레오노라는 조심스럽게 이진한의 손을 잡으며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세간에서는 제가 역모를 꾸몄다고 알려져 있겠지만, 사실은 다릅니다. …오히려 역모를 꾸민 건, 물 밑에서 마족과 결탁하고 황실을 집어삼키려 하던 건 다른 이들이었죠.”

“마족과 결탁했단 말이오? 황실이?”

“예외 없이 전부. 제가 그것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쫓기는 신세였죠. 그들과 함께 하는 걸 거부하자 제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려고 하더군요.”

엘레오노라의 말은 오스칼 제국의 숨통을 끊는 말이었다.

수도가 날아가고 유력 귀족이 대부분 죽긴 했지만, 오스칼이란 이름의 힘은 아직 강대했다.

수도를 옮기고 지방 각지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황실의 숨겨진 핏줄이나 야망 있는 귀족이 나타난다면 순식간에 그 세력을 휘어잡았을 터.

그렇기에 저들 역시 그 시간을 벌기 위해 대륙 의회에 제국의 분열을 두고 군침을 흘리던 열강들과의 중재를 요청했지만, 오스칼 제국이 뿌리부터 썩어 있다면 그들의 편을 들 이유가 없어졌다.

“추격을 피해 도망치던 중 제국의 금역이자 성역인 근원의 마탑에 다다르게 되었죠. 거기서 봉인되어 있던 현자님과 만났습니다.”

“…그렇군. 검은 현자는 그 말기 때 오스칼 제국 측과 많은 교류를 했다고 했었지. 비원의 마탑 역시 그것을 기리기 위하여 후대에 계승자들이 세운 것이라 하였고.”

누군가 말을 보태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고대 영웅에 관한 이야기는 정사로 인정받을 정도로 대륙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모르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

물론 그 장본인인 이진한은 잘 모르는 이야기였지만, 눈치껏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고 넘어가고 있었다.

“현자님께서는 어찌 비원의 탑에 봉인되신 상태였습니까?”

“나도 모른다. 단지 눈을 뜨니 그녀들이 앞에 있었고, 그 이후로부터 쭉 함께해온 것이지.”

“그렇습니까.”

분위기가 완전히 넘어왔다.

다들 검은 현자라는 이름이 주는 분위기에 경도되어 눈동자에 기이한 열망을 띠었고, 더러는 자신이 후대에 길이길이 거론될 역사의 한가운데에 있다는 흥분감에 소매 밑으로 두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툭─.

이진한은 돌연 아스칼론을 꺼내 탁자 위에 박아넣었다.

그 갑작스러운 행동에 다들 의아한 눈으로 고개를 들었을 찰나, 이진한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서늘한 눈빛을 내었다.

“일단 대략적인 이야기는 끝났으니, 본제로 들어가기 전에 이쪽에 숨어 있는 끄나풀부터 끄집어내도록 하지.”

“예? 이들 중에 배신자가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프레이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의회 참석자는 자신이 직접 관리했다. 혹여나 있을 내통자를 차단하고, 정보의 누출을 방지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그런데도 배신자가 있단 말인가.

-오른쪽에서 세 번째. 그리고 중앙 뒤쪽의 붉은 옷. 그리고….

성검의 정령으로 완전히 자리 잡은 로네가 담담한 목소리로 끄나풀을 색출해냈다.

대현자의 눈과 용사의 가호로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었지만, 과연 성검이라는 듯 부정한 기운이 섞인 인간을 솎아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닌 듯했다.

쉬이익!

그들이 반응하기도 전에 이진한은 직접 몸을 날렸다.

무고한 이들은 그 기세에 움찔했지만, 뒤이어 프레이가 내뱉는 말에 움직임을 멈췄다.

“자신이 결백하다면 그대로 있으세요! 치료든 보상이든 모두 성국에서 제가 책임지고 해드리겠습니다!”

그만큼 이진한을 믿는다는 이야기였다.

든든한 지원사격에 더는 거리낄 것이 없어진 그는 과감하게 손속을 사용했다.

쿵.

살이 뒤룩뒤룩 찐 대머리의 이마를 붙잡아 바닥에 꽂아 넣고, 로네가 말한 붉은 옷의 기사의 명치에 발을 날렸다.

그렇게 순식간에 제압해낸 것이 모두 일곱.

더 없나 가볍게 주위를 둘러보았을 찰나, 제 발이 저린 배신자 한 명이 문가로 몸을 날리며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촤르륵!

그러자 허공에서 자색 사슬이 튀어나오며 그의 사지를 구속한바. 모두가 그것이 검은 현자의 상징인 주박의 사슬임을 깨닫고는 나지막한 감탄을 토해냈다.

“총 여덟인가. 생각보다 많네.”

“…의회의 인사보단, 그들의 호위나 시종들 가운데 섞어 놓았군요.”

생각지 못한 맹점에 프레이는 면목이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괜찮아. 엄중하게 관리했어도 어떻게든 숨겨 놓았을 테니까.”

지금까지 싸워 온 마계의 족속들은 그러한 존재들이었다.

곧 프레이의 명령을 받은 팔라딘들이 마족과 결탁한 배신자들을 엄중히 결박해 밖으로 끌고 나갔다.

인류를 배신한 그들에게 남겨진 것은 이제 혹독한 고문과 후회뿐. 이진한은 저들을 가리키며 의회의 인사들에게 경고했다.

“난 뒤통수 맞는 걸 제일 싫어한다. 아직 들키지 않은 놈들. 한 번은 관용을 풀어줄 테니 깔끔하게 정리하도록. 이다음에 들키면 이번처럼 깔끔하게 끝내진 않을 테니.”

배신자에게는 혹독한 결과만이 기다린다. 그런 공포감을 심어주어야 다른 생각을 하지 않을 터.

‘이들 중 절반이라도 남으면 다행일 텐데.’

물론 권력과 힘의 맛을 아는 일수록 그러한 타락에 빠지기 쉬운 법이었다.

이 자리에 모인 이들 역시 그러한 것에 가장 가까운 부류인 법. 최대한 믿을 만한 이들을 많이 만들어 주변을 꾸려 놓아야 했다.

“자, 그러면 회의를 시작해볼까.”

숨소리조차 나지 않고 있는 가운데, 이진한은 옅은 미소와 함께 의회를 이끌었다.

***

깊은 밤이었다.

의회는 경직된 분위기로 시작했지만, 이진한이 일방적으로 자신들을 찍어 누르지 않으리라는 걸 깨달은 그들은 여러 관점에서 각자의 의견을 피력했다.

마왕 마르바스가 말한 유예는 한 달.

그 안에 최대한 모든 준비를 끝내고 제국에서 쏟아져 내릴 저들을 막을 준비를 해야 했다.

군대의 파병은 언제 어디로, 물자의 준비는 어느 정도까지, 지휘관은 누구고 작전은 어떻게.

하루아침에 전부 구상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회의는 아마 몇 날 며칠이 이어질 듯했다.

“머리 아프네.”

이진한은 쓴웃음을 지으며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모험을 다니며 몬스터와 싸우고, 그 공략을 정리하는 것까지는 손쉽게 해치울 수 있었다.

하지만 조직을 이끄는 것이나, 전체적인 계획을 수렴하고 체계화하는 건 명백히 능력 밖의 일이었다.

다행인 점은 자신의 곁에 유능한 이들이 많다는 것. 엘레오노라는 이전부터 이리될 것이리라 생각했는지 아주 능숙한 태도로 좌중을 휘어잡으며 조직의 체계를 구체화해나갔다.

일레이나 역시 천재로서의 면모를 마음껏 뽐냈고, 부족한 부분은 프레이가 나서며 보충해주었다.

지금 이렇게 농땡이를 부릴 수 있는 것도 그녀들 덕분이었다.

“…슬슬 들어갈까.”

어디 맛있는 요리를 파는 음식점이라도 없나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주변 구역은 바로 몇 시간 전에 마르바스와의 싸움으로 초토화된 상태였다.

이곳은 그나마 여파를 덜 받았지만, 그렇다고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짧게 한숨을 내쉰 이진한이 의회장으로 가기 위해 몸을 돌릴 찰나, 등 뒤에서 느껴지는 기묘한 파장에 발걸음을 멈춰 섰다.

“….”

대현자가 순식간에 해석을 끝마쳤다.

무작위 공간 이동 마법. 이 세계관에서 공간 이동 마법을 펼칠 수 있는 것은 드래곤을 비롯한 아주 소수의 존재뿐. 하지만 뒤쪽에서 느껴지는 이 기운은 그보다 더 이질적이었다.

“누구지?”

몸을 돌리자 보인 것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던 두 인영이었다.

본래라면 대현자의 눈이 그 안을 단숨에 꿰뚫어 보았을 테지만, 무슨 술수를 부린 것인지 한없이 깊은 어둠이 펼쳐져 있다.

스륵.

이진한의 말에 그들은 머리를 덮고 있던 후드를 내렸다.

앞서 있던 쪽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뒤쪽은 낯익은 얼굴이었기에 그는 두 눈을 부릅뜨며 아스칼론을 뽑아 들었다.

“…에우리스테우스!”

검성과 결탁한 반신의 후예.

원탁의 일원인 그가 어째서 이 자리에 나타났는가.

이진한이 거센 기세를 풍겨 올리자, 그 앞에 있던 괴한이 가볍게 손을 들며 입을 열었다.

“계약을 이행할 때다, 검은 현자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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