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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184화 (184/210)

◈ 184.

【2054:19:52】

시간의 유예가 2천 시간에 도달한 것은 해상 왕국에서 13번째 표적인 대왕 해수를 쓰러뜨렸을 때였다.

“휴. 이제 제법 이런 싸움도 익숙해졌네요.”

“다치신덴 없으십니까.”

“없어요. 미르엘은 괜찮아요?”

여전히 사이좋은 모습을 보이는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이 정겹게 대화를 나눈다. 그 옆으로 탈진해서 뻗은 일레이나와 이리아가 바닥에 늘어진 채 가늘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저 사람들은 지치지도 않나.”

“가끔 보면 부러워요.”

“너희가 너무 날뛰어서 그런 거야.”

까망베르에게 먹이를 먹이고 있던 이진한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그녀들을 내려다보았다.

성국 지하에 있던 시련의 장 이후 일행은 착실하게 성장하고 있었다.

아니, 착실하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이제껏 그와 함께 다니며 겪었던 경험치와 잠재력이 일시에 폭발하는 것인지 일주일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기하급수적인 성장 속도를 보였다.

문제는 이진한 본인 쪽에 있었다.

‘마기와 신성의 제어는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었어.’

마기는 자신이, 신성 쪽은 로네의 도움을 받아 서로 균형이 무너지지 않게 유지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요 며칠간의 반복으로 실전에 사용할 수 있을 정도의 숙련도를 갖추어 자신 역시 비약적으로 전력이 늘어났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과연 검성을 이길 수 있을까.

그러한 의문이 가슴 한편 깊은 곳에 남아있었다.

“…뭔가 고민이 있으신 것 같네요.”

“슬쩍 물어볼까요?”

“아니요.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말해주시겠죠.”

미르엘의 말에 엘레오노라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예전이었더라면 혼자만 안고 가지 말라고 말했겠지만, 이제는 그만한 믿음과 시간이 쌓였다.

일레이나와 이리아 역시 침묵한 채 쓰러진 해수 머리 위에 걸터앉아 있던 그를 곁눈질하고 있을 찰나, 이진한은 생각의 정리를 끝낸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베르하임 왕국으로 간다.”

“그곳으로요?”

“그래.”

베르하임 왕국에는 도원경이 있다.

궁여지책으로 「무신」 스킬을 얻어 다른 클래스의 초월지경을 사용할 수 있었지만, 이제 그것으로도 충당이 되지 않는 한계에 도달했다.

‘혼자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어.’

막연하게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릴 때가 아니었으니 마물 사냥을 끝내고는 베르하임 왕국으로 향했다.

“베르너 님!”

그들이 온다는 사실에 베르하임 국왕이 밝은 얼굴로 손수 게이트 앞까지 마중 나왔다.

베르하임 왕국 역시 대륙 의회의 일원으로 바빴지만, 이진한의 방문에 대리인을 보내 미뤄둔 상태였다.

“어? 데르메오, 너.”

“알아보셨습니까.”

데르메오 베르하임.

베르하임 국왕이자 검은 현자의 추종자인 블랙 워커의 정점인 그는 이진한을 향해 씩 웃어 있었다.

“얼마 전에 벽을 뛰어넘었습니다. 다 베르너 님 덕분이지요.”

초월지경에 오른 새로운 강자의 탄생이었다.

클래스는 그가 제일 높은 숙련도를 지니고 있던 그랜드 소드 마스터.

아직 자신도 도달하지 못한 경지이기에 어떻게 초월지경에 오를 수 있었는지 묻고 싶었지만,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며 검은 현자의 대단함에 대해서 열변을 토해내는 베르하임 국왕을 보니 차마 입이 열리지 않았다.

“그래서 무슨 도움이 필요하셔서 오셨습니까. 무엇이든지 말씀하시지요.”

원한다면 자신의 쓸개까지 내어줄 태도였다.

이진한은 쓴웃음을 지은 채 왕궁의 지하를 가리켰다.

“도원경을 이용하고 싶다. 괜찮겠지?”

“도원경입니까. 곧바로 준비하도록 하지요. 일행분께서는?”

“너희는 이때까지 고생했으니까 며칠은 푹 쉬어 둬.”

“정말요?”

“그래. 앞으로는 쉬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바다, 오랜만에 바다라도 가죠.”

“좋아요!”

그간 너무 고생시켰던 것인지 다들 들뜬 모습을 보였다.

잠시간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이진한은 베르하임 국왕에게 말했다.

“그럼 이들을 잘 부탁해.”

“염려 마십시오. 최상으로 대우해드리겠습니다.”

이진한은 지체할 것 없이 베르하임 왕궁의 지하로 향했다.

고대 영웅의 기록 보관소는 이전과 다름없이 섬세한 관리로 이루어진다. 도원경이 있는 자리로 갈 찰나, 그는 한쪽 옆에 새로 생겨난 동상을 바라보고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이건.”

“아, 베르너 님을 본떠 만든 동상입니다. 아무래도 이곳에 쓰인 기록처럼 후대에 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하.”

베르하임 국왕은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동상과 함께 있는 비석으로는 그의 업적이 간략하게 서술되어 있는바.

잠시간 쓴웃음을 토해내며 바라보던 이진한은 가볍게 뺨을 두들기고는 도원경으로 이루어지는 아치문 앞에 섰다.

“그럼, 다녀올게.”

“예. 밖은 저에게 맡겨 두십시오.”

베르하임 국왕이 자신의 가슴을 두드렸을 때, 그는 아치문 안쪽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히든 스테이지 「도원경(桃源境)」에 입장하셨습니다.]

[시간의 유예가 정지됩니다.]

[「도원경(桃源境)」은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시련의 장입니다.]

[도전자 「베르너」의 능력치를 측정합니다.]

[도전자의 특수성에 반응해 「도원경(桃源境)」의 구조가 변화합니다.]

[도전자는 시련을 포기할 수 있습니다.]

[시련을 포기하는 즉시 퇴실 처리되며, 다음 입장은 불가능합니다.]

이전과 같은 문구가 눈앞에 어지러이 떠올랐다.

그때와 다른 점이라면 다음 입장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건가.”

그 말과 함께 주위를 뒤덮었던 어둠이 걷혀나가고 몇 달 전에 보았던 익숙한 풍경이 펼쳐졌다.

고즈넉한 산골, 흘러내리는 폭포수.

마치 무릉도원을 연상시키는 듯한 여유로운 광경이었다.

저벅.

이쪽으로 다가오는 걸음 소리에 고개를 들자, 어째서인지 예전보다 훨씬 어려진 대현자가 반갑다는 듯 옅은 미소를 지어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전이랑 꽤 변한 것 같은데.”

“나는 애초에 이 모습이었네. 내 모습이 다르게 보인다면, 그것은 자네의 관점이 바뀐 것이겠지.”

대현자는 두꺼운 안경을 슬쩍 들어올리며 제법이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보다 성장의 폭이 빠르군. 밖에서 꽤 고생한 모양이야.”

“그래. 정말로 고생했지.”

사선을 넘었던 싸움이 몇 번이던가.

그래도 그 역경과 고난을 헤쳐나감으로 자신은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었다.

한 명으로도 벅찼던 마인은 이제 십수 명이 와도 한 손으로 처리가 가능했고, 대륙 최강자의 집단이라는 원탁 역시 초월지경의 강자 여섯을 상대로도 우위를 점했다.

“그래도 부족한가?”

“그래. 나는 더 강해지고 싶어.”

그럼에도 아직 검성이나 마왕이라는 큰 장애물이 남아 있었다.

지금 상황으로는 그들에게 대적하는 것이 불가능했기에 최후의 수단인 도원경의 힘을 빌릴 생각이었다.

“벽을 느꼈군.”

“「무신」 스킬로는 터무니없이 부족해. 다른 클래스의 초월지경도 달성해야 할 필요가 생겼어.”

“이번이 마지막인 건 알고 있겠지?”

“그래. 아쉽긴 하지만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사실 남은 시간도 그리 많지 않다. 이곳의 흐름으로는 길어봤자 일주일뿐이겠지.”

“그러면 저쪽에서의 하루인가. 그 정도면 충분해.”

그가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대현자의 뒤로 각 클래스의 분신들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 전신에 짙은 투기를 두르고 있는 상태로, 그들의 압박을 느낀 이진한은 침을 꿀꺽 삼켰다.

“…젠장, 그때는 어린애 장난이었군.”

원탁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강함.

그들 한명 한명이 자신과 맞먹거나 그 이상 이었다.

이전에 자신과 싸웠던 것은 상당히 손속에 사정을 봐준 듯 지금은 숨을 내쉬는 것조차 버거울 정도로 부담되었다.

“우리는 이제부터 자네를 쉴새없이 공격하고, 죽일 걸세. 그 가운데 무언가를 얻어가는 건 자네의 몫이겠지.”

“고통 없이는 성장도 없단 말인가.”

“그렇네. 모쪼록 잘 버텨내길 바라지.”

***

고통 없이는 성장도 없다는 말은 도대체 누가 만들어냈을까.

“끄으으윽!”

이진한은 뇌리에 차오르는 고통에 벌게진 눈으로 신음을 토해냈다.

자신의 분신들과 싸운 지 하루 차.

검으로 목을 비롯한 사지를 베여 죽은 것이 25번.

화살에 심장과 머리가 꿰뚫려 죽은 것이 54번.

마법에 짓눌려 죽은 것이 19번.

그 이외에 또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죽은 것이 30번.

그는 도합 128번의 죽음을 겪었다.

아직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지쳐 쓰러질 정도로 피폐해진 상황이었다.

짝!

하지만 이진한은 자신의 뺨을 두드림으로 나약해진 정신을 채찍질했다.

「불굴」의 효능은 육신뿐만 아니라 정신 쪽에도 영향을 끼친다. 투기를, 의지를 잃지만 않는다면 끊임없는 원동력을 그에게 주었다.

“흡!”

템페스트를 휘둘러 목을 베어오는 검을 막아냈다.

거의 동시에 사각으로 파고든 화살에는 몸을 비틀어 스치듯 피해냈고, 등허리를 찔러 들어오는 창끝은 반대 손으로 용아청성창을 소환해 쳐냈다.

‘좋아, 이번엔 느낌이 좋다!’

수백, 수천 번에 달하는 공방 가운데 처음으로 완벽하게 저들의 공격을 막아냈다.

이 흐름과 기세를 등에 업은 채 반격에 나선다면…!

쿠구구궁─!

“야! 이건 너무하잖아!”

그럴 틈도 없이 하늘 위로 여섯 개의 태양이 일시에 떠올라 떨어져 내렸다.

그대로 지상에 충돌한다면 자신과 경합을 벌이고 있는 분신들 역시 휘말려야 함이 옳았지만, 문제는 그 영향을 받는 것은 자신 혼자뿐이라는 것이었다.

“맞을 거면 다 같이 맞아야지! 나만 독박 쓰는 게 말이 돼?”

“그럴 수가 있나. 우리는 다 하나에서 파생된 존재인데.”

“나도 너희인데 이런 차별은…!”

광범위 폭격이 지상을 뒤덮었다.

지축이 흔들리며 거센 충격파가 땅을 뒤흔들었을 때, 이진한은 이미 깔끔하게 소멸하고 다시 태어난 직후였다.

“아….”

절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직전까지 들끓던 투기는 착 가라앉았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은 탈력감이 전신을 뒤덮었다.

“답답하지? 닿을 듯 말 듯 도달하지 못하니.”

그런 그의 옆으로 그랜드 소드 마스터가 다가와 히죽 웃었다.

“…알면서 놀리기야?”

“놀리는 게 아니라 네 상태를 정확히 꼬집어주는 것이지. 눈앞에 느껴지는 데 오르지 못하고 있는 그 멍청함을.”

그는 이진한의 옆구리를 툭툭 차며 말했다.

“비단 그랜드 소드 마스터뿐이 아니다. 다른 클래스의 숙련도도 초월지경에 오르기에 충분, 아니 차고 넘칠 정도지. 너보다 하수인 베르하임 국왕도 오른 경지다. 그보다 훨씬 숙련도와 레벨이 높고 강한 네가 도달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걸 모르니 이 고생을 하는 거잖아.”

분신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다른 세 클래스는 어떻게 초월지경에 이르렀지?”

“…대현자는 퀘스트 보상인데 마룡과 싸우다가 뜬금없이 해금됐고, 대마도사도 비슷했지. 용사 쪽은….”

메피스토와의 싸움에서 하와와를 잃었을 때 무언가가 촉진되어 각성을 이루었다.

“…뭐, 또 누군가 죽기라도 해야 한다는 거야?”

“그건 상황일 뿐이다. 초점을 맞춰야 하는 건 너 자신이지.”

“그러니까 그게 무슨….”

“네가 진심이 되었을 때만이, 너는 진화했고 성장할 수 있었다. 아직도 그것을 깨닫지 못했느냐.”

그 말에 이진한은 두 눈을 크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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