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7.
「용살검(龍殺劍」
대(對)드래곤 전에 특화된 무구였다.
벨라시온과의 싸움을 준비할 때도 그랬듯 용살검 자체의 성능은 동 레벨 대의 무기와 비교에 손색이 있었다.
그럼에도 수많은 랭커가 두 눈에 불을 켜고 그것을 구하려고 했던 이유는 「용족에 대한 추가 데미지」. 어지간한 무구보다 훨씬 더 데미지가 잘 들어갔으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마검이나 성검 같은 그보다 더 상위 등급의 무구를 지닌 이라면, 굳이 용살검에 구애될 필요가 없지 않을까.
실제로 드래곤과 맞서 싸운다면 용살검보다 마검이나 성검이 누적시키는 데미지가 더 컸다.
하지만 그럼에도 수많은 랭커가 용살검에 집착한 이유가 무엇이냐.
일반적인 상태라면 상위 등급의 무구를 당해내지 못하지만, 그 앞에 하나의 수식어가 따라붙는다면 이야기는 정반대로 바뀌었다.
「그랜드 소드 마스터」
검의 구도자.
경지를 초월한 존재가 용살검을 쥔다면.
철컥.
“진명 개방.”
파아앗─!
용살검의 황금색 검신이 눈 부신 빛을 토해내며 거센 기운을 휘몰아쳤다.
이것이야말로 수많은 랭커가 용살검에 집착하던 이유, 두꺼운 양날이 떨어져 나가며 영롱한 빛깔을 뿜어내는 새로운 형태의 검이 솟구쳤다.
용족 한정으로 절대적인 상성의 우위를 지닌 용살검의 진정한 모습. 그 종류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이진한 역시 용살검의 진명 해방은 처음이었기에 어떠한 이름이 나올까 바라보다, 이내 그 정체를 파악하곤 피식 웃었다.
“벨라시온에게 감사해야겠군.”
「마룡을 베어 죽이는 검이여, 울부짖어라」
참룡검(斬龍劍) 내글링(Naegling)
제일 처음 싸웠던 것이 마룡이라 불리는 벨라시온이라 그런 것인지, 개방된 진명은 마룡이라 불리는 부류에 특화된 참룡검 내글링이었다.
쉬아아악─!
가볍게 휘둘러진 참격이 마룡의 몸에 둘린 마기를 단숨에 파쇄했다.
마르바스는 곧바로 마기를 일으켜 균열이 난 부분을 보완했지만, 내글링은 참룡검이라는 칭호에 걸맞게 그 균열을 일파만파 퍼트렸다.
-음.
목을 베였음에도 동요치 않았던 마르바스의 입에서 처음으로 짤막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마왕의 권능으로 저 검이 발하는 기운과 레바테인의 마룡이 서로 상극임을 깨달은 것이었다.
타다닷!
이진한은 상대가 주춤하는 틈을 놓치지 않았다.
멀리서 베어낸 참격으로는 부족했는지 단숨에 땅을 박차고 나가 마르바스와의 거리를 좁혔다.
-키에엑!
마룡은 다시 브레스를 토해내기 위해 막대한 마기를 응집했다.
이전보다 더 강대한 기운으로 어찌 손쓸 틈도 없이 그 입 안으로 시커먼 불꽃이 휘몰아쳤다.
하지만 이진한은 피하지 않은 채 오롯이 그것을 향해 질주했을 뿐이었다.
파아앗─!
이 격째의 브레스가 토해져 나왔다.
이번엔 「삼라만상」의 현상 개벽도 없었기에 주변 지형이 그대로 휘말린다. 공간조차 짓뭉개는 강한 왜곡에 도시의 모든 것이 소멸하여갈 찰나, 하늘 높이 들어 올려진 내글링이 지상을 향해 휘둘러졌다.
“울부짖어라.”
─마룡을 베어 죽이는 검이여.
눈부신 황금빛 서기가 선명한 존재감을 나타냈다.
모든 것을 멸할 듯 닥쳐오던 마룡의 브레스도 그것에 가로막혀 더는 나아가지 못했고, 오히려 기세에서 밀려 반으로 갈라져 갔다.
-레바테인이여!
미간을 찌푸린 마르바스 역시 제 검을 높이 든 채 마룡을 독려했다.
하지만 이미 기세는 이진한 쪽으로 건너온 뒤. 다량의 마기가 뿜어져 나와 주변을 뒤덮었지만, 내글링이 발하는 서기에 밀려 흔적도 없이 지워져 버렸다.
쉬아아악!
마룡의 브레스는 끝끝내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그 너머에 있던 이진한은 하늘 높이 뛰어올랐고, 내글링 위로 농밀한 신성의 기운을 더하며 힘껏 그것을 그어 내렸다.
“흡!”
팔뚝과 이마 위로 시퍼런 힘줄이 불쑥 솟아오른다. 이번 일격에 싸움을 끝낼 심산인 듯 그 눈에 서린 불꽃이 세차게 일렁거렸다.
-감히!
마르바스는 일그러진 얼굴로 마룡 위에서 마검을 휘둘렀다.
레바테인을 뽑아 마룡까지 소환했음에도 불구하고 원하는 결과를 가져오지 못해 분노한 듯했다.
하지만 그 위로 떨어져 내린 내글링이 성스러운 가호와 함께 마르바스와 마룡의 몸을 통째로 베어 갈랐다.
촤아악!
반박할 여지 없이 시원하게 반절로 갈라진 마르바스가 두 눈을 부릅뜬다. 화신체라고 하지만, 영혼의 격이 일부 담겨 있어 신성과 참룡의 힘이 서린 지금의 공격에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다.
반으로 갈라진 거대한 마룡의 몸은 순식간에 형태를 잃은 채 가루로 흩어졌고, 그 위에 있던 마르바스의 두 조각 난 몸은 비루한 모습으로 땅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네놈에게 딱 어울리는 모습이군.”
-…네놈.
몸 끝에서부터 재가 되어 사라져가는 마르바스가 부릅뜬 눈으로 이진한을 바라보았다.
그와 동시에 레바테인이 파각 소리를 내며 부러졌고, 곧 수백 조각의 파편이 되어버렸다.
“검까지 잃어서 어떻게 해? 필요하면 하나 줄까?”
이진한은 히죽 웃으며 자신의 인벤토리를 열어보았다.
그 안에는 주로 쓰는 무구 이외에도 예비용으로 구비 해둔 것들이 한가득했다.
원한다면 하나 정도 줄 수 있다며 말했지만, 마르바스는 더없이 싸늘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좋다. 나 역시 진지하게 임하도록 하지.
스러져 가는 육신 가운데, 파멸의 마왕은 세상천지에 들릴 정도의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로 한 달 뒤, 마계의 군세가 진군할 것이다! 마왕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나니 엎드려 절하는 이는 모든 것을 얻을 것이고, 맞서 싸우는 자는 모든 것을 잃을 것이다!
마르바스의 몸은 전부 소멸해 이제 얼굴의 하관 부분밖에 남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맹렬한 기세를 떨치며 말을 이었다.
-중간계의 수호자여, 어리석은 여신의 선택을 받은 용사여, 또 우리의 발걸음을 막고자 하는 모든 이들이여, 어리석은 그대들에게 단 한 번의 기회를 주겠노라!
마왕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맺혔다.
과연 네가 거절할 수 있겠냐는 듯한 모습이었다.
-사람을, 이 세상을 지키고 싶다면 제국으로 오너라! 우리가 사방으로 뻗쳐나가기 전에 그곳에서 자웅을 겨루자!
“지랄.”
이진한은 내글링을 들어 마르바스의 남아 있는 얼굴을 내리찍었다.
그러자 신성의 불꽃이 그 살점을 불태웠고, 이내 흔적도 없이 소멸하고 말았다.
메아리친 목소리 역시 이리저리 퍼져나가다 파도를 맞은 모래성처럼 스러진다. 이진한이 가볍게 침을 내뱉은 뒤 내글링을 들어 올리자 진명 개방의 리미트가 끝났는지 다시 용살검의 형태로 되돌아왔다.
“흠.”
몸에 쌓인 부담이 적지 않았다.
마룡의 브레스를 직격으로 받아냈으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바꿔 말하자면 그것을 제외하고는 밀린 일이 없다는 소리였다.
그마저도 도시를 지키기 위해 억지로 막아선 것이었으니 아무런 제약이 없는 상황에서의 싸움이었더라면 좀 더 우위를 가져올 수 있었을 터.
‘해볼 만한가.’
마르바스 역시 화신체를 이용해 격의 일부만 강림시킨 상태였지만, 자신도 전력을 꺼내지 않은 것은 같았다.
용살검의 진명 개방 하나로 끝낸 것이 오히려 싸게 먹힌 것일 정도. 마왕이나 검성을 상대하기 위해 준비한 비책을 거의 소모하지 않았다.
“베르너 님!”
짓뭉개진 잔해들을 넘어 프레이가 달려왔다.
그 주위로 상처투성이의 엘레오노라나 다른 일행이 함께하는 것을 보니, 그녀들 역시 각자 거친 전투를 거친 듯했다.
“다들 괜찮아?”
“네? 아, 괜찮아요. 살짝 긁힌 정도에요.”
“맞습니다. 대부분 적의 피입니다.”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이 고개를 끄덕이자, 함께 온 프레이가 깜빡했다는 듯 그녀들에게 치유의 신성을 내렸다.
“이곳 말고도 다른 구역에 이교도들이 암약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준 덕분에 큰 피해 없이 막을 수 있었죠.”
“그런가.”
“정말로 큰 활약이에요. 당장 의회의 의원들에게 엎드려 절을 받아도 당연할 정도로.”
프레이는 고개를 돌려 이제 막 정신을 차리고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한 이들을 바라보았다.
각 왕국과 유력 조직의 대표로 의회 때는 그렇게 꺼드럭거리고 유세를 부렸으면서 막상 일이 터지자 일말의 도움도 되지 못했다.
“그래도 저들 나름대로 역할은 있으니까.”
“그래요. 사상자가 적어서 망정이지. 저런 이들이라도 없으면 의회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테니까요.”
그때 프레이의 뒤로 두 인영이 다가왔다.
둘 다 마르바스에게 큰 상처를 입고 패퇴한 휘몰아치는 불꽃의 부기사단장인 헨더슨과 이터널 학파의 장인 호베르트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정정하셨는지요.”
그 짧은 사이 적지 않게 회복했는지 안색이 되돌아온 상태였다.
“대단하십니다. 마왕을 상대로 그런 신위라니.”
“설마 마룡까지 부릴 줄은. 아니, 마왕이기에 당연한 일인 것인가. …그건 그렇고 아까 이 영역을 뒤덮은 마법은 분명 「삼라만상」의 영역개변이 아니었습니까? 사실 제가 요즘 그 직전 부분에 가로막혀서….”
헨더슨은 존경 어린 시선을, 호베르투는 아직 자신이 밟지 못한 미지의 경지에 대한 지식에 대한 궁금증을 표출해왔다.
“잠깐만요. 그런 시시콜콜한 질문들은 나중에 하라고요. 마왕과 싸운 직후라 피곤하실 텐데.”
“음.”
프레이의 말에 다들 깜빡했다는 듯 움찔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진한은 쓴웃음을 지은 채 가볍게 손을 흔들며 저 너머에 있던 이들을 가리켰다.
“아니, 괜찮아. 아직 여력은 충분하니 사람들을 모아줘.”
“…마왕이 했던 말 때문에 그러시는 건가요?”
“그래. 유예 기간을 한 달밖에 주지 않았으니 서둘러야겠지.”
보편적으로 한 달이면 긴 시간이라 할 수 있지만, 전쟁 같은 대단위 전투를 준비하기에는 사뭇 촉박한 일정이었다.
더군다나 동대륙 쪽은 무너져가는 오스칼 제국을 집어삼키기 위해 여러 열강이 서로 반목하고 있는 상황.
그들에게까지 손을 쓰려면 그리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었다.
이진한의 말에 따라 의회는 다시 개최되었다.
원래 있었던 건물은 마르바스의 공격에 흔적도 없이 무너진 터라, 이와 반대 구역에서 그나마 멀쩡히 남은 건물을 사용했다.
“마왕의 등장과 동시에 이교도로 보이는 이들이 수도 곳곳에서 소란을 일으켰습니다. 마물까지 소환한 탓에 적지 않은 피해가 생길 뻔했지만, 용사님의 동료분들께서 적극적으로 나서주신 덕분에 최소한의 여파로 진압할 수 있었죠.”
용사의 후광을 등에 업은 프레이는 적극적으로 입을 열었다.
평소에도 마계의 대척점이라는 신성 교단의 이름과 용사와의 관계성 덕분에 의회에서 상당한 비중을 지니고 있었지만, 방금 그 소란을 겪은 직후다.
이진한을 바라보는 모두의 시선에 희망과 기대, 그리고 존경의 기색이 한가득 깃들어 있었으니 이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참으로 복된 일이오. 용사님뿐만 아니라 그 동료분들께서 이리 걸출하시다니.”
호베르투 마탑주가 흐뭇한 얼굴로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중 한 명은 자신의 후계자이긴 했으나, 그것이 어떠한가. 좋은 게 좋은 것이니 슬쩍 그 위세에 편승했다.
“저, 근데 싸움 도중 한 가지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런 가운데 어느 왕국의 백작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올리며 자신의 궁금증을 피력했다.
“용사님께서 천 년 전 고대 영웅인 「지혜」의 검은 현자라는 것이 사실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