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0.
밤이 깊은 가운데 이진한과 프레이가 마주했다.
며칠 전과 같은 모습이었지만, 분위기는 빛과 어둠처럼 극명하게 대비되었다.
“대략적인 이야기는 유리아에게 전해 들었어요. …사실 믿기 힘드네요. 검성을 필두로 한 오스칼 제국 쪽은 의심하고 있었지만, 설마 원탁까지 그들과 손을 잡았을 줄은….”
“원탁과 교류가 있었나?”
“당연하죠. 각국의 유력자들은 서로 커넥션이 있으니까요. 특히 원탁 쪽은 저도 성왕에 오르기 전후 모두 제안을 받은 적이 있어요.”
“하긴, 그렇겠군.”
이진한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프레이 역시 손꼽히는 강자였다. 원턱의 소속원이 되기에 그 자격은 차고 넘칠 터였다.
특히나 성왕에 오른 그녀를 타락시킨다면 성국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는 이야기였으니, 생각만 해도 끔찍할 따름이었다.
“유리아에게 이야기를 전달받은 즉시 대륙 의회에도 알렸습니다. 각국에 곧바로 수배가 들어갔죠. 이미 그쪽 세력은 압박받고 있고, 진상 규명이 끝나면 억류에 들어갈 거예요.”
“그런가.”
그쪽까지는 생각지 않은 분야였다.
그래도 프레이의 발 빠른 대처 덕분에 저들이 더 활개 치고 돌아다니는 걸 최소한 억제할 수 있게 되었다.
“의회 쪽은 어떻게 됐지?”
“사태 초기니 탁상공론 같은 이야기나 나돌 줄 알았는데, 제법 경각심을 지니고 있나 봐요. 제법 진지한 이야기가 여럿 오갔어요. 그리고 도중에 이쪽에도 오스칼 제국의 사절이 찾아왔죠.”
“그쪽에도?”
“네. 기본적인 골자는 패력, 다리우스 그 남자가 했던 것과 같아요. 제국이 약체화된 지금, 자신들을 공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왕국들과 관계를 중재해달라는 그런 이야기였어요.”
“흠.”
“국가와 국가 간의 전쟁이라면 어떻게든 이걸 최대한 이용했겠지만, 아무래도 상대가 상대이니까 다들 자중하는 모습이더군요.”
프레이는 품에서 양피지 묶음 하나를 꺼내 탁자 위에 펼쳤다.
대륙의 지형이 새겨진 지도로, 그녀의 손가락이 동대륙과 서대륙을 잇는 중심을 훑었다.
“마경(魔境). 그곳에 그랜드 라인을 설치하기로 했어요. 사실 말이 거창해서 그랜드 라인이지 각국에서 병력을 창출해 연합군을 창설한다는 거랑 같은 이야기에요.”
“성국도?”
“네. 마계와의 전쟁에서 저희는 빠질 수 없는 위치이니까요.”
프레이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어찌할 건지 시선으로 의중을 물었다.
“흠.”
이진한은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에 잠겼다.
지형적으로 생각해보자면 마경에 군을 주둔시키는 건 정석적인 선택이다. 오스칼 제국이 무너지면 가까운 마경 쪽으로 몰려들지 않으리라는 법도 없지 않은가.
“하지만 너무 단락 적인 판단이야.”
그는 한쪽 눈을 찡그리며 말했다.
이런 큰 사건의 흐름은 항상 쉽게 가지 않았다.
당장 현실이 아니라 ‘월드’의 이벤트만 보아도 플레이어의 뒤통수를 치는 전개가 흔하지 않았는가.
그 말에 프레이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른 곳에 게이트가 열릴 가능성이 있잖아.”
“…다른 곳에 말인가요?”
지적한 분은 애초에 상정하지 않은 사안인 듯했다.
“인식이란 것이 이래서 무서운 거야. 오스칼 제국에 게이트가 열렸으니 이제 그곳을 기점으로만 쏟아져 나올 거라고 생각하거든.”
“그래도 게이트를 여는 것이 그리 쉽게….”
“그래. 마계에서 중간계를 잇는 게이트를 여는 게 쉬운 일은 아니겠지. 그런데 저들이 다른 곳에 또 게이트를 열 준비를 하는 와중이라면?”
마경에만 병력을 집중해놓았는데 그 반대편에서 닥쳐온다면 어쩔 것이냐.
“그런 일이 발생할 걸 어떻게 단언할 수 있냐고? 그러면 오스칼 제국 수도에 마계를 잇는 게이트가 열릴 거라고 누가 알았겠어.”
어느 것 하나 확정 지을 수 없는 사안이니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아야 했다.
“…확실히. 다시 한번 신중히 재검토해서 고려해 보아야 할 사안이네요.”
프레이는 설득되었는지 굳은 표정으로 깊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현명한 그녀이니 의회에 알아서 잘 전달해 처리할 터.
이제 중요한 것은 자신의 거취를 정하는 일이었다.
“아, 그리고 제 이름으로 용사의 존재를 공인했습니다. 마계가 강림한 이상 어쩔 수 없었어요.”
“그래. 뭐, 알음알음 알려지던 이야기니까.”
“베르너 님께서 영웅 중 한 명인 《지혜》의 검은 현자인 건 밝히지 않으실 생각이신가요?”
“아.”
이진한은 깜빡했다는 듯 짤막한 소리를 내뱉었다.
“이미 알려졌어요. 저들한테.”
둘만 있던 공간에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프레이가 흠칫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설 찰나, 그 옆으로 천천히 내려앉는 한 소녀의 모습에 두 눈을 크게 떴다.
스르륵.
어둠 가운데 천사가 강림했다.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는 고귀함이었다.
“…아, 설마 이 아이가.”
“그래. 성검의 정령, 로네다.”
프레이는 주춤거리며 일어나 로네 앞에 섰다.
새하얗게 반짝이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바라보며 두 눈을 빛내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안아도 되나요?”
“거절하겠습니다.”
덥석.
프레이는 일말의 망설임 따위는 없다는 듯 로네를 품에 안았다.
신창 차이가 꽤 났기에 몸 안에 폭 들어오는 그런 모양새가 된다. 로네는 그 사이로 얼굴을 빼꼼 내밀며 불편하단 표정으로 이진한을 바라보았다.
“질문이 있습니다.”
“뭔데?”
“그새 인간의 언어 체계가 바뀌었습니까? 저는 분명 거절했는데….”
“그냥 좀 이상한 사람이야. 따뜻한 마음으로 이해해 줘.”
프레이는 한참이나 로네를 품에 안았다.
한참 뒤에야 그녀를 놓아주었고, 사뭇 감동하였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기록에 보관된 《안식》의 사제님과 얼굴이 똑같아요.”
“그녀를 토대로 형상화된 모양이더라고.”
“혼자 외로웠죠. 이제는 쓸쓸하게 내버려 두지 않을게요.”
“…계약자는 난데?”
“베르너 님이 저랑 계약 맺으시면 되겠네요. 그러면 로네도 자연스럽게 딸려 오는 건가. 적당히 혼인 계약은 어떠세요?”
“어처구니가 없네.”
이때를 노려 추파를 던져오는 그녀의 모습에 이진한이 웃음을 터트리자, 침상 위의 이불이 부스럭거리며 새카만 무언가가 머리를 빼꼼 내밀었다.
“아, 미안. 시끄러웠지.”
까망베르가 샛노란 눈동자로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이진한이 미안하다는 뜻으로 가볍게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갸르릉 소리를 내는 것을 끝으로 다시 이불 안쪽으로 머리를 파묻었다.
침묵 마법으로 공간을 격리한 그는 살짝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검성을 만나본 적이 있어?”
“네, 당연히. 무서운 자였죠. 그간 수많은 사람을 만나왔다고 자부할 수 있는데도, 그처럼 종잡을 수 없는 존재는 처음이었어요.”
프레이는 이제껏 인생을 살아오며 딱 세 번, 검성과 마주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세 번 모두 절대 잊지 못할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제일 첫 번째는 아직 성녀 후보일 때였다.
외모는 백발과 흰 수염이 성성한 노인이었지만, 그 어느 젊은 청년보다 폭발적인 기세를 내뿜고 있었다.
곁으로 가까이 다가간다면 마치 자신까지 타버릴 것 같은 뜨거움에 진저리를 치며 거리를 두었다.
두 번째 만남은 정식으로 성녀가 되었을 때였다.
모든 것을 태워버릴 것만 같던 불꽃은 어느덧 거센 폭풍이 되었다.
외모는 변함이 없었지만, 그 수라와 같은 위압감은 누구라도 막을 수 없어 보였다.
세 번째는 성왕이 되었을 때였다.
“그때는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어요. 분명 눈앞에 있었는데 일말의 기운조차 느껴지지 않았죠. 저도 역대 성녀 중 가장 재능이 뛰어나다고 평가받는데, 정말 자괴감이 들었어요.”
프레이는 쓴웃음을 지었다.
우호적인 관계에서 느끼는 압박감이 그러할진대, 적으로서 마주한다면 과연 제대로 서 있을 수나 있을까.
“나와 비교하자면 어떻지?”
“베르너 님과 비교하자면….”
그녀는 고개를 들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그래도 베르너 님이 더 강하시지 않겠어요? 검성이라고 해봤자 이제 막 영웅 반열에 든 나부랭이인데.”
“…글쎄.”
프레이가 보여준 절대적인 신뢰는 고마우나, 차마 자신이 밀린다는 사실을 이야기할 수 없던 이진한은 쓴웃음과 함께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래서, 이 이후에는 어떻게 할 생각이세요? 정하신 바가 없으시면 저와 함께 가셔도 되는데.”
프레이는 그 틈을 노려 매력적인 제안을 해왔다.
용사라는 이름이 있는 이상 가장 좋은 시너지를 보이는 것이 그녀일 터.
하지만 이진한 역시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다.
“그것도 제법 혹하긴 하지만, 오스칼 제국 쪽의 상황도 알아보고 싶네.”
“동대륙으로 넘어가시겠다는 건가요?”
“굳이 수도에까지 나아가겠다는 건 아니야. 어디까지나 상황 파악 선에서 움직이겠다는 것이지.”
“…음.”
프레이는 우려 섞인 표정을 지었다.
그가 강한 건 알지만, 마왕급 되는 존재 정도가 함정을 파고 기다린다면 정말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지금 상황 가운데 용사를 잃는다면 그것만큼 절망적인 상황이 없을 터.
“…사실, 신탁을 받았어요.”
“신탁을?”
그렇기에 그가 혹할 만한 키워드를 풀기로 했다.
“네. 베르너 님을 도와서 마계의 움직임을 저지하라고 말이죠.”
예상대로 이진한은 큰 관심을 보였다.
자세를 고쳐 앉은 그는 탁자에 턱을 괴며 한껏 진지해진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여신과 대화할 수 있나? 천년 전에는 직접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고 했는데.”
“아쉽게도 저는 불가능해요. 일방적으로 계시가 내려오는 편이죠.”
“그런가. 아쉽네.”
“…그리고.”
“그리고?”
신탁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마족과 더불어 이단 분자들의 난동을 막으라는 신탁도 함께 내려왔습니다.”
“…이단 분자?”
“네. 베르너 님을 비롯해 영웅분들께서 쓰러뜨린 악신의 사도들을 뜻하는 겁니다.”
이진한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이미 이해했지만, 처음 듣는 이야기인 듯 짐짓 모른 척을 했을 뿐이었다.
“그들은 마왕과 손을 잡고 자신들이 모시는 이단의 신을 부활시키기 위해 대륙 곳곳에서 암약하고 있는 듯해요. 날이 밝으면 성전(聖戰)을 선포하고 본격적으로 색출해내서 박멸에 들어갈 생각이에요.”
이단은 거목을 뿌리부터 좀 먹는 존재였다.
일전 이진한과 적대했던 흑십자단 역시 같은 맥락으로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런가.”
이진한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여신이 정말로 정의 편인가.
고대 신의 사도들은 자신을 이용하려 하는가.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지, 누굴 선택해야 옳은 것인지 여기까지 와도 도무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마음 같아선 툭 터놓고 이야기하고 싶지만….’
아무리 개방적인 사고를 지닌 그녀라 할지라도 성왕이란 감투를 쓰고 있는 이상 여신에 대한 신앙이 절대적으로 작용하고 있을 터였다.
“…베르너 님?”
그가 입을 닫은 채 한참이나 침묵하고 있자, 이상히 여긴 프레이가 조심스럽게 불러왔다.
“아니야. 잠깐 좀 생각할 게 있어서.”
누구를 믿어야 할지 알 수 없는 혼란한 상황 가운데, 이진한은 짤막하게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