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2.
“당신!”
일레이나는 무엇을 눈치챈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리숙하고 불완전하던 마나의 흐름이 일련의 흐름을 따라 체계적으로 정립되었다.
하위 경지에서는 볼 수 없는 그 뚜렷한 변화는 엘레오노라가 마도사의 경지에 올랐다는 것을 뜻했다.
“발악하니까 어떻게든 넘어지더라고요. 정말로 고생 많이 했어요.”
그녀는 씩 웃으며 두 손가락으로 브이 형태를 보였다.
실제로 그 새하얀 피부가 푸석하고 안색이 초췌해 보였지만, 웃음기를 띤 눈동자는 선명하기만 했다.
“다들 얼추 햇병아리에서 졸업했나.”
“이제 막연하게 짐 덩이만 되지 않는다구요.”
일레이나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자 다들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여왔다.
타다다닥.
그때 지하로 내려오는 계단 쪽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왜 그런가 싶어 다들 시선을 보내자, 유리아가 푸른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사뭇 다급한 표정으로 그들에게 달려왔다.
“유리아, 무슨 일이죠?”
“…대륙 각지에서 불명의 적들이 나타나 소란을 벌이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대부분 마수나 악마로 보이는 이들로, 아주 옛적부터 전설이나 설화 속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존재들이 아닐까 유추하고 있답니다. 아무래도 일반 전력으로는 상대하기 힘든 터라 현재 본국으로 지원 요청이 빗발치고 있습니다.”
“이런.”
프레이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진한의 말처럼 오스칼 제국의 수도 말고 다른 곳에 게이트가 생긴 불상사는 아니었지만, 명백히 작금의 사태와 연관이 있는 것은 틀림없었다.
더욱이 그 상대가 마수나 악마 같은 존재라면 일반적인 전력으로는 상대하기 힘들 터. 이쪽의 전력을 쪼개서라도 그들을 도와야 함이 옳았다.
“음.”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이진한은 문득 뇌리를 스치는 좋은 생각에 고개를 들었다.
“저쪽 리스트 정리해서 나한테 넘겨줘.”
“네?”
“그러면 우리가 싹 다 정리해줄게. 수련도 끝냈으니까 이제 실전으로 경험 좀 쌓아야지.”
그는 일행을 바라보았다.
저마다 몇 단계씩은 강해졌기 때문인지 자신의 힘을 표출하고 싶어 근질거리는 기색이 선명했다.
“…그렇게 해주신다면 더 바랄 것이 없네요.”
마계 군세는 아직 오스칼 제국의 영토를 전전하고 있다.
그 너머에 있는 마경이나 다른 왕국을 공격하기까지는 아직 꽤 시일이 있어 보였기에 당장 후방의 피해를 소화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진한은 품 안에 있던 엘레오노라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며 몸을 돌렸다.
“자, 이제 실전으로 가자.”
***
신성 왕국에서 마차로 한 달하고 보름 정도 더 떨어진 나르마치 왕국에는 오래된 전설이 있었다.
왕국을 관통하는 유프라테스강 지하에는 고대 악마가 봉인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역사적 자료도 뚜렷한 신빙성도 없는 이야기였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것은 나르마치 왕국에 있어 하나의 행사로 자리 잡았다.
봉인이 가장 취약해진다는 봄철에 유프라테스강 전역에 악마의 기운을 억누르기 위한 축제가 열렸고, 순례의 길을 걷는 성직자들이 와서 신성한 의식을 치렀다.
하지만 오스칼 제국에 마계를 잇는 게이트가 생기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이 무슨 흉사인가.”
“강물의 색이 검게 변하다니. 유례없는 일이네.”
누가 독이라도 푼 것이 아닌가.
온갖 학자들이 매달려 원흉을 찾았지만, 뚜렷한 결과를 도출해내지 못했다.
원인이 밝혀진 것은 순례를 걷는 성직자들이 그곳에 도착했을 때였다.
“마기! 이건 선명한 마기입니다!”
“…마기? 마기가 어째서 강물에 깃들어 있단 말이오.”
“이 전역을 전부 뒤덮을 정도의 마기라면….”
“심각한 문제입니다. 유프라테스강은 시민들의 식수와 생활용수로 사용되고 있는데 빨리 해결책을 찾지 못한다면 도시가 버티지 못할 겁니다.”
마기를 정화하는 건 신성뿐이었다.
그렇기에 왕국의 부탁을 받은 성직자들이 힘을 합했고, 각자 구역을 맡아 마기로 물든 유프라테스강을 정화해나갔다.
하지만 그것이 재앙의 시작이었다.
츠즈즈즈─.
물속에서부터 정체불명의 마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떤 것은 촉수를 지녔고, 어떤 것은 수십 개의 눈을 지녔고, 어떤 것은 날카로운 이빨과 뭉툭한 발톱을 지녔다.
그것들은 어찌할 틈도 없이 사람들을 습격했고, 강변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으아악! 마물이다! 강에서 마물이 올라온다!”
“도시에 알려! 악마가, 악마의 봉인이 풀려났다!”
죽어가는 사람들의 절규가 메아리치는 가운데 시커먼 강 중심에 한 존재가 우뚝 솟아올랐다.
한 쌍의 검은 날개가 펄럭인다. 전신이 검붉은색으로 뒤덮인 인간 형태의 존재는 머리 위에 달린 외뿔을 번뜩이며 도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웅웅─!
다량의 마기가 외뿔 외에 응집되며 한 점으로 쏘아진다. 그것은 순식간에 도시를 반파했고, 이루어 말할 수 없는 피해를 일으켰다.
“막아! 절대 이곳을 넘겨선 안 된다!”
“성국의 지원은 아직인가!”
“제기랄, 대체 이놈들은…!”
나르마치 왕국의 대처는 훌륭했다고 할 수 있었다.
마물들이 나타난 지 한 시간 째.
결사의 각오로 강변을 틀어막으며 어떻게든 마물들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저지했다.
하지만 점점 쌓여 가는 피해와 오지 않는 지원군은 그들을 절망케 했다.
“전군….”
지휘관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
이곳이 뚫린다면 수많은 마물이 아직 피난하지 못한 시민들을 덮칠 것이었다.
그렇기에 이 땅에 몸을 묻자며 돌격 명령을 내릴 찰나, 눈 부신 빛이 그들 가운데 떨어져 내렸다.
쿠웅─!
묵직한 진동과 함께 전장의 기온이 기하급수적으로 내려갔다.
얼어붙은 결정들이 허공에 흩날리고, 그 사이로 새하얀 검광이 가로지르며 대지를 뒤덮은 마물을 격살했다.
“…!”
막, 마물의 이빨에 뜯어먹혀 죽기 직전이던 기사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뒤 자신의 앞에 우뚝 선 등을 바라보았다.
티 하나 없는 새하얀 풀 플레이트 아머, 손에 쥔 푸르스름한 검신 위에는 살아생전 보지 못했던 찬란한 오러 블레이드가 서려 있었다.
쉬아악─!
그가 검을 휘두르자 마물의 군세가 무참히 베어 갈라졌다.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구함 받았고, 그보다 더 많은 마수가 숨이 끊어진 채 바닥에 쓰러졌다.
“….”
미르엘은 고개를 들어 가늘어진 눈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베어낸 것보다 더 많은 숫자의 마물이 강에서부터 꾸역꾸역 올라오고 있다. 강 안쪽에 있는 원인을 제거하지 못한다면 언제까지고 이 상황이 유지될 것임이 분명해 보였다.
“여기가 무너지면 안 됩니다! 뒤쪽에는 아직 피난하지 못한 시민들이….”
기사는 간절한 표정으로 미르엘에게 애원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조력자였지만, 지금은 그녀에게 매달리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 간곡한 부탁에 미르엘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무너지지 않을 거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 말과 동시에 하늘 위로 세찬 광풍이 불어닥쳤다.
짙은 잿빛의 와류는 한데 모여 몸집을 부풀리더니 이내 전장 위를 질주하며 이 땅 위에 모습을 드러낸 마물들에게 가차 없는 응징을 가했다.
마도사 클래스 마법 「비천야차(飛天夜叉)」
마치 칼날의 폭풍이ㅍ 휩쓸어가듯 마물들의 몸이 형태조차 유지하지 못한 채 갈려 나가며 산산조각이 났다.
“…와.”
치열했던 전장 위로 일순간 공백이 생길 정도의 강력한 위력에 누군가 짤막한 감탄을 터트렸다.
“물러나! 이 틈에 전열을 다시 정비한다! 부상자는 후방으로, 싸울 수 있는 자들은 부족한 물자를 보충하고 다시 전위로 나와!”
지휘관은 목에 핏대가 섰을 정도로 소리를 지르며 기사와 병사들을 다독였다.
그러곤 몸을 돌려 자신들에게 다가온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을 향해 깊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전멸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전멸이라는 말이 거론될 정도로 암담했던 상황이었다.
그 직후 지휘관은 슬쩍 그들의 얼굴을 살피며 살짝 아리송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혹시 성국에서 오셨습니까?”
어지간한 팔라딘과는 여러 행사를 통해 안면이 있던 그였지만, 둘의 얼굴은 처음 보는 것이었기에 의문이 든 것이었다.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은 그 의문에 서로를 슬쩍 바라보고는 씩 웃으며 답해주었다.
“용사님이 보내셔서 왔습니다.”
***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이 나르마치 왕국에서 활약하고 있을 무렵, 일레이나와 이리아 역시 초목이 울창한 산맥을 전전하고 있었다.
이쪽은 무너진 던전에서부터 바실리스크를 비롯한 다량의 몬스터가 튀어나와 산맥 전역이 출입 불가 지역으로 봉쇄된 상태였다.
“너무 많은데요. 일일이 요격하기엔 끝이 없을 것 같아요.”
“그럼 그냥 한 번에 태워버릴까?”
“그러는 게 나을 것 같네요.”
이리아가 두 팔을 벌리자 실피온이 바람을 일으켜 두 줄기의 장벽을 세웠다.
마물들이 더 퍼져나가지 못하게 한쪽으로 모으려는 의도였다.
파아앗─!
시뻘건 작염이 일레이나의 스태프 위에서 휘몰아쳤다.
그녀가 가볍게 불꽃을 던지자 그것은 걷잡을 수 없는 규모의 해일이 되어 산맥과 함께 몬스터들을 뒤덮었다.
“역시 너랑은 시너지가 좋네.”
“그런가요.”
성국에서 나와 대륙 각지를 돌아다닌 지 일주일 째.
일레이나는 이리아에게 말을 놓았다.
단순히 맏언니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서로 상대를 인정했기에 그런 것이었다.
“…뱀 구이는 맛있으려나?”
“마물이라 먹기는 좀 그렇지 않을까요?”
“배고픈데. 가져온 음식도 다 떨어졌고.”
“열매라도 좀 찾아볼까요?”
화망을 벗어나지 못한 채 바싹 구워지는 몬스터들을 보며 둘은 잡담을 나누었다.
그렇게 얼마를 있었을까, 뜨거운 열기를 버티지 못한 바실리스크가 먼저 땅속에서부터 솟구치며 그녀들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향했다.
“드디어 나왔네.”
촤아악─!
바실리스크는 시커먼 자줏빛 독액을 토해냈다.
일레이나는 가볍게 손가락을 튕긴 것으로 「사계」를 활성화했고, 자신들과 바실리스크 사이에 쉬이 닿을 수 없는 무수히 쪼개내었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싸워볼까.”
그 이후로 몇 시간 동안은 밀고 밀리는 치열한 공방의 연속이었다.
다만, 일레이나와 이리아 쪽은 철두철미한 방어 덕분에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은 반면 바실리스크는 꼬리가 뭉개졌고 몸 곳곳의 비늘이 갈려 나가 적잖은 상처를 보이고 있었다.
“항마력을 뚫는 것이 쉽지 않네.”
“미르엘이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요.”
둘 다 마법사인 이상 화력이 마법 쪽으로 집중되기 마련이다. 정령 마법도 같은 계통으로 쳤으니 바실리스크의 비늘을 떼어내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슬슬 연락할까?”
“그러는 게 좋겠어요.”
일레이나는 품 안에서 통신용 수정구를 꺼내 들었다.
가볍게 그것을 몇 번 두들긴 뒤 호출하자 색이 바뀌며 상대 쪽과 연결되었다.
“바실리스크 거의 쓰러뜨렸어요.”
-알겠어. 곧 간다.
간결한 대답과 함께 그 답이 뚝 끊어졌다.
일레이나는 빈 수정구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왜 매번 쓰러뜨리기 직전에 연락해달라고 하는 걸까?”
“그러게요. 명성 때문에 그러신가?”
“그런 거에 집착할 남자는 아니지만, 뭐 무슨 생각이 있겠지.”
약 1분가량 바실리스크와 더 대치했을까, 저 멀리서 엄청난 기운이 이곳으로 쇄도해오는 것이 느껴졌다.
바실리스크도 그것을 알아차렸는지 재빨리 몸을 일으켜 움직이려 했지만, 순식간에 그 지척에 다다른 이진한이 가볍게 검을 휘두르는 것으로 목을 베어냈다.
[시간의 유예를 획득하셨습니다.]
【1521:22:38】
“좋아.”
이진한은 씩 웃었다.
마인들을 쓰러뜨렸을 때와 달리 마물을 비롯한 악마는 착실하게 시간을 가져다주었다.
물론 어쭙잖은 수준은 단 한 시간도 주지 않았지만, 지금과 같이 꽤 체격이 있는 존재라면 예외 없이 적게는 수십에서 많게는 백 시간이 넘는 유예가 추가되었다.
요 일주일간 격살한 것이 모두 여섯 마리.
이대로라면 목표치인 2천 시간까지 머지않을 듯싶었다.
“진작 이렇게 할 걸 그랬어.”
그간은 휙휙 돌아가는 상황에 휘둘리며 따라가는 것에 급급했지만, 마계가 본격적으로 야욕을 드러낸 이상 물밑에서만 대치할 이유가 없었다.
성국의 정보력이 뛰어난 것도 덕을 보았다.
그들은 각지에 일어난 소란을 곧바로 파악해 정보를 넘겨주었고, 각 나라와 연계해 자신들이 갈 수 있도록 길을 터주었다.
이쪽은 시간의 유예와 용사 이름이 주는 인지도, 그리고 일행의 경험치를 쌓을 수 있어서 좋았고 성국은 자신들의 입지를 다질 수 있어서 이득이었다.
해당 국가 역시 큰 피해 없이 소란을 잠재울 수 있으니 모두가 이득을 보는 구조가 아니겠는가.
웅─.
그때 이진한의 품에 있던 통신구에 연락이 왔다.
“저쪽도 거의 끝냈나 봐. 와달라고 연락 왔네.”
“그러면 저희는 여기 마무리하고 다시 성국으로 돌아갈게요.”
“그래. 이리아, 너도 잘 부탁한다.”
“네!”
이진한은 둘과 작별한 뒤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이 있는 나르마치 왕국으로 향했다.
“또 어떤 녀석이 있으려나.”
고인물로서는 보스 출현 이벤트를 놓칠 수 없는 노릇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