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3.
오스칼 제국의 수도에 마계의 게이트가 생긴 직후 발족된 대륙 의회는 일주일마다 정기 의회를 갖기로 했다.
첫 번째 의회에서는 현 상황의 파악과 마계 군세가 서대륙으로 넘어올 것을 대비한 그랜드 라인의 구축이 결정되었다.
각국에서 차출된 병력이 마경을 둘러싼 포위망의 설치를 완료한 가운데 개최된 2차 의회는 상당히 엄숙한 분위기와는 달리 상당히 열띤 모습을 하고 있었다.
“용사 일행이 나르마치 왕국을 가로지르는 유프라테스강에 나타난 고대 악마를 쓰러뜨렸다는 소식이오.”
“악마뿐이요. 바실리스크, 만티코어, 천조(天鳥) 등 요 일주일간 수많은 활약을 보였다지.”
“행동력이 대단하군. 그야말로 대륙 각지를 종횡무진으로 움직이고 있어.”
이진한이 자신의 행적을 적극적으로 표출한 덕분에 용사라는 두 글자가 널리 퍼지고 있었다.
애초에 베르너라는 이름은 드래곤 슬레이어자 데몬 슬레이어로 유명했었다. 그런 가운데 그가 사실 용사의 운명을 부여받은 존재라는 것이 알려지자 불에 기름을 끼얹은 것처럼 폭발적인 반응이 되돌아왔다.
그는 여기에 결정적일 때를 보아 고대 영웅 중 한 명인 《지혜》의 검은 현자임을 밝혀 쐐기를 박을 생각이었다.
“이터널 학파의 장으로서 존경을 표하오. 우리는 용사의 행보에 어떠한 지원도 아끼지 않을 생각이라오.”
이터널 학파의 장이자 마탑주인 호베르투가 흐뭇한 얼굴로 제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는 이진한이 고대 영웅 중 한 명인 《지혜》의 검은 현자 장본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극소수 중 한 명이었다.
일전에 이진한에게 들어 이미 접촉을 마친 프레이가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자, 그는 허허 웃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다들 베르너 공께서 저희 왕국을 급습한 고대 악마인 바포메트를 물리친 것을 알고 계시겠지요. 저는 첫 만남 때부터 예사롭지 않은 분이란 걸 느꼈습니다.”
페르포치아 왕국의 마도사인 베르하치 역시 왕국의 대표로 의회에 참석한 인물로, 이진한이 검은 현자인 것은 알지 못했지만, 그에게 큰 은혜를 입어 호의를 지니고 있었다.
“당분간은 곳곳을 돌아다니시면서 풀려난 악마나 마물을 처리하겠다고 하셨어요.”
“그렇습니까.”
“본국에 거점을 두고 있어 통신 체계는 철두철미하게 갖추고 있으니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곧바로 연락할 수 있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아라.
프레이는 옅은 미소와 함께 용사와의 긴밀한 관계성을 드러냈다.
“참. 원탁 쪽은 어떻게 되었습니다. 일라딘 공작?”
“큼.”
호명 당한 일라딘 공작은 못내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헛기침을 내뱉었다.
원탁은 고대 영웅의 유지를 받들어 생긴 유서 깊은 조직으로, 그 일원이 된다면 대륙 최강자 반열에 들었다는 걸 인정받게 되었다.
그만큼 명성과 공신력이 있는 이름이었지만, 원탁의 과반수가 인류를 배신하고 검성, 즉 마계 세력과 손을 잡았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큰 배신감을 느꼈다.
“성왕께서 하신 말씀이 사실이라는 건 확인했소이다. 본국은 리히테나워 가문의 자산과 영토를 압류하고 가신들은 모두 구속했소.”
“설마 리히테나워 가문이 가담했을 줄은…….”
“가문 전체가 가담한 건 아니오. 당주인 「무광」, 칼슈아 리히테나워 그 한 사람뿐이지. 하지만 이때까지 리히테나워 가문이 쌓아온 공적과 역사를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오.”
“그렇긴 하지요. 그래서 어찌할 생각이십니까.”
“본국에서 나온 이야기인데…….”
일리단 공작은 슬쩍 좌중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자신들과 리히테나워 가문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특히 국가의 전력 4할을 담당하고 있는 가문을 축출해버리면 막대한 공백이 생겨버리지 않겠는가.
“리히테나워의 기사들은 조금이나마 용서받고자 일반 병서로 전선에 서서 백의종군하겠다고 간곡히 부탁해왔소이다. 이들이 공적을 쌓는다면 향후 죄질을 고려해보는 것도 어떨까 생각되오만.”
“흠.”
인류를 배신하고 마계 세력과 손을 잡는 것은 크나큰 죄악이었다.
그 결과는 유구한 역사가 말해주지 않는가.
그렇기에 의회 역시 마계가 본격적으로 발호하자 내부의 적을 없애기 위해 신성 왕국과 적극적으로 연계해 철저히 배신자를 색출해냈다.
‘그리고 이번 사건도 마찬가지지.’
일리단 공작은 긴장한 시선으로 이티널 학파장 호베르투를 바라보았다.
칼슈아와 함께 원탁에 가담한 「발푸르기스의 마녀」 레이첼은 이터널 학파의 계보를 잇는 마법사였다.
지금은 학파를 나가 독자적인 유파를 열었다고 했지만, 원탁이 배신한 것이 알려진 당일 레이첼의 유파가 급습당해 흔적도 없이 소멸해버렸다.
‘영웅의 이름에 취한 미친 늙은이.’
저들이 아니, 비단 저들 뿐만이 아니라 영웅의 유지를 계승한 이들이 그들을 신처럼 숭상하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니 《영원》의 이름을 더럽힌 레이첼에 관련된 모든 것을 지우려는 것이 틀림없었다.
듣기로는 그녀의 목에 천문학적인 금액의 현상금이 걸렸다고 할 정도였으니, 이터널의 진심을 알 만했다.
“본인은 괜찮다고 봅니다. 전선에서 백의종군하겠다면 그들의 진심을 살펴보는 것이 좋겠지요.”
“맞소이다. 다른 낌새를 보이면 그때 처리하면 될 일. 리히테나워 가문의 저력이 깊은 것은 맞으나….”
구우우웅─.
내뱉어진 말이 끝나기도 전에 주위를 뒤덮는 막대한 마력의 파동에 다들 두 눈을 크게 떴다.
무예를 익히지 않은 이라 할지라도 솜털이 쭈뼛 설 정도로 강렬한 기운이었다. 제일 먼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것은 느긋한 모습으로 의회의 분위기를 즐기던 성왕 프레이였다.
“마기! 그것도 더없이 강력한 것입니다!”
“마기라고? 마계의 군세가 본국에 쳐들어오기라도 했단 말입니까?”
대륙 의회는 리베라 제국의 수도인 폴포아르텔에서 이루어졌다.
폴포아르텔은 그 자체만으로 수많은 보호 마법과 정예 병력이 지키고 있을뿐더러, 의회가 열리는 장소는 황궁과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
제국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곳이니 발에 채는 것이 소드 마스터였고 마도사인 상황에 닥쳐온 적을 막지 못했다는 것인가.
“…다들, 밖으로.”
의회장을 맡은 리베라 제국의 공작이 입을 열었다.
이곳에서 공격을 받았다간 건물과 함께 매몰될 수 있었기에 더 안전한 황궁으로 이동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의회의 건물을 나서는 순간 거멓게 물든 하늘로부터 떨어진 한 줄기 낙뢰에 그들의 발이 묶이고 말았다.
콰아아앙!
잘 포장된 길이 산산조각이 나며 그 파편이 사방으로 흩날린다. 자욱한 먼지가 피어오르는 가운데 하늘을 물들인 마기는 점차 농도가 짙어져 갔다.
“….”
좌중에 적막한 침묵이 감돌았다.
한눈에 보아도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낀 모두가 입을 닫은 것이었다.
투둑.
움푹이 파인 크레이터 밖으로 한 존재가 발을 내디뎠다.
곧이어 흩날리던 흙먼지가 한 번에 걷히고, 그 가운데 오롯이 서 있던 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하신가, 제군들.
마왕을 상징하는 세 개의 뿔.
짙은 검붉은 색의 피부와 번뜩이는 눈동자는 한 눈에 보아도 예사로운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귀공은 누구시오.”
제국 황실의 기사단 휘몰아치는 불꽃의 부단장 헨더슨 앤드류가 굳은 낯빛으로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의회의 경호를 위해 파견되어 있던 다른 기사와 마도사들 역시 전투태세를 갖추었고, 뒤덮은 공기는 점차 팽팽해지며 긴장감을 높였다.
-본인은 마계에 이름을 알린 일흔둘의 지배자 중 한 명.
귓가에서 바로 울리는 듯한 그 말소리가 이어질 때마다 좌중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마왕 마르바스라 한다네.
“…마왕!”
프레이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주먹을 꽉 쥐며 새어 나오는 비명을 억눌렀다.
마왕이 이 자리까지 당도할 줄은.
아니, 설마 중간계에 현현할 인과율을 충족한 것일까.
눈앞에 우려하던 현실이 펼쳐지자 온갖 걱정이 그 심중에 휘몰아쳤다.
‘여기서 싸우면 절대 안 된다.’
마왕이 괜히 마왕이겠는가.
범접 불가능한 재앙이란 의미였다.
그 대항마자 대척점인 용사라는 존재가 있지 않은 이상, 설사 성왕인 자신이라 할지라도 그 앞에 우뚝 설 수 없었다.
더욱이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각국의 주요 인사. 한 명이라도 죽었다간 큰 혼란을 초래할 수 있었다.
-본래라면 가볍게 인사를 할 생각이었네. 이렇게 다들 모여 있는 경우는 그리 없으니 말이야. 하지만….
마르바스는 옅은 미소와 함께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막상 이 두 눈으로 보자니 조금 욕심이 나는 군.
그 끝은 명백히 프레이에게 향해 있었다.
다른 이들은 둘째치더라도 성왕이란 존재는 마계에 있어 용사 다음으로 눈엣가시인 이름이 아니던가.
“막아!”
헨더슨이 기합을 토해내며 그 앞을 가로막았다.
이터널 마탑에서 이진한에게 호되게 당한 이후 피나는 수련을 통해 초월지경에 도달한 그였다.
애초에 경지를 목전에 두고 있던 그였기에 처참히 깨진 경험은 좋은 촉진제가 되었다.
파아앗!
눈 부신 빛이 그 검에 피어오르며 세상을 뒤덮어갔다.
그랜드 소드 마스터에 걸맞은 위용이라 할 수 있었지만, 나지막한 조소와 함께 쏘아진 검붉은 파멸의 빛을 막기에는 한없이 부족했을 따름이었다.
파각─!
“…!”
빛이 무너져 내리며 검이 부서졌다.
헨더슨은 그것의 궤도라도 꺾어보려 노력했으나, 파멸의 빛은 오롯이 프레이를 향해 쏘아졌을 뿐이었다.
‘가호를…!’
헨더슨이 벌어준 짤막한 틈 가운데 프레이는 자신의 전력을 선보였다.
순백의 신성으로 이루어진 세 쌍의 날개가 그 등 뒤에서 피어나 몸을 감쌌고 그 위로 대천사의 가호가 깃들었다.
설사 마왕의 공격이라 할지라도 일격은 버텨내리라.
하지만 예상과 달리 파멸의 빛은 그녀가 발한 가호를 무참히 찢어발겼다.
“…아.”
눈앞까지 닥쳐온 죽음에 프레이는 나지막한 신음을 흘렸다.
주마등도, 후회도, 미련도 없다. 그저 멍하니 자신을 꿰뚫을 파멸의 빛을 바라볼 뿐이었다.
“마왕의 눈에는 성왕밖에 보이지 않나 보군. 옛적 악신을 물리친 것은 《안식》뿐이 아니었는데 말이야.”
쿵─.
호베르투가 스태프를 들어 바닥에 내려찍자 일순간 공간의 방위가 뒤바뀌었다.
파멸의 빛은 이리저리 굴절되더니 종래엔 그것을 쏘아낸 장본인에게 닥쳐가 날카로운 이빨을 들이밀었다.
-흠. 《영원》의 아이들인가.
마르바스는 흥미롭다는 시선으로 호베르투를 바라보곤 닥쳐오던 파멸의 빛을 가볍게 받아내었다.
그러곤 손을 들어 올려 그 위에 기다란 검을 형상화해 쥐었을 따름이었다.
-영웅의 계승자들. 우리에게 있어서도 눈엣가시 같은 존재들이지. 걱정하지 않아도 제일 먼저 처리하려 했다.
쉬아아악!
시원한 일 검이었다.
검은 궤적이 세상을 반으로 베어 갈랐고, 그 여파는 곧 그들에게까지 들이닥쳤다.
“어딜…!”
호베르투가 다시 한번 스태프를 찍었다.
이진한이 전해준 「삼라만상」의 마법이 활성화됨과 동시에 틈을 노리고 있던 실력자들이 일시에 나서며 역공을 펼쳤다.
-가소롭다. 내 단언하마. 성왕을 비롯해 여기 절반의 목을 가지고 돌아갈 것이다.
파각.
시간이 멈췄다.
모두가 그렇게 느꼈을 때, 마르바스에게 전의를 불태운 채 닥쳐가던 모든 이들이 피를 토하며 바닥을 굴렀다.
경지가 낮은 자는 일시에 사망했고, 그렇지 않다고 할지라도 단번에 운신하지 못할 상처를 입었다.
“…이건 대체.”
호베르투는 입가에 새어 나오는 피를 닦으며 떨리는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마법도, 스킬도 아니었다.
대체 가늠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현상은 무엇이란 말인가.
-권능이란 것이다. 하등한 필멸자 따위는 감히 바라보는 것조차 사치스러운 것이지.
“…권능.”
애초에 격이 달랐다.
호베르투가 더는 버티지 못한 채 바닥에 허물어졌을 찰나, 마르바스는 권태로운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어떤가, 성왕이여. 자네가 스스로 자결한다면 내 이 자리에 더는 누구도 죽이지 않은 채 자리를 떠나지.
“….”
귓가를 스치는 말에 프레이는 이를 악물었다.
자결은 신성 교단에 있어 최악의 행위였다.
그리고 마왕은 이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이 그리할 것을 종용하고 있었다.
-수많은 이를 위해 희생하는 것. 자네들 말로는 순교라고 하나. 자네들의 율법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큰 죄악이라곤 하지만, 여신이 정말로 관대하다면 용서해주지 않을까 싶네.
프레이의 손이 덜덜 떨렸다.
모두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는 것을 느낀다. 호베르투가 피를 토해내며 안 된다고 고개를 저었지만, 자신 하나로 여기 있는 모두를 살릴 수 있다면….
“….”
덜덜 떨리는 손이 검을 쥐었다.
검 끝은 자신의 가슴을 향하고, 심장을 향해 겨눠졌다.
-그래, 그것이네.
마르바스의 입가에 서린 미소가 짙어졌다.
프레이는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속으로 용서를 빌었다.
‘…죄송해요, 베르너 님. 끝까지 함께할 수 없을 것 같아요.’
푹.
날카로운 검이 살갗을 파고 들었다.
하지만 마르바스는 마음에 들지 않다는 듯 미간을 좁히며 혀를 찼다.
-자네는 언제나 예상치 못한 때에 나를 방해하는군.
“…프레이.”
“아.”
귓가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프레이는 두 눈을 떴다.
거칠게 숨을 헐떡이는 이진한이 구슬땀을 흘리며 자신의 가슴을 반쯤 파고 든 검날을 맨손으로 붙잡고 있었다.
시뻘건 피가 의복 위로 뚝뚝 떨어진다. 그럼에도 이진한은 괜찮다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네가 죽어야 할 이유는 하나도 없어.”
챙!
성검 아스칼론이 맹렬한 기세로 뽑혀 나왔다.
프레이의 가슴을 꿰뚫은 검을 뺏어 내팽개친 이진한은 눈부신 신성이 흘러 나오는 아스칼론을 들었다.
“내가 네놈들 전부 갈아 마시려고 초월지경 다 찍어왔다.”
부릅뜬 눈이 섬뜩한 빛을 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