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5.
“그게 무슨….”
자신이 아직 이 세상을 가짜라고, 게임이라고 여기고 있다는 소리인가.
이진한이 이해되질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갤 들자, 그는 피식 웃으며 뺨을 툭툭 두드려왔다.
“잊지 말아라. 우리는 네 심층 의식에서 파생된 존재들이다. 다른 이들은 모르겠지만, 우리에게 거짓말은 통하지 않아.”
찌익.
손등 뒤를 가볍게 긋자 시뻘건 선이 생기며 피가 주룩 흘러나왔다.
“다치면 정말로 상처를 입고, 정도를 넘어가면 죽음에 이르지. 원한다고 해서 무를 수도 없는 법칙이다. 죽은 자는 다시 살아나지도 못해. 너와같이 특별한 무언가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야.”
“…나는.”
이진한은 대답을 망설였다.
이 세계를 진짜라고 받아들였다고 생각했건만, 그 일면에는 아직 게임을 하고 있다는 감각이 남아 있던 것일까.
“검을 들고 진지하게 임해라. 마족이든, 인간이든 각자의 생사를 걸고 치열한 모습으로 제 삶에 임하고 있다. 지금의 네놈은 그저 강한 힘을 쥔 아이와 같아. 벽을 뛰어넘으려면 너 또한 진심이 돼야 할 것이다.”
“….”
늘어졌던 정신에 때려 박히는 말이었다.
이진한은 바닥에 내팽개쳐 놓았던 템페스트를 쥐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삼 손안에서 느껴지는 그 묵직한 감촉이 낯설다. 능력치상으로는 아무런 제약 없이 템페스트를 쥘 수 있었지만, 그가 말한 진심이라는 것에 매몰되어 의식이 흔들린 것이었다.
템페스트에 깃든 실피드는 함께 도원경으로 건너오지 못했기에 침묵하고 있는 상태, 슬쩍 손을 들어 그 검날을 매만지자 서늘한 느낌과 함께 살이 갈라지며 핏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쉬아아악─!
귓가를 스치는 날카로운 파공성에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살기가 향하는 궤적은 자신의 목. 죽음의 위기 앞에서 다시금 모든 감각이 활짝 열리며 개방되었다.
그랜드 소드 마스터가 기습적으로 내지른 그 검은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깊이로 이진한의 목을 파고들었을 때 멈춰 세워졌다.
“갑자기 무슨 짓이야.”
템페스트를 수직으로 세워 공격을 막아낸 이진한이 가늘어진 눈으로 물었다.
그는 이제야 마음에 들었다는 듯 옅게 웃음을 토해내고는 턱짓으로 그 모습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지금 네 움직임. 이전과는 확실히 결이 다르군.”
“….”
“그 감각을 끊임없이 되새겨라. 네가 진심이 된 순간을.”
서걱─.
살이 갈라지는 섬뜩한 감촉과 함께 시야가 붕 떠 올랐다.
“미친 새끼.”
그렇다고 목을 자르는가.
이진한은 자신을 바라보며 히죽 웃고 있는 그를 바라보며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욕지거리를 토해냈다.
잘려나간 목은 순식간에 복구되었다.
동시에 찰나 동안 이어지던 꿀맛 같던 휴식 시간도 끝이 났다.
“흡!”
잠자코 이쪽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다른 클래스의 분신들이 일시에 닥쳐왔다.
이진한은 이때와 같이 여러 클래스의 스킬로 그들을 상대하려 했지만, 잠깐 움직임을 멈추더니 오로지 검을 쥔 채로만 싸움에 임했다.
쳐내고, 흘려내고, 빗겨내고, 살을 내주고.
눈 깜짝할 사이에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사지가 갈려 나가고, 눈 깜짝할 사이에 원상 복구되어 숨 쉴 틈도 주지 않는 미친 싸움의 연속.
이전보다 더 거세진 공격의 강도에 머릿속으로 이어지던 계산에 과부하가 걸렸다.
본능적인 영역에 이르러 이제까지 싸워온 경험과 감각을 토대로만 움직임이 흘러갔다.
제대로 느끼지 못했던 ‘상처’들이 곳곳에서 피를 흘리며 몸이 식어가는 것이 생생히 느껴졌다.
그 감각을 끊임없이 되새겨라.
되지도 않는 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초점을 집중했다.
그러자 휘두르는 검이 구부러지며 시야가 왜곡되었다.
또다시 몸의 한계가 온 것인가 생각이 들었지만, 그런 것치고는 움직임에 멈춤이 없었다.
이제는 내가 검을 휘두르는 것인지, 검이 나를 휘두르는 것인지 구별도 되지 않는 가운데 왜곡되어가던 시야가 새카맣게 물들었다.
눈앞에 있던 적들은 사고의 영향 아래도 들어오지 않는다. 그저 새카만 벽이 자신의 눈앞에 새로이 나타나 가로막는 광경이 펼쳐졌을 뿐이었다.
턱.
조심스럽게 그 위에 손을 얹자 단단한 감촉이 느껴졌다.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걸 부서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의 자신에게는 템페스트도, 그라나다도, 아스칼론도, 용아청성창도 없다.
마법을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조금의 마력조차 모이지 않았다.
꽈아악.
그러거나 말거나 이진한은 오른손을 움켜쥐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던가.
콰앙!
허리를 비틀고 어깨에 힘을 실어 힘껏 주먹을 내질렀다.
살갗이 찢어지고 근육이 파열된다. 피가 뚝뚝 흘러내리며 금이 간 뼈가 덜덜거리며 뼛조각을 떨어뜨렸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멀쩡한 왼 주먹으로 다시 어둠을 힘껏 가격했다.
단단하게만 느껴지던 어둠 위로 미세한 균열이 일었다.
그것이 할 수 있다는 맹목적인 집착을 일으켰다.
두 주먹이 더는 휘두를 수 없을 정도로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어둠을 가격한다. 그것도 모자라 두 발도 사용했고, 곧 사지 전부가 형태를 잃고 고깃덩어리라 부르는 것이 더 어울릴 정도로 심하게 뭉개졌다.
무인(武人)이 깨달음을 얻어 벽을 넘기 위해 발버둥 치는 모습이라기엔 너무나도 추한 광경이었다.
바닥에 쓰러져 있던 이진한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무슨 상황인지는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지만, 겨우 잡은 기회를 놓칠 생각은 없었다.
여기서 죽더라도 한계를 뛰어넘으리라.
그렇기에 핏발 선 눈으로 어둠을 짚어가며 몸을 일으켰다.
수십, 수백 번이 이어진 가격으로 인해 어둠의 한 부분이 움푹 들어가 있었다.
그 주위로 거미줄같이 자글자글한 균열이 퍼져 있는 가운데, 그는 숨을 헐떡이며 자세를 취했다.
턱.
손가락이 전부 사라진 손이 어둠 위를 단단히 잡는다. 고통에 덜덜 떨리는 다리는 줄줄 피를 흘리며 땅에 고정되었고 허벅지 위로 굵은 핏줄이 치솟아 올랐다.
“흡─.”
두 주먹과 두 발은 너무 심하게 뭉개져 휘두르는 것조차 불가능했지만, 아직 힘을 실을 수 있는 곳은 한 군데 남아 있었다.
힘껏 당겨진 머리가 마치 포탄처럼 앞을 향해 쏘아졌다.
마지막이라 생각해 혼신의 사력을 다한 일격.
이진한의 이마가 어둠의 틈을 향해 쇄도했다.
쿵!
검은 파편이 잔뜩 튀어 올랐다.
뇌리에서 느껴지는 충격은 그가 버틸 수 있는 한계를 뛰어넘은바. 혼미해지는 정신에 몸을 비틀거리며 뒤로 넘어갈 찰나, 흐려진 시야 속에서 어둠 위로 균열이 퍼지며 그 두꺼웠던 벽이 갈라지는 것이 보였다.
“…으아아아!!”
비명인지 기합인지 모를 절규를 내뱉어내며 그는 뒤로 넘어가던 몸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겨우 사람 한 명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생겨난 틈으로 몸을 비집었고, 어둠을 넘었다.
의식이 각성한다.
어둠에 감싸인 풍경이 무너져내리며 다시 현실을 되찾았고, 더 없이 날 서린 감각 속에서 자신을 향해 닥쳐드는 적들이 보였다.
“…잘했다.”
그랜드 소드 마스터가 히죽 웃었다.
이진한은 귀기 어린 표정으로 템페스트를 다잡았고, 이제껏 어느 때보다 더 완벽한 궤적을 구사하며 검을 휘둘렀다.
서걱─!
자신을 닮은 머리가 잘려나가며 허공으로 솟구쳤다.
“…!”
단지 일 검, 고작 한 번의 휘두름이었거늘 전신의 기력과 마나, 모든 힘이 소진되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기에 더는 움직일 수 없게 되어 바닥에 주저앉아 쏟아질 공격을 각오했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느껴지는 고통이 없었다.
“…낯선 느낌이야. 잘도 이런 걸 몇 번이나 반복했군.”
그랜드 소드 마스터는 인상을 찌푸리며 제 목을 쓰다듬었다.
이진한이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자, 그는 손가락을 내밀어 이마를 툭 치는 것으로 짙은 미소를 지었다.
“축하한다. 이제야 그 덜떨어진 모습에서 탈피하고 제대로 된 준비를 끝낸 듯싶군.”
[그랜드 소드 마스터 클래스에 전직하셨습니다.]
[초월지경에 이르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대현자나 대마도사, 그리고 용사에 이르렀을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의 담담한 축하였다.
“하.”
하지만 바닥에 엎어진 이진한은 더없이 기쁜 표정을 지었다.
머리는 깨질 것 같고 멀쩡한 손발은 욱신거렸으며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호흡이 가빴지만, 막혀 있던 속이 뻥 뚫린 것처럼 전신을 뒤덮는 청량감에 취해버릴 것만 같았다.
“아 진짜 두 번은 못 하겠네.”
바닥에 대자로 누우며 기나긴 한숨을 내쉬었다.
“두 번은 못 하겠다니, 말하지 않았느냐. 이제 겨우 준비가 끝났을 뿐이라고.”
그랜드 소드 마스터는 씩 웃으며 등 뒤를 가리켰다.
그러자 다른 클래스의 자신들이 마찬가지로 조소를 지어오며 이쪽을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이런 씹….”
이진한의 얼굴이 잔뜩 구겨졌다.
고작 하나 넘는 것으로 이토록 개고생했는데 수십 번이나 더 남았다니.
“휴식은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어서 일어나거라, 꼬챙이가 되기 싫다면.”
***
도원경에서의 일주일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모든 클래스가 초월지경에 도달한 것은 아니었다.
특정 클래스는 초월지경이라는 경지 자체가 없었기에 어쩔 수 없는 문제. 하지만 그것을 제외하고는 전부 벽을 넘어서는 기염을 토해내었다.
“아슬아슬했군. 이제 1분도 채 남지 않았네.”
“아슬아슬하긴. 여유로웠는데.”
대현자와 마주한 이진한은 씩 웃어 보였다.
“그래서 이다음은 이제 뭐가 있지? 도달할 수 있는 경지는 모두 이룩한 것 같은데.”
대현자는 이전부터 모든 클래스의 초월지경에 도달하면 그 너머에도 무언가 있다는 것을 여러 번 암시했다.
그것에 관해 묻자 대현자는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내가 말하는 게 의미가 있나 싶군.”
“뭐?”
“그런 건 자네가 찾아내는 게 더 의미 있지 않겠나. 자신의 힘으로 초월지경에 오른 것처럼.”
“아니, 그러지 말고….”
“그리고, 누누이 말하지 않았는가. 우리는 자네 자신이라고. 내가 알고 있다는 건 자네 또한 알고 있다는 것일세. 그리 조급해하지 말도록.”
“힌트라도 조금 줘.”
“…그래. 굳이 말하자면.”
대현자의 입이 뻐끔거린다. 무언가 말하는 듯했지만, 시야가 일그러지며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도원경의 유지 시간이 끝난 것이었다.
점차 사라지는 풍경들에 이진한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별로 좋아하는 연출은 아닌데.”
툭.
정신을 차리자 도원경으로 통하는 아치문 밖으로 내뱉어진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혹시 몰라 그 안쪽으로 손을 내밀자 딱딱한 벽이 만져진다. 이전처럼 아무런 메시지도 떠오르지 않는 것을 보니 정말로 그 기능이 끝난 것 같았다.
“….”
시원섭섭한 느낌이 들었다.
워낙 시간이 촉박하여 제대로 된 인사도 하지 못했거늘.
언젠가 그들과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원하는 것을 끝으로 몸을 돌리자, 그 밖에서 조급한 얼굴로 서성거리고 있던 베르하임 국왕을 볼 수 있었다.
“왜 그래?”
“베르너 님!”
그의 등장에 국왕은 화색을 띠며 다급히 다가왔다.
“안쪽의 일은 잘 끝나셨습니까!”
“그래. 덕분에 잘 마무리했다.”
이진한은 씩 웃으며 보란 듯이 제 팔을 들어 올렸다.
수많은 한계를 깨부수고 수많은 벽을 넘어섰다.
이 정도면 그래도 검성이나 마왕과 자웅을 겨뤄볼 만하지 않을까.
“…그런데 무슨 일이라도 있어? 얼굴이 초조해 보였는데.”
“아.”
베르하임 국왕은 깜빡했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뜨고 속사포처럼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방금 들어온 소식입니다. 리베라 제국의 수도인 폴포아르텔에 강력한 힘을 지닌 마족이 습격을 가했다고 합니다. 일각에서는 마왕이라는 이야기도 있으니….”
“수도에?”
“예. 그리고 지금 그곳에는 대륙 의회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성왕을 비롯해 주요 인사들이 다수 포진해 있는 상황이라 비상이 걸린 듯합니다.”
“…그녀들은?”
“이미 출발하셨습니다. 베르너 님이 나오실 때까지 시간을 벌어보겠다며.”
“가지.”
이진한은 곧바로 텔레포트 게이트를 통해 폴포아르텔로 이동했다.
그와 동시에 하늘을 뒤덮은 어둠을 봄과 동시에 수도의 중심에서 느껴지는 막대한 마기를 느낄 수 있었다.
쿵!
베르하임 국왕이 뭐라고 할 새도 없이 땅을 박찬 그의 몸이 하늘 위로 솟구쳤다.
이내 어느 건물 앞에서 대치 중인 그들을 발견했고, 검을 들어 자신의 가슴을 찔러가는 프레이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탁!
순식간에 그녀의 곁으로 떨어져 내린 이진한은 검을 빼앗아 들고는 바닥에 내팽개쳤다.
-자네는 언제나 예상치 못한 때에 나를 방해하는군.
마왕 마르바스가 어깨를 으쓱이며 아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스릉.
천천히 아스칼론을 뽑아 든 이진한은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그것을 마르바스에게 겨눴다.
“우리, 쌓인 은원이 많지?”
-글쎄. 자네가 일방으로 쌓은 것이 아닌가. 이쪽은 피해를 본 기억밖에 없네만.
“가해자들은 항상 그리 말하지.”
듀란달을 부숴 먹은 것, 그리고 메피스토를 보내 하와와를 죽이고 고대 신의 잔재를 탈취하려 한 것.
모두 마르바스 그가 꾸민 짓이 아닌가.
-서순은 정확히 해야지. 애초에 우리가 계획한 일에 자네가 난입한….
쉬아아악!
마르바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성검이 기습적으로 맹렬한 기세와 함께 휘둘러졌다.
“애초에 너희랑 말싸움할 생각은 없었어.”
서걱─!
순식간에 마르바스의 목을 베어낸 이진한이 씩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