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6.
-흠.
마르바스의 목이 바닥에 떨어졌다.
얼굴에 흙이 묻어 더러워졌지만, 그는 개의치 않은 채 이진한을 올려다보았다.
마치 신기한 생물이라도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적지 않은 용사를 봐왔지만, 자네 같은 이는 처음 보는군. 그 짧은 시간에 이렇게 달라졌다고?
그가 처음 이진한을 포착한 것은 아이돈이 준비한 계획에서 비롯되었다.
도시 하나쯤은 가볍게 멸망시킬 전력이었지만, 어째서인지 도리어 자신의 수하가 당해버렸다.
신성에 당해 소멸해가며 살려달라 울부짖는 아이돈의 영혼을 잡아먹은 뒤 그 몸을 제물 삼아 영혼의 일부를 강림시켰다.
어떤 녀석이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는 것일까.
인간 축에서도 제법 강자로 취급받던 아이돈을 쓰러뜨릴 정도니 새로운 장난감으로 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녀석이 발한 선명한 신성의 빛은 분명 과거로부터 숱하게 맞서 싸워온 대적자의 것이었다.
-조금 무리하더라도 그때 죽일 걸 그랬나.
용사가 등장하는 건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아이돈을 꺾었으나, 자신과 비교하자면 아직 햇병아리 수준. 영혼의 일부를 강림시킨 것으로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예상외의 저항에 맞부딪쳤고, 그것에 대응하지 않은 채 잠시 관망하는 것을 선택했다.
용사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자신에게, 72 마왕에게 맞서 싸우는 건 불가능했으니.
“듣지 못했나 보네. 검성이랑 사이가 별론가 봐?”
-무엇을?
“그리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 네가 지는 건 당연하니까. 나는 용사이기 이전에….”
촤아악.
거센 바람에 이진한의 로브가 흩날린다. 그는 아스칼론과 함께 「블랙 다이아몬드」를 꺼내 들며 씩 웃었다.
“「지혜」의 검은 현자다.”
-…!
마르바스의 두 눈이 크게 뜨였을 때 허공에서 솟구친 주박의 사슬이 그의 사지를 구속했다.
항마의 마력을 띤 보랏빛 사슬은 검은 현자의 고유 마법.
그를 동경하는 블랙 워크들이 숱한 아종을 만들어냈지만, 진짜는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꽈아악.
마르바스는 살갗을 파고드는 사슬에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고대 영웅. 설마 지금까지 살아 있었다고?
마왕의 권능 앞에선 거짓이 소용없다.
하지만 권능에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아 저 사내가 내뱉은 말은 사실임이 틀림없어 보였다.
“그래. 왜 봉인되어서 천 년이란 세월을 건너뛰었나 싶었는데, 다 네놈들 틀어막으라고 그랬던 것 같다.”
주박의 사슬을 타고 신성한 불꽃이 번져나간다. 살점이 타들어 가고 마기가 정화되며 소멸했지만, 마르바스는 태연한 얼굴로 손을 뻗어 자신의 머리를 집어 들었다.
-과연. 그저 용사로는 불가능한 신위다. 하지만 고대 영웅이라면 그 행적이 이해되는군.
고대 악신의 존재는 감히 마왕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대항하기 힘든 것.
하지만 영웅이라 불린 이들은 인간의 육신으로 그것과 싸워 종래엔 봉인하는 데 성공했다.
거기에 용사의 운명까지 획득했으니 지금 저 전신에 흐르는 예사롭지 않은 기세는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베르.”
삐익.
거친 싸움이 일어날 것을 예상한 이진한이 짤막하게 읊조리자 그 후드에 숨어 있던 까망베르가 날아올라 뒤쪽에 있던 프레이의 어깨 위로 안착했다.
“다 물러나. 죽기 싫으면.”
“…알았어요.”
성왕, 대마도사, 그랜드 소드 마스터.
설사 초월지경의 강자라 할지라도 둘의 싸움에 끼어들 수 없었다.
고개를 끄덕인 프레이는 곧바로 주위에 지시를 내렸고, 의회의 인사와 그 호위를 있던 기사들은 순식간에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일단 가볍게 시작하자.”
콰르릉─!
블랙 다이아몬드가 들어 올려지자 시커멓게 물든 하늘로부터 「영원의 번개」가 떨어져 내렸다.
사용자의 마나가 지속되는 한 지속적인 피해를 주는 번개는 신성의 불꽃에 타들어 가는 마르바스의 육신을 한 번 더 지져버렸다.
-….
아무리 그래도 타격이 없는 것은 아닌지 그의 몸이 비틀거렸다.
이진한은 아스칼론의 끝을 까딱이며 조소가 어린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
“현현은 아직인가 봐. 아직도 화신체를 가지고 노는 것을 보니.”
-우매한 필멸자 주제에 현현을 논하는가.
“천 년 넘게 살아있으면 필멸자 범주에서 좀 빼줘도 되는 거 아니야?”
-재미있는 소리군.
마르바스는 피식 웃었다.
비록 일부의 격을 옮겨온 화신체라 할지라도 성왕을 비롯해 여러 강자를 처리하기에는 충분한 힘이었다.
고작 인간 주제에 혼자의 몸으로 이 정도의 힘을 낼 수 있는 그가 이상한 것이었지만, 마르바스는 흔쾌히 그 도발에 응해주기로 했다.
-좋다. 본격적인 전쟁의 시작을 기념하는 여흥으로는 더 없이 어울리겠지. 오늘 이 도시는 네놈의 그 방정맞은 언사 때문에 흔적도 없이 소멸할 것이다.
“누가 그렇게 둔다고 했나?”
-힘껏 발버둥쳐보도록
쿠우웅─!
잘려 나간 머리를 다시 붙인 마르바스의 전신으로 이제껏 볼 수 없었던 농밀한 마기가 뿜어져 나왔다.
비옥했던 대지는 순식간에 죽음의 땅이 되었고 공기는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로 무거워졌으며 주위를 뒤덮은 색채가 바래졌다고 느낄 정도로 순식간에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고작 일부의 격일 뿐인데도 이런가.’
이진한은 옅게 숨을 내쉬며 아스칼론과 블랙 다이아몬드를 다잡았다.
미들턴에서 싸웠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수준이다. 제자의 몸에 빙의해 검을 휘둘러오던 검성 때와 비슷한 수준의 압박감이 자신을 찍어 눌러왔다.
-받아보아라.
“…지금!”
사정없이 풀려난 마르바스의 마기가 폭풍처럼 휘몰아칠 찰나, 이진한은 아스칼론을 놓고는 그라다다를 뽑아 들었다.
고대 신의 잔재를 힘껏 흡수한 바포메트의 격은 단순히 따지자면 마왕에 근접할 정도로 치솟아 올랐다.
그렇기에 주변을 잠식해나가는 마르바스의 마기를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며 이진한이 블랙 다이아몬드를 통해 만들어낸 술식에 에너지를 공급했다.
「삼라만상」·사상개변(思想改變)
《영원》의 오리지널 마법 중 가장 높은 위계에 속한 것으로, 도원경에서 대마도사의 숙련도를 대폭 끌어올린 뒤에야 겨우 사용할 수 있게 된 마법이었다.
기기긱─.
마르바스의 마기를 원료삼아 활성화된 술식이 잿빛의 장막으로 변하며 주위를 잠식해나갔다.
마르바스는 그것마저도 힘으로 찍어누르고자 파멸의 빛을 모았고, 이내 그 강렬함이 절정에 달했을 때 허공을 격하며 날카롭게 쏘아졌다.
-…음.
하지만 그 직후 마르바스는 신음을 토해낼 수밖에 없었다.
분명 앞을 향해 쏘아냈거늘 그 궤적이 기묘하게 뒤틀리며 자신에게로 닥쳐왔다.
황급히 앞을 가로막는 마기의 장벽을 펼쳤지만, 응축된 파멸의 빛은 그것을 가볍게 꿰뚫고는 마르바스의 왼쪽 어깨를 찢어발겼다.
-방향을 굴절시켰나? 아니, 물리법칙 자체를 뒤바꾼 것인가. 신기한 술수를 쓰는군.
마왕의 권능으로도 해석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그렇기에 마르바스가 호기심을 표하자, 이진한은 옅은 숨을 토해내며 그라나다를 움켜쥐었다.
“《영원》의 마법이다. 이제 네 공격은 내게 도달하지 못해.”
-개변 또한 하나의 법칙인 법. 더 강한 힘으로 뒤틀면 그만이다.
“누가 그럴 틈을 줄 것 같아!”
땅을 박찬 이진한이 한 줄기 빛이 되어 날카롭게 검을 찍어눌렀다.
두 손으로 다잡은 그라나다가 미칠 듯한 마기를 내뿜으며 그 위용을 자랑한다. 그 모습을 본 마르바스는 한쪽 눈을 꿈틀거리며 순식간에 왼팔을 재생시키더니 손안에 마기를 그러모아 검의 형태를 이루었다.
-장점이라곤 오래 산 것밖에 없는 비루한 악마 주제에 본질을 잊고 날뛰는가. 용사와 계약한 것도 우스운 꼴인데, 감히 마왕의 자리까지 넘보다니.
“마왕 마르바스보다 마왕 바포메트가 더 어울리는 이름 같은데 말이지.”
콰아앙─!
평온한 대화와는 달리 마검과 마검의 대결은 서로 거셌다.
이진한은 마르바스와 맞서 싸우던 중 그의 손에 들린 검을 바라보았다.
얼핏 보면 단순히 마기를 검의 형태로 굳힌 것 같았지만, 그건 분명 실체가 있는 검이었다.
「마검 레바테인」
“…!”
대현자의 눈이 어렵사리 그 이름을 간파해냈다.
레바테인이라면 ‘월드’에서도 있었던 아이템으로, 마검 중 최상위에 꼽히는 이름이었다.
단순 위력으로는 비교할 무구가 없었으며, 그 안에 봉인된 특성은 분명….
-보아하니 이 검이 무엇인지 눈치챘나 보군. 근 몇백 년간 세상에 모습이 드러난 적이 없는 검인데, 과연 고대 영웅인가.
마르바스는 씩 웃으며 레바테인을 휘둘렀다.
-울부짖어라, 세기말의 마룡이여.
레바테인의 마기가 폭발적으로 솟구쳤다.
그라나다로 먹어치운다고 할지라도 쉬이 감당할 수 없는 것으로, 이진한은 황급히 뒤로 물러나며 그 범위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늦었다.
레바테인에서 형상화된 마룡이 집채만 한 몸을 일으킨다. 지금 당장은 마르바스보다 더 강한 기운을 내뿜으며 서슬 퍼런 살기를 내뿜었다.
구오오─.
“이런 씹…!”
마룡의 입으로 시커먼 불꽃이 휘몰아쳤다.
진짜 드래곤이 내뿜는 것에 뒤지지 않는 위력의 브레스가 순식간에 모여들며 눈앞의 모든 것을 멸할 준비를 마쳤다.
툭.
그라나다와 블랙 다이아몬드를 놓은 이진한은 아스칼론을 쥔 채 온몸에 신성을 둘렀다.
대천사의 가호가 날개처럼 펼쳐져 주위를 감쌌고, 용사 클래스의 스킬인 「신성의 증명」이 사상개변의 영역을 강화했다.
파아아앗─!
마룡의 브레스가 내뿜어졌다.
일순간 세상에 균열이 일어난 것만 같은 강력한 여파가 터져 나오며 사상개변의 영역 자체를 뒤흔들었다.
잿빛으로 물든 세상은 순식간에 균열이 생기며 깨져나갔고, 그 후폭풍은 오로지 이진한 한 명에게로 고정되었다.
“…크윽.”
최대한 자신이 모두 감당하도록 조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엄청난 위력에 도시 주변이 순식간에 무너져갔다.
강한 지진이라도 휩쓴 듯 건물은 처참히 부서졌고, 사람의 손이 닿은 거리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다행인 점이라면 다른 이들이 잘 처리했는지 휘말린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았던 브레스가 끝나자 이진한은 새빨간 피를 토해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스칼론은 멀쩡했지만, 그것을 쥔 손과 팔은 처참하게 쓸려버려 뼈가 튀어나왔을 정도였다.
얼굴은 반이 짓뭉개졌고, 입고 있던 의복은 걸레짝이 되어 제 기능을 전부 상실했다.
짝. 짝.
마룡의 뒤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마르바스는 손뼉을 쳤다.
-과연 용사라는 것인가. 충분히 피할 수 있었음에도 굳건히 선체 브레스를 막아내다니.
마룡을 소환하는 것으로 현 상황에서 마르바스가 사용할 수 있는 가장 위력적인 수단이었다.
물론 그 때문에 제힘을 대부분 소모했지만, 용사를 쓰러뜨릴 수 있으니 그것으로 충분했다.
“…씨팔, 더럽게 아프네.”
용사 클래스의 「불굴」이 순식간에 상처를 재생시키며 투지를 북돋는다. 이진한은 다시 한번 각혈해내는 것으로 입을 닦아내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더 싸울 텐가. 성검도 그 힘이 다한 듯 보이던데.
“…그러게.”
이진한은 손에 쥔 아스칼론을 내려다보았다.
천 년 동안 신성한 호수에서 축적된 신성력의 양은 많았지만, 성검 자체가 각성하지 않는 이상 한 번에 끌어다 사용할 수 있는 힘은 한정되어 있었다.
더군다나 직전까지 자신을 보조해주던 로네가 브레스를 막기 위해 노력하던 중 연결이 끊겼다.
아마 회로에 과부하가 와서 의식을 잃은 것일 터.
여기서부터는 혼자서 해결해야 했다.
-성검은 빛을 잃었고, 악마가 내준 마검은 마룡에 비하면 한참이나 부족하구나. 어찌할테냐. 이번에도 그 잘난 《영원》의 마법으로 싸울테냐.
마르바스는 승기를 잡았다고 확신했는지 팔짱을 낀 채 여유롭게 조소를 흘렸다.
“…그래. 어디 마수라도 소환한 거라면 정말로 벅찼겠지만, 다행히도 상대가 마룡이라서 말이야.”
-다행이라고?
“어. 내 업적 중 하나를 잊어버린 모양인데.”
스릉─.
마경에서 벨라시온의 목을 베어냈던 「용살검(龍殺劍)이 그 황금빛 검신을 반짝이며 정말 오랜만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마룡도 용이잖아? 그러면 나도 꿇리진 않거든.”
이 익숙한 용살검의 감촉.
잠시간, 드래곤 슬레이어로 돌아갈 때가 도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