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9.
다리우스를 필두로 한 원탁이 제자리에서 한 줄기 연기가 되어 홀연히 사라졌다.
홀로 남게 된 이진한은 지친 표정을 지은 채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고개를 들었다.
파스스─.
이 주위를 감싸던 장막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하늘이 조각 조각나고 그 너머로 보이는 풍경이 추상화처럼 변했을 때, 이진한은 긴장을 풀며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부러지는 줄 알았네.”
그는 가볍게 어깨를 돌리며 긴 한숨을 토해냈다.
원탁과의 싸움은 제법 잘 헤쳐나갔다고 할 수 있었다.
객관적으로 봐도 싸움의 양상은 자신이 우위였으며, 초월지경의 강자 여섯과 자웅을 겨뤄 압도했다는 것은 그간의 수련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뜻했다.
“…문제는.”
검성(劍聖).
오늘 이 싸움은 그 두 글자를 확실하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자신보다 강한 존재는 마왕이나 반신 같은 초월적인 부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방금 검을 맞댐으로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지금 내 수준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못 이긴다.’
근성이나 악을 쓰는 문제 정도가 아니었다.
이제까지 발버둥 치며 성장해온 것이 허탈할 정도의 강함이었다.
만일 제자인 다리우스의 몸이 아니라 검성 본인이 직접 와서 검을 휘둘렀다면 첫 일격조차 막아내지 못하고 떨어져 나갔을 터.
“첩첩산중이네.”
이 세계에 왔을 초기와 비교하자면 족히 몇 배는 강해졌을 것이다.
지금의 자신이 그때와 싸운다면 10초 안에 순살할 자신이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검성이란 존재의 강함이 더욱 날 서리게 다가왔다.
“차라리 다 하향평준화 된 상태였더라면 좋았을 텐데.”
이미 그랬지만, 이 앞은 미지의 영역이었기에 그저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츠즈즈즈─,
장막이 완전히 부서져 내리자 외부의 풍경이 드러났다.
원래는 성궁의 새하얀 기둥들이 받치고 있을 건물 안쪽이었으나, 싸움의 여파에 휘말린 것인지 적지 않은 구역까지 무너져 있다.
그 뒤로는 팔라딘과 사제들이 원형으로 포위망을 짠 채 잔뜩 경계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윽.”
선두에 있던 팔라딘이 신음을 토해내며 신성력을 더욱 끌어올렸다.
왜 그런가 싶어 고개를 돌리자, 장막이 부서짐으로써 그간의 싸움으로 돌출된 마기가 사방으로 풀려난 것을 볼 수 있었다.
“막아!”
“가호를 좀 더 촘촘하게 둘러라!”
초월지경의 강자들이 뿜어낸 마기다.
그 여파만으로도 목숨을 앗아가기 충분했기에 그들은 잔뜩 경각심을 지닌 표정으로 뿜어져 나오는 마기를 정화했다.
쿵.
그 가운데 이진한은 가볍게 발을 굴렀다.
용사 클래스 초월 스킬 「신성의 증명」
필드 전체가 신성으로 뒤덮이며 은은한 빛을 내뿜자 자욱했던 마기는 순식간에 정화되어 사라져갔다.
휘말린 이가 없는 것을 확인한 그는 툭툭 먼지를 털며 몸을 일으키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유리아를 바라보았다.
“베르너 님, 괜찮으십니까.”
“대충은. 그보다 밖의 피해는 어때?”
“베르너 님이 경고해주신 덕분에 미리 피난시킬 수 있었습니다. 건물이 조금 무너진 것을 빼곤 전무합니다. 그나저나 적은….”
“물러났다. 설마 이쪽까지 당당히 들어와 일을 벌일 줄은 꿈에도 몰랐어.”
이진한이 한 방 먹었다며 쓴웃음을 짓자, 유리아가 떨리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다면 저들 모두 마족과 손을 잡은 겁니까?”
“그래. 검성 요하넬과 그 제자인 다리우스를 포함한 오스칼 제국의 상층부 전체가 저쪽에 넘어갔다고 봐야겠지. 그리고 원탁 역시 마찬가지고.”
「발푸르기스의 마녀」 레이첼 프라하리슈
「무광(無光)」 칼슈아 리히테나워
대수림의 엘프 가니온
「불가사리」 조니악
반신의 후예 에우리스테우스
한 명 한 명의 이름이 일국을 호령하는 강자였다.
유리아는 그들마저 인간임을 버리고 마족과 손을 잡았다는 사실에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아, 원탁이라 해도 전부는 아닌 것 같아. 나찰의 나탈리도 마찬가지고. 그녀랑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거든. 그리고 조니악도 방금 내 손에 죽었다.”
드래곤인 그녀가 마족과 손을 잡을 리가 없지 않은가.
짧게 한숨을 토해낸 이진한은 포위망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녀들은 아직?”
“예. 아마 하루 이틀은 더 걸릴 것 같습니다.”
“그런가.”
성국에 있는 시련의 종류가 무엇이기에 이리 시간이 걸리는 것일까.
그런 만큼 부디 제대로 된 성취가 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럼 뒤처리는 맡기마. 나는 조금 쉬어야겠다.”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싸우려면 더 싸울 수 있겠지만, 새로이 나타난 검성이라는 거대한 적 때문에 정신적으로 피로해진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편히 쉬시길.”
유리아의 인사를 끝으로 그는 자신의 숙소로 되돌아갔다.
***
이진한이 다시 눈을 뜬 것은 그로부터 약 10시간 후, 해가 전부 떨어진 깊은 밤중이었다.
【947:52:24】
장막 안쪽에서의 싸움은 체감상으로 한시간 남짓한 정도였지만, 막상 밖에 나오니 하루가 넘게 지나 있었다.
아마 장막이라는 공간의 왜곡 때문에 시간의 흐름이 뒤틀렸던 것일 터.
이진한은 침상에서 몸을 일으킨 뒤 복잡한 머리를 거칠게 헤집었다.
“여기서 뭘 더 할 수 있지?”
몸은 누워있지만, 정신은 끊임없이 사고를 되풀이했다.
초월지경의 클래스 세 개에 도달하고, 고대 악마, 그리고 바람의 정령왕과 계약했으며 성검까지 다시 손에 넣었다.
지닌 능력의 활용도는 극한에 다다랐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도원경에서 그리 피 튀기는 나날을 보내지 않았던가.
그 결과가 원탁과의 싸움에서 압도적으로 우위를 차지했다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턱 없이 부족해.’
그렇기에 곰곰이 궁리한 결과, 이진한은 세 가지 해결책을 내놓을 수 있었다.
첫 번째는 《영원》의 마법을 제대로 익히는 것이었다.
「삼라만상」의 대략적인 묘리는 머리로 이해하고 있다.
집중적으로 시간을 투자하자면 빠르게 경지를 올릴 수 있을 터.
하지만 설사 그런다고 하여도 제대로 된 활용을 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영원》의 마법은 《영원》이 다뤘기에 강력했던 것. 솔직히 그녀만큼 감각적으로 펼칠 수 있을지에 대한 자신은 없었다.
두 번째는 다른 클래스의 초월지경을 이루는 것이었다.
대현자, 대마도사, 용사를 이룬 이후 다른 클래스는 감감 무소식이었다.
분명 상태창에서 보이는 정보는 각 클래스의 숙련도 수치가 전부 MAX에 도달했다.
하지만 무언가 특별한 요소나 계기가 필요한 것인지 몇 번의 격전을 넘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아무런 낌세 조차 보이지 않았을 따름이었다.
“하다못해 그랜드 소드 마스터만 되도 좋을 텐데.”
「무신」 스킬로 대체할 수 있다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일시적으로 대현자나 다른 클래스의 스킬을 쓰지 못하게 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원탁과의 싸움에서도 뼈저리게 느끼지 않았던가.
대현자의 상태로 싸운다면 조금 더 손쉽고 효율적으로 그들을 상대했을 수 있었을 터.
세 번째는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방향성을 가늠할 수 없는 방법이었다.
‘신성력과 마기의 조화.’
검호를 쓰러뜨렸을 당시 악마화와 신성력이 서로 균형을 이루며 막대한 시너지를 내뿜어냈다.
그때처럼 둘을 조화롭게 다룰 수 있다면 지금보다 몇 배는 더 되는 힘을 보일 수 있으리라 생각되었다.
문제는 현재 두 힘의 총량이 대폭 증가했다는 것. 그때는 바포메트와 계약한 지 얼마 안 된 이후라 숙련도도 낮았고, 제대로 그 힘을 다루지도 못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고대 신의 잔재로 막대한 힘을 흡수했고, 마인을 비롯해 숱한 적들을 쓰러뜨리며 마기를 흡수해 각성의 직전까지 왔다.
신성력 또한 마찬가지였다.
여기는 초월지경에 도달해 용사 클래스가 되었으며, 성검까지 획득해 그 힘이 몇십 배는 더 증가했다.
과연 폭발적으로 늘어난 그 총량의 통제를 자신이 할 수 있을 지가 의문….
“그 문제라면 제가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어?”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이진한이 고개를 들자 새하얀 빛무리가 허공에 모여들며 로네가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네가 도와줄 수 있다고?”
“네. 지금은 성검과의 링크가 완벽하게 끝났습니다. 아까 싸울 때는 연결 자체가 불완전해서 조금밖에 가세하지 못했지만, 전투 직후에는 링크가 완성되어 흐름 제어에 개입하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이진한은 두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애초에 그녀를 데려오려 했던 것도 대현자와 결합해 보조를 받으려던 목적이 아니었는가.
‘이러면 오히려 좋은데.’
이미 잠기운은 싹 달아났다.
내친김에 실험해보기 위해 「삼라만상」으로 방안의 공간을 뒤덮어 장악했다.
이 구역을 격리된 단층으로 만들고, 내부의 기운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꼼꼼히 틀어막았다.
이렇게 한다면 어지간하게 민감하지 않은 이상 밖에서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리라.
파바밧!
그의 의지에 따라 내부의 풍경이 순식간에 뒤바뀐다. 곧 광활한 공터가 눈앞에 펼쳐졌고, 한 줄기 바람이 살랑이며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후우.”
짧게 한숨을 내쉰 이진한은 가볍게 스트레칭을 해준 뒤 두 자루의 검을 뽑아들었다.
성검 아스칼론
마검 그라나다
서로 검에 있어서 최상급이라 불리는 무구들이었다.
극렬하게 반대되는 기운이 줄기줄기 뿜어져 나오며 천천히 그의 몸을 뒤덮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대천사의 가호를 몸에 두르고, 그라나다를 쥐어 올렸다.
파각.
하지만 균형이 무너져 실패하고 말았다.
부서진 신성력과 마기의 파편이 주위에 흩날렸지만, 이진한은 개의치 않은 표정으로 실험을 계속해서 이어나갔다.
악마화한 뒤 성검의 활성화, 몸을 상하, 좌우로 나눠 신성력과 마기의 정확한 밸런스를 유지, 제로부터 MAX까지 출력을 높혀가는 매칭.
할 수 있는 방법은 모조리 사용했다고 봐도 무방이 아니었다.
그렇게 수십 번가량 실패한 끝에, 그는 겨우 최소한이나마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조합을 찾아냈다.
츠즈즈즈─.
대천사의 가호가 몸을 감싸고, 악마화의 마기를 등 뒤로 내뿜었다.
그것이 마치 한쌍의 날개가 피어난 것처럼 선명한 모습을 보이며 허공에서 펄럭거렸다.
“조금 기괴한 모습이긴 한데….”
신성의 안정성과 마기의 폭발력이 서로 가미되어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이 정도만 해도 평상시보다 몇 배는 더 파괴력을 보일 수 있기에 유지만 할 수 있다면 더 없이 최상인 듯했다.
물론 출력을 더 올린다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은 이것이 최선이었다.
“아예 합쳐지는 건 안 되나? 신성력과 마기가 말이야.”
흑과 백이 합쳐지면 중립이라는 건 흔한 클리셰였다.
하지만 로네는 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그의 이론을 부정했다.
“안 됩니다. 설령 된다고 할지라도 중화제가 필요로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쪽의 피해만 누적될 뿐입니다.”
“중화제라. 적당한 걸 찾아봐야겠네.”
신성력과 마기의 융화.
제법 그럴듯한 소재이기에 흥미를 느꼈을 찰나, 가볍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아악─!
신성력과 마기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삼라만상」의 힘을 거두어들여 다시 원래의 공간으로 되돌린 이진한은 매무세를 점검한 뒤 방문을 열었다.
“…베르너 님.”
성왕 프레이.
마계의 침공을 대비해 리베라 제국으로 회의를 하러 갔던 그녀가 돌아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