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8.
이진한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제껏 이야기를 나누던 저들과는 사뭇 다른 목소리였다.
또 누군가 나타난 것인가.
적의 지원일까 싶어 가늘게 뜬 눈으로 주위를 살폈지만, 이상하게도 새로 느껴지는 기척은 없었다.
“스, 스승님…!”
다리우스가 당황한 표정으로 제 뺨을 매만졌다.
왜 그런가 싶어 바라보자니 그 위로 새로운 입이 생겨나 입술을 오물거리고 있었다.
“용사라. 흥미 깊은 이름이긴 하지만 역대 용사 중 그 누구도 자네와 같은 존재감을 발휘하지 못했지. 설령 그것이 진정으로 각성한 이라 해도 말이네.”
깊은 울림이 담겨 있는 목소리였다.
한 번도 마주한 적이 없는 존재였지만, 이진한은 자연스럽게 그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검성 요하넬.”
“그래. 노부를 알고 있다니 이야기가 빠르겠군.”
얼굴을 매만지던 다리우스의 손이 점차 내려갔다.
뺨에 있던 입은 점차 옆으로 옮겨가더니 이내 원래 있던 입과 합쳐지며 마치 한 겹의 입술이 더 자라난 듯한 모습을 보였다.
“고대의 망령이 어째서 천여 년이 더 지난 이 시대에 돌아다니고 있는 것이지?”
“….”
제자의 몸을 빼앗은 듯 그 눈동자가 섬뜩한 빛을 내뿜었다.
눈빛만으로 사람을 죽일 기세다. 하지만 이진한이 걸리는 건 검성이 내뱉은 말 쪽이었다.
“검성은 상상력이 풍부하군.”
“모르는 척하지 않아도 괜찮네. 이미 확신을 지니고 말하는 것이니.”
“…쯧.”
이진한은 머리를 긁적였다.
한껏 시치미를 뗄 생각이었으나, 옅은 미소까지 지어오는 것을 보아하니 이쪽에서 어떻게 대답하든 이미 기정사실을 삼은 것 같았다.
사실 이젠 고대 영웅이든 그 계승자든 밝혀지는 것이 그리 상관없어지는 형국이었다.
이터널 학파의 마탑주, 베르하임 왕국의 국왕, 신성 왕국의 성왕, 그리고 드래곤들까지.
자신의 존재를 입증해줄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더불어 마계의 침공이 시작된 지금 이쪽의 이름이 알려지는 건 바라는 바였다.
“…검은 현자? 그 본인이라고?”
“무슨….”
오히려 당황한 것은 원탁 쪽이었다.
그들은 애초에 천여 년 전 악신을 쓰러뜨리고 멸망의 위기로부터 세상을 구원한 영웅들의 유지를 받들어 생긴 조직이었다.
하지만 정작 지금 자신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각자 원하는 것을 위해,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천여 년간 이어져 내려온 신념을 악마에게 팔아넘긴 상태였다.
“….”
칼슈아는 멍하니 자신의 얼굴을 부여잡았다.
그는 빛을 잃은 대신 다른 감각이 극도로 발달 되어있어 딱히 불편한 것이 없었다.
그럼에도 ‘눈을 뜨고 앞을 본다’라는 행위는 리히테나워 혈계의 염원과도 같은 것이었다.
단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것이었기에 오히려 그 열망은 쉽게 전염되었다.
하지만 유구한 역사가 증명하듯 그 어떤 방법을 사용해도 해결책이 없던 와중 자신에게 찾아온 다리우스의 말에 혹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무슨 말을 해도 변명일 뿐이지.’
불꽃같이 샘솟던 전의가 사그라들었다.
뒤늦은 후회와 체념, 리히테나워의 이름과 영웅들의 신념을 이어오던 역사를 더럽혔다는 죄책감만이 마음을 가득 채웠다.
“….”
레이첼 역시 입술을 씹었다.
자신에게 있어 그 이름은 신이자 우상이었고, 인생 전부를 바쳐서라도 따라가고 싶은 이상향이었다.
그렇기에 동경하던 《영원》을 뒤쫓기 위해 인간임을 포기했다.
하지만 되돌아온 것은 동경하던 영웅의 적대감 어린 시선뿐이었다.
“….”
오직 동족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존재를 포기한 가니온만이 담담한 눈빛으로 이진한을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물러나라.”
원탁의 전의가 꺾인 것을 확인한 검성은 가볍게 손을 내저음으로 그들을 뒤로 물렸다.
다리우스의 몸은 이미 그의 지배하에 들어간 지 오래.
전신에 스멀스멀 피어오르던 마기는 어느덧 검으로 응축되어 미증유의 기세를 내뿜고 있었다.
‘힘의 총량은 같다. 아무리 안쪽의 사람이 바뀌었다지만….’
검성 본인이 모종의 술법으로 제자의 몸을 움직이는 것일 터.
낌새를 보아하니 한바탕 붙어보려는 것이 틀림없었다.
스윽─.
잘하면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릴 수 있을 것 같기에 슬쩍 몸을 낮추자, 검성은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언제적 영웅인가. 고리타분한 이름일 뿐인데. 아직도 과거에 고취되어 있는가.”
“나, 꽤 오래 잠들어 있어서 아직 현역이거든.”
“세상은 이제 영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용사 역시 마찬가지이지. 그러니 이곳에서 사라지게나.”
쿵.
작은 파열음과 함께 둘의 신형이 동시에 사라졌다.
이진한은 이전까지 원탁과의 싸움에 진심이었지만, 정말로 전력을 다하진 않았다.
상대가 어떤 수를 써올지 모르는 상황에 지닌 패를 전부 꺼내는 건 멍청한 짓이 아닌가.
하지만 검성의 등장에는 가감 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펼쳐내었다.
파바바박!
달려 나가던 중 화살을 쏘아낸 뒤 수십 가지의 마법 영창을 끝내고 다시 성검을 쥐었다.
대현자 클래스의 초월 스킬인 「무신」이 다시 빛을 발했다.
숙련도의 증가로 유지 시간이 대폭 늘어난 무신은 그의 클래스를 그랜드 소드 마스터로 바꾸며 일격 필살의 공격을 가했다.
“검은 현자라. 모든 분야에 통달했다지? 하지만 그것으로는 노부를 상대하기에 부족하다네.”
“과연 그럴….”
검성의 말에 이죽거리며 대답하던 이진한의 두 눈이 점차 커졌다.
쿠구구궁─.
아직 검이 전부 휘둘러진 것도 아닌데 막대한 압력이 천지를 짓눌렀다.
마왕 마르바스나 악마 바포메트 같은 초월적인 강함을 지닌 존재들 앞에서만 느껴보았던 숨 막힐 듯한 압박감.
과연 검성(劍聖)이라 불릴 정도의 검사인 듯싶었다.
핏─!
인식의 틈 사이, 그보다 조금 더 빠른 속도로 검이 휘둘러졌다.
이진한이 할 수 있었던 것은 본능적으로 몸을 비틀며 아스칼론에 의지한 채 그 공격을 빗겨내는 것뿐이었다.
쿵.
절로 한쪽 무릎이 꿇려지며 막대한 힘이 그 위를 짓눌렀다.
일순간 의식이 아득해지며 시야가 암전되었을 정도로 까마득한 위력. 빛이 되돌아오자 입과 코에 흥건한 피가 터져 나왔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런 씹.”
산 넘어 산이라니.
어찌 인간의 몸으로 이리 강할 수 있을까.
마경에서 벨라시온의 브레스를 직격당했을 때도 이런 충격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구부러져 땅에 닿은 무릎은 이미 박살 난 지 오래. 황급히 클래스를 대현자로 바꾸자 용사 클래스의 초월 스킬인 「불굴」이 손상된 신체를 수복해나갔다.
“흠. 이 정도는 어찌저찌 막아내는가.”
“…!”
움직일 수 있을 최소한으로 회복이 되자 이진한은 곧바로 땅을 박차고 달려나갔다.
마찬가지로 빛살 같은 섬격. 농밀한 신성력이 휘감은 아스칼론이 그의 몸을 일도양단하려 했지만, 검성은 그 필살의 공격을 가볍게 튕겨 내었다.
퉁.
청아한 공명음이었다.
다리우스나 칼슈아라면 떨쳐내는 데 꽤 고생했을 그 일격이 너무나도 손쉽게 무력화되며 치명적인 허점이 드러났다.
“다소 실망스럽구나. 경지는 높으나 제힘에 취해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상태라니. 영웅이라는 이름이 아깝군. 《정의》였다면 좋은 싸움이 되었을 텐데.”
“깝치지 마!”
자신을 무시하는 그 소리에 눈이 뒤집힌 이진한은 아스칼론을 내던졌다.
상성으로 우위를 선점하는 시기는 지났다.
이제부터는 서로 총력을 쏟아부어야 하는 화력전. 그의 손이 허공을 움켜쥐자 마검이 솟구치며 응축된 마기를 내뿜어냈다.
“고대 악마와 계약을 했다지. 메피스토 공이 자네의 욕을 얼마나 해대는지,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네.”
슈우우욱─.
검성은 가볍게 검을 끌어당겼다.
단지 그것뿐이거늘, 세상의 모든 흐름이 그를 중심으로 집약되며 마치 폭풍의 전조를 알려오듯 심상치 않은 기세를 내뿜기 시작했다.
“천뢰(天雷).”
“백야극광(白夜極光)-!”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벼락과 세상을 하얗게 뒤덮은 빛이 서로 충돌한다. 우스운 것은 둘 다 심연보다 더 깊은 마기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파각!
몸을 뒤덮은 가호가 깨어져 나갔다.
변명할 여지도 없이 자신이 밀렸다는 그 사실에 이진한은 두 눈을 부릅뜨며 악마화를 활성화했다.
“흐음. 재미난 광경이로군. 마인화까지 할 수 있는 것인가.”
흥미롭다는 시선을 보낸 검성은 마기로 뒤덮이기 시작한 이진한을 바라보더니 검 위로 더욱더 강한 힘을 실었다.
천뢰라는 이름답게 그의 검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찍는 형태. 이진한은 그 밑에서 역천을 행하며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쿵.
하지만 점차 가중되기 시작한 무게에 그들이 딛고 선 대지 위로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자잘한 부스러기들이 튀어 오르고 실금이 퍼져나가며 지반이 무너져 내린다. 원탁의 멤버들은 그 충돌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더욱 더 뒤로 물러났을 뿐이었다.
쿠구구궁─!
이윽고 눈부신 폭발이 터져 올랐다.
곧이어 짙은 마기가 그 빛을 휘감아 완전히 집어삼켰고, 제자리에 남은 것은 황폐해진 대지 가운데 우뚝 서 있던 둘 뿐이었다.
“….”
이진한은 비틀거리며 잘게 떨리는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악마화로 몸을 보호했음에도 불구하고 막대한 충격이 전신을 휩쓸었다.
검을 쥐고 있던 오른팔은 형태도 남기지 않은 채 찢겨 나갔고, 반신은 걸레를 쥐어짜듯 비틀린 채 흥건한 피로 뒤덮여 있다.
“흠.”
물론 검성 역시 온전하진 않았다.
그는 두 손이 모두 짓이겨져 검을 쥐는 것조차 불가능해진 상태.
마기가 꿈틀거리며 무너진 신체를 수복하려 했지만, 그것조차 불가능한지 계속해서 형태를 잃고 무너져 내릴 뿐이었다.
“제자의 나약한 몸으로는 이것이 한계인가.”
“…왜 직접 오지 않았지?”
이진한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검성 본인이 직접 이 자리에 나왔다면 자신은 좀 더 큰 피해를 입었을 터.
물론 순순히 당해줄 생각은 없었다.
아직 자신에게는 바포메트의 「강림」이라는 비장의 패가 남아 있었으니.
“어쩔 수 없네. 내가, 우리가 싸우는 건 자네 하나만이 아니거든.”
검성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떨궜다.
“나 하나만이 아니라고?”
“그렇네. 너무 자의식 과잉이군. 이 세상을 지키는 것이 자네 혼자 뿐일 것 같은가?”
“허.”
이진한은 조소를 토해내면서도 맹렬하게 머리를 굴렸다.
저 말의 진위는 모르겠으나, 정말로 검성 정도가 견제해야 할 세력이 존재한다면 필히 손을 잡아야 했다.
제자의 몸을 빌려 싸우는 것만으로도 이 정도의 파괴력인데 그 본인이 직접 닥쳐온다면 필패는 확정이었다.
‘나도 아직 멀었구나.’
용사와 악마의 힘을 동시에 다룰 수 있었다면 조금은 더 다른 결과를 도출해낼 수 있었을까.
“그럼 인사는 충분히 했으니 나중에 보세. 노부가 조만간 다시 찾아가지.”
“…됐어. 이번엔 내 쪽에서 가주마.”
이진한은 두 눈을 부릅뜬 채 그 말을 맞받아쳤다.
검성은 한치의 밀림도 없는 그 모습에 쓴웃음을 짓고는 두 눈에 서늘한 빛을 뿜어내며 화답해주었다.
“지금은 천 년 전과 다른 세상이다. 네놈들의 그 알량한 힘이 다시 통용되리라 생각하는 건 오만한 생각이야.”
그 말을 끝으로 검성의 신형이 허물어졌다.
다시 의식을 되찾았는지 다리우스는 몇 번이고 구역질을 통해 피를 게워내고는 창백해진 안색으로 몸을 일으켰다.
“…돌아간다.”
“….”
그의 말에 다른 원탁 멤버 역시 뒤를 따랐다.
“오늘은 그냥 보내준다. 그러니까 네 그 잘난 스승에게 전해.”
이진한은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만나게 되면 반드시 죽여줄 테니까 유서 써놓고 기다리라고.”
슬쩍 뒤를 바라본 다리우스는 그의 검은 눈동자에서 피어오르는 서슬 퍼런 분노에 손끝을 움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