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1.
끼이익─.
굳게 닫혀 있던 거대한 문이 열렸다.
오스칼 제국의 황궁, 본래라면 수려한 빛깔로 장식되어 있을 그 풍경은 색바랜 먼지로 뒤덮인 채 신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부서진 천장으로부터 새어 들어온 한 줄기 빛이 내부를 밝힌다. 그러자 대전의 끝, 황제를 위해 자리한 옥좌에 한 남자가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흠.”
가지런히 모인 백발과 정리된 수염으로 인해 정갈한 인상을 주는 노인이 천천히 두 눈을 떴다.
옥좌를 가득 채우는 당당한 풍채였지만, 그와 반대로 인자함이 가득 깃든 시선으로 대전 가운데를 걸어오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스승님.”
다리우스는 감히 검성과 눈을 마주칠 생각을 하지 못한 채 극진한 예의를 표하며 천천히 그 앞으로 나아왔다.
대전은 곳곳이 부서지고 균열이 생긴 세기말의 풍경이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 없이 스승과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툭.
그 뒤로 원탁이 일렬로 늘어섰다.
조니악은 이진한에게 소멸당해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에우리스테우스도 이곳으로 오는 도중 무리를 이탈했다.
남은 이들은 가니온, 레이첼, 칼슈아 셋뿐.
그 인원의 면면을 훑은 검성은 옅은 조소를 지었다.
“초라하구나.”
“….”
표정과는 사뭇 다른 언사에 다리우스는 흠칫 어깨를 떨었다.
“원탁을 손에 넣고 그들을 이용해 용사에게 접근한다는 계획이었지.”
“그렇습니다.”
“헌데, 결과는 어찌 되었느냐.”
할 말이 없었다.
애초 계획한 원탁의 포섭은 절반에 그쳤고, 그마저도 용사를 포획하는 것에 실패했으며 이쪽의 전력마저 소실되었다.
“그 덕분에 내가, 제국이 마계에 가담했다는 것도 공식적으로 알려졌지. 성국의 그 계집이 이미 사방으로 전령을 보냈다고 하더구나.”
“설마 영웅 본인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영웅의 계승자와 용사라곤 하나 원탁의 전력이라면 충분히….”
툭.
“…!”
다리우스의 왼쪽 팔이 잘려나갔다.
누군가 검을 뽑은 것도, 무언가 행동을 취한 것도 아니었다.
검성은 그저 권좌에 앉아 가라앉은 시선으로 제자를 내려다보았을 뿐이었다.
단지 베고자 하는 의지로 베어낸 것이었으니, 초월지경에 올라 검성의 후계자로 이름 받은 그조차 아직 가늠할 수 없는 경지였다.
“….”
잘려 나간 팔에서 피가 터져 나오자 좌중의 분위기가 경직되었다.
특히 같은 검의 길을 걷는 칼슈아는 감히 보지도 못한 그 검격에 경악하며 두 눈을 부릅떴다.
“그러한 변수를 줄이고자 네놈에게 힘을 실어준 것이지 않으냐.”
귓가를 스치는 권태로운 목소리에 다리우스는 이를 악물었다.
이때까지 수십 년, 자신은 스승이 내리는 명령을 착실하게 이행하고 성공해왔다.
한 번쯤은 눈감아줄 법도 했지만, 떨어지는 질책은 너무나도 매서웠다.
‘…그래, 스승님은 원래 이런 분이셨지.’
다리우스는 참담한 심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못난 놈.”
검성은 혀를 찬 검성은 제자 뒤쪽으로 늘어선 이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무광」의 칼슈아
「발푸르기스의 마녀」 레이첼
둘 다 어디 가서 대접받지 못할 이름은 아니었지만, 감히 검성과 시선을 마주치지 못한 채 애꿎은 바닥만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 시선은 초연한 태도로 서 있던 하이엘프 가니온에게 닿았다.
“하이엘프여.”
“…예.”
천 년을 살아가는 하이엘프가 인간에게 존대하는 건 쉬이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검성이란 이름 앞에선 그것 역시 자연스러운 흐름일 뿐이었다.
“대족장께서는 강녕하신가.”
“배려해주신 덕분에 적잖게 기운을 되찾으셨습니다. 머지않아 병상을 털고 일어나실 듯합니다.”
“그런가, 참으로 다행이로군.”
검성은 처음으로 만족한 듯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엘프 일족은 가니온을 비롯해 전부 마왕과 계약을 맺었다.
그들은 확실히 인간을 비롯한 다른 종족에 비해 소수였지만, 그 하나하나의 존재가 예사롭지 않은 강함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하이엘프에 이르러선 드래곤과 비견되는 힘을 지닌 이도 있으니 포섭할 수만 있다면 그만한 이득이 없었다.
“대족장께 조만간 뵙기를 바란다고 부탁하지.”
“예. 전하겠습니다.”
이야기를 끝낸 검성은 여전히 피를 철철 흘린 채 바닥에 부복해 있던 제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차라리 검호가 나았겠구나. 그 아이는 정신이 이상했어도 뚝심은 있었으니 말이야.”
“….”
죽은 검호를 운운하면서까지 자신과 비교하는 것은 다리우스에게 더없이 치욕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스승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고자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마음을 억눌렀고, 더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가보아라. 두 번은 없다.”
검성은 용무가 끝났다는 듯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다리우스는 한 번 더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한 것을 끝으로 자신의 팔을 주워들며 원탁과 함께 대전을 떠났다.
끼이익, 쿵.
소음과 함께 문이 굳게 닫혔다.
홀로 남게 된 대전 안, 그 적막함을 만끽하던 검성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영웅이라.”
구시대의 잔재 따위가 이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지금은 그것보다 더 신경 써야 할 것이 많았을 따름이었다.
***
“슬슬 시간이 됐군요.”
“흠.”
성국의 지하.
이진한은 긴장된 시선으로 굳게 닫힌 철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이 너머에는 신성 왕국에서도 성왕의 선택을 받은 이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시련의 장소가 펼쳐져 있었다.
그의 일행은 용사의 파티 원이라는 특별 혜택으로 그 안에 들어갔고, 이제 그 결실을 거둘 때가 머지않았다.
“시련이라. 안쪽은 어떻게 되어 있지?”
“시련이라는 이름이 그렇듯 자신을 시험하는 것이지요. 처음에는 내부를 관조해 자아를 각성하고, 그 다음에는 외부의 적을 통해 강함을 시험한답니다.”
“재밌어 보이네.”
이진한은 턱을 쓰다듬었다.
개개인의 경지에 따라 그 수준이 달라진다고 하니 자신 역시 이 안으로 들어간다면 얻는 것이 있을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 의문을 눈치챈 듯 프레이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초월지경에 오른 이들에게는 작동하지 않습니다. 저 역시 그랬어요.”
“그런가. 아쉽네.”
간만에 기연이라도 얻는가 싶더니 아쉬운 이야기였다.
그래도 자신의 일행이 대신 얻는다면 손해볼 일은 아니었기에 벽에 기대선 채 언제 나올지 모르는 그녀들을 기다렸다.
웅웅.
얼마를 그렇게 있었을까, 철문 뒤로 거센 바람이 불어오며 굳게 닫혀 있던 틈새가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모습을 드러낸 것은 보랏빛 머리카락의 여인이었다.
“…아!”
일레이나는 이진한과 두 눈을 마주치자 밝게 웃으며 그 앞으로 달려왔다.
“성검은 어떻게 됐어요?”
“당연히 손에 넣었지. 너는 어때?”
“어때 보여요?”
일레이나는 장난스레 웃으며 제자리에서 가볍게 한 바퀴 돌았다.
“오?”
대현자의 눈으로 그녀의 성취를 가늠하던 이진한은 짤막한 감탄사를 터트렸다.
분명 7클래스였던 경지가 가로막고 있던 벽을 넘어 8클래스에 도달해 있었다.
8클래스부터는 이전까지와는 달리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의 수준이 천차만별로 차이가 났다. 더욱이 일레이나는 《영원》의 마법을 계승했으니, 「사계」의 활용도가 무궁무진해질 것이 틀림없었다.
“대단한 성취네요. 이 정도면 이번 세기에서 손꼽힐 결과인 것 같아요.”
“감사해요, 성왕 전하. 언젠가 제가 필요로 한 일이 있다면 불러주세요. 이 은혜는 꼭 갚을게요.”
일레이나는 옷의 양 끝자락을 붙잡고는 프레이에게 가볍게 예의를 표했다.
평소 가식이 섞여 있던 모습과 달리 진심이 담긴 행동을 보니 어지간히 그녀에게 감사한 마음인 듯싶었다.
“알겠어요. 아마 조만간 자주 필요해지지 않을까 싶네요.”
“아, 적정선 넘으면 추가금이 붙으니까 그건 양해해주시고요.”
“…칼 같네요 정말.”
프레이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이 시련을 겪을 수 있는 이들은 성국 내에서도 소수라며. 외부인인 우리에게 이렇게 막 열어줘도 되는 거야?”
혹시 성왕의 이름이 흔들리지 않을까 걱정되었던 이진한이 슬쩍 물었다.
하지만 프레이는 어림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괜찮아요. 성왕에 오를 때 전부 숙청해버려서 반대 목소리를 내는 이들은 남아있지 않아요. 대충 그 무소불위? 라고 생각하시면 될 거예요.”
“…그건 그것대로 또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뭐, 농담이고요. 명분은 충분해요. 용사의 동료니까. 그리고 슬슬 이쪽도 전력을 증강해야 하니 시련에 참여할 이들의 목록을 추리고 있었어요.”
“그런가. 그러면 괜찮고.”
웅웅─.
그들이 잡담을 나누고 있을 찰나 다시금 철문이 소리를 내며 열렸다.
두 번째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미르엘이었다.
“베르너 님!”
백금빛 머리카락을 질끈 묶은 그녀는 일레이나와 마찬가지로 이진한을 발견하자마자 땅을 박차며 달려왔다.
“안에서 얻은 게 많았나 보네.”
“예. 검술의 정의에 관해 다시 한 번 정립할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경지의 상승도 있었고요.”
소드 마스터 초입에 있던 경지가 어느덧 중급으로 진입해 있었다.
이전부터 봐왔지만, 정말 눈부신 성장세로 이 정도라면 일 년 내에 초월지경 직전에 다다르는 벽에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다음으로 나온 것은 이리아였다.
“…아.”
그녀는 앞의 둘과 달리 기진맥진한 상태로 거의 기다시피 밖으로 나왔다.
곧 문 앞에 있던 이진한을 발견하더니 울먹거리며 달려와 철퍼덕 쓰러졌다.
“힘들었어요….”
서 있을 기력도 없는 듯 옅은 호흡만을 반복한다. 이진한이 쓴웃음을 지을 찰나, 템페스트에 연결되어 있던 실피드가 흥미 어린 목소리로 말해왔다.
-재능이 개화했군요.
‘재능이 개화해?’
-예. 당신과 같이 다닌 덕인지 아니면 이곳의 시련을 겪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잠재력이 극한으로 끌어올려졌습니다. 조금 도움을 받으면 최상급 정령과도 계약이 가능하겠군요.
‘너는 어때.’
-정령왕과 계약하는 건 또 다른 이야기입니다. 정점인 상태에서 템페스트까지 주어진다면 모르겠지만요.
실피드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안 되는 것이 어디 있는가. 이미 머리 한구석에서 실피드와 이리아의 계약을 연결시킬 계획을 구상하고 있는 이진한이었다.
웅웅─.
마지막 차례가 도달했다.
철문이 천천히 열려 나갔고 모두의 시선이 그 안으로 집중되었다.
곧 밖으로 모습을 드러낼 엘레오노라를 기다렸지만, 얼마를 기다려도 그녀가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없었다.
“…설마 뭔가 잘못되었다는 건?”
“그럴리는 없어요. 정신 계열 종류의 시련이라 몸이 해를 입을 일은….”
그 말과 동시에 철문 너머 깊은 어둠 쪽에서부터 날카로운 섬격이 닥쳐왔다.
쐐애애액─!
누구도 예상치 못한 공격이었다.
그렇기에 다들 반응이 늦었을 때, 이진한만이 가볍게 손을 들어 올려 그것을 붙잡았다.
“이건.”
익숙한 낫 형태의 날.
그것에 두 눈을 크게 떴을 찰나, 철문에서부터 누군가 뛰쳐나와 힘껏 땅을 박찼다.
“컥.”
엘레오노라는 그대로 몸을 던져 그의 품에 돌진했다.
피한다면 그녀가 다칠 수도 있는 노릇이기에 이진한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받아주었다.
“…보고 싶었어요.”
엘레오노라는 그간 떨어져 있던 공백을 채우려는 듯 그의 품에 안겨 한껏 그 체취를 만끽했다.
“정말 꼴불견이네.”
“맞습니다. 아무리 엘레오노라 님이라 해도 이건.”
“으으….”
세 여인이 옆에서 한마디씩 거들자 엘레오노라는 이진한의 품에서 불쑥 고개를 들고는 씩 웃어주었다.
“부럽죠?”
그 말에는 반박할 수 없던 셋, 아니 네 명의 여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