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7.
웅웅─.
성검 아스칼론이 깊은 울음을 토해냈다.
눈앞에 있는 적들을 모조리 절멸시키고 말겠다는 선명한 의지를 뿜어내는 것이었다.
“성검이라더니, 날카로움은 마검 못지않은데.”
마기에 휩싸인 다리우스가 씩 웃으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원탁의 멤버 역시 흉흉한 기세를 풍겨 올리며 적의를 드러냈다.
순수한 실력으로 초월지경에 오른 강자들이 마인화까지 이루었다.
이제껏 싸웠던 적들과는 결이 다른 강함을 지니고 있을 것이 분명하기에 이진한은 호흡을 줄이며 몸의 긴장감을 높였다.
‘마르딘 영지에서 검호와 싸울 때처럼 신성력과 마기를 양립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때는 경황이 없어서 어떻게 한 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더불어 전체적인 총량이 강해진 지금, 치열한 전투 와중에 그 균형을 유지할 수 있을지는 자신이라도 장담할 수 없었다.
하다못해 며칠 정도 시간이 있었다면 모르겠지만, 빌어먹을 이 세계는 항상 이런 식으로 사람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너만 믿는다.”
아스칼론이 주인의 말에 화답하듯 더 강한 빛을 뿜어냈다.
이윽고 전위 역을 맡은 다리우스와 칼슈아가 지척에 이르렀을 때, 서로 마주 보고 있던 그 셋의 신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콰아아앙─!
지축을 울리는 광음과 함께 대지 위로 길쭉한 상흔이 새겨졌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초고속 공방.
이전까지의 싸움은 장난이었다는 듯 치열하게 서로의 목을 물어뜯었다.
“쯧.”
찰나 수십 번에 달하는 참격을 쳐낸 이진한은 가볍게 혀를 찼다.
상대가 한 명이었더라면 다른 클래스의 스킬을 접목해 연환계를 펼쳤겠지만, 다리우스와 칼슈아는 서로의 부족함을 보완해주며 거의 한 몸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더불어 모래 먼지에 몸을 숨긴 채 사각을 노려오는 조니악의 살기는 코앞을 맴도는 날파리처럼 거슬리기 짝이 없었다.
‘문제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몸을 추스르고 있는 에우리스테우스와 모종의 마법을 준비하고 있는 레이첼, 그리고 다시금 마정령의 소환 준비를 끝낸 가니온까지.
애초에 저런 클래스 계열은 무언가 준비할 시간을 주지 않은 채 순살하는 것이 정석이었다.
하지만 전위가 끈덕지게 발목을 붙잡고 있는 와중 저들에게 접근하는 것부터가 고역인 일이었다.
서걱.
어깨 부근의 가드가 기다랗게 잘려 나갔다.
조금만 깊었으면 팔이 통째로 날아갈 수 있었던 위험한 상황.
재생하는 거야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그 공백 동안 더 위험한 위기에 몰릴 수 있었다.
그렇기에 먼저 숨겨둔 수를 선보인 것은 이진한 쪽이었다.
“흡-!”
성검 아스칼론을 위시한 그의 전신에서 찬란한 신성력이 피어올랐다.
일순간 그 목을 노리던 다리우스와 칼슈아가 멈칫했을 정도로 강렬한 빛.
그들이 다시 시야를 되찾았을 때, 이진한 뒤에 떠 오른 기도하는 천사들을 볼 수 있었다.
용사 클래스 초월 스킬 「세릴다의 성가대」
아아─!
기묘한 공명음과 함께 천사들의 입에서 날카로운 열선이 쏘아졌다.
그들이 훌쩍 물러나자 직격당한 지반이 녹아내리며 시뻘건 용암으로 변해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별 이상한 기술을 쓰는군.”
바로 직전 그 궤적에 휘말릴 뻔한 조니악이 이마에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몰아넣었다는 증거일세.”
“맞습니다. 궁지에 몰릴수록 잡기에 의존하는 법이지요.”
칼슈아는 섬뜩한 눈빛을 번뜩이며 이진한을 노려보았다.
개안까지 한 상황에서 이토록 승기를 잡기 힘들 줄은 몰랐다.
마인이 된 지금 검으로는 자신의 상대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새삼 또 다른 벽이 눈앞을 막아 가슴이 먹먹해졌다.
‘하지만.’
이걸 뛰어넘음으로 자신은 보다 완벽해질 터.
강함에 대한 동경과 집착은 리히테나워 가문의 숙명이자 저주였다.
쿵.
뒤쪽으로 작은 울림이 터져 나왔다.
자신들의 준비가 끝났다는 약속된 알림. 세 인영은 서로 고개를 끄덕인 채 재차 쏘아지는 열선을 피해낸 뒤 짠 것처럼 앞을 향해 쇄도했다.
‘온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이진한은 이제 여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제껏 발목을 붙들어 놓는 식으로 싸워오던 이들이 저렇게 저돌적으로 달려든다는 건 저쪽의 노림수가 완성되었다는 소리였다.
쿠구구궁─!
거센 마력의 파장과 함께 하늘 위로 새로운 태양이 떠올랐다.
조금 전 그에게 압도적인 우위로 막혀 버린 「진홍의 보옥」이었다.
“안 통한다니까.”
쿵.
이진한이 발을 들어 크게 바닥을 내려찍자 복잡한 술식이 땅에 서린다. 동시에 척박했던 대지에 수풀이 자라나며 커다란 고목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일전 마경에서 벨라시온이 진홍의 보옥을 막아냈던 초월 마법을 카피해 분석한 것이었다.
“…이건.”
왕성하게 피어난 세계수가 떨어져 내리는 태양을 지탱해냈다.
생전 처음 보는 미지의 마법에 레이첼의 두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목(木)과 화(火)의 상성을 생각해본다면 말도 되지 않는 일이지 않은가.
“놀랍지? 나도 처음엔 그랬어.”
툭, 쐐애액─!
왼손으로 용아청성창을 집어 든 그는 기습적으로 적잖은 힘을 담아 그녀에게로 쏘아 보냈다.
아차 한 레이첼이 황급히 방어 마법을 펼쳤지만, 용의 형상을 한 그 섬전과도 같은 궤적이 베리어를 갈가리 찢으며 닥쳐갔다.
“흡!”
그사이에 난입한 에우리스테우스가 용아청성창의 자루를 붙잡았다.
신속에 가까운 그 속도 가운데 정확히 자루를 붙잡은 것도 놀라울 지경인데, 완력만으로 그 속도를 늦추며 점차 기세를 죽여갔다.
파지지직─!
물론 아무리 반신의 핏줄을 이었다고 해서 그 공격에서 무사할 수는 없었다.
용아청성창의 자루를 붙잡은 두 손이 뇌전에 불타 시커멓게 익어버렸다.
툭 건드리면 가루로 변해 스러질 것처럼 균열이 일었고, 완전히 창을 멈춰 세운 에우리스테우스는 그 여파로 인해 비틀거리며 무릎을 꿇은 채 다시금 피를 토해냈다.
“쯧.”
이진한은 혀를 차며 아쉬움을 표했다.
이 한수로 적어도 치명적인 상처는 입히고 싶었거늘. 아까의 회복력으로 보자면 에우리스테우스는 금세 자리를 털고 일어나지 않을까 싶었다.
쐐애액!
그 빈틈을 노린 칼슈아가 어느새 사각을 노려왔다.
무광의 섬격이 허공을 날카롭게 베어 가른다. 이진한은 힘껏 허리를 눕히는 것으로 아슬아슬하게 그것을 피해냈고, 허릿심으로 몸을 회전시키며 왼손을 내질렀다.
쿵─!
검신으로 그것을 막아낸 칼슈아의 옆구리와 팔 사이로 한 자루의 검이 삐죽 찔러졌다.
그 흔한 오러나 마나조차 둘리지 않은 공격이었지만, 아까 전 자신의 가호와 방어를 관통당한 경험이 있었기에 이를 악물며 그것을 피해냈다.
“무르다.”
그 뒤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다리우스가 닥쳐왔다.
이번 한 수로 그를 쓰러뜨리려고 작정했는지 세찬 마기가 휘몰아치며 대지를 반으로 베어 갈랐다.
마스터 어쌔신 스킬 「그림자 순신」
도무지 피할 수 없는 상황이기에 스킬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림자에서 빠져나온 직후 귓가를 스치는 음성에 이진한은 몸을 흠칫 떨었다.
“이 조니악 앞에서 어쌔신의 스킬을 쓰다니, 배짱도 두둑하군.”
마치 어디로 나오는지 훤히 읽고 있었다는 것처럼 날카로운 검을 뻗어 왔다.
어깨를 꿰뚫는 그 화끈한 감촉에 당황으로 물들어 있던 이진한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서늘하게 바뀌었다.
‘…이런 씹!’
자신을 몰아넣던 강적에게 한 방 먹였다는 희열로 뒤덮인 조니악의 두 눈이 일순간 흔들렸다.
설마 궁지에 몰려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림자 순신」을 사용한 것까지 계산에 넣어진 것인가.
황급히 검을 놓고 물러나려 했지만, 무언가가 그의 팔을 옭아맸다.
촤르륵.
주박의 사슬.
검은 현자의 상징인 그 보랏빛 사슬이 주인의 어깨를 파고든 검을 휘감으며 조니악의 팔까지 구속한 것이었다.
“내가 한두 번 당해줄 줄 알아?”
“젠…장!”
조니악은 손을 들어 자신의 팔을 잘라내는 것으로 그 속박에서 도망치려 했지만, 순식간이 거리를 좁히며 아스칼론을 휘둘러오는 이진한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변수는 아주 작은 날갯짓에서 창출되는 법이지.”
큰 마법과 상위 스킬을 펑펑 써댄다고 싸움의 판도가 바뀌지 않았다.
이들은 아주 조금의 빈틈도 읽어낼 수 있는 실력자들. 보통이라면 한두 번 더 의심하며 조심했겠지만, 정말로 궁지에 몰린 상황을 연출해 위기를 내보인다면 미끼를 물지 않을 수가 없을 터였다.
“안 돼!!”
다리우스가 황급히 검을 내리그었다.
피할 수 없는 공격이기에 그의 등 뒤로 깊은 자상이 생겨났지만, 미리 준비하고 있던 대천사의 가호가 마기의 침투를 막으며 그 몸을 지켜냈다.
그렇기에 이진한은 오직 일념으로 성검을 휘둘렀다.
서걱─!
신성과 마기는 서로 상극이었다.
하지만 그 우위는 명백히 신성에 있는 법.
실력 간의 격차가 있다고 하더라도 다리우스의 검이 신성으로 보호받는 이진한의 몸을 양단하지 못하였지만, 매섭게 휘둘러진 아스칼론이 조니악의 목을 손쉽게 베어 가를 수 있던 이유도 바로 그러한 것에 있었다.
“씨…팔.”
잘린 목이 허공을 부유했다.
꺼져 가는 생명 속, 조니악의 망막에 저 멀리 있던 가니온의 모습이 맺혔다.
하다못해 손이라도 잡아봤으면 좋겠거늘. 그녀를 따라 다리우스와 손을 잡은 것이 자신의 운명을 뒤틀어버린 듯싶었다.
쐐애애액!
이진한은 일격으로 멈추지 않았다.
부활할 여지조차 남겨두지 않겠다는 듯 귀기 어린 얼굴로 조니악의 머리와 몸을 수백 갈래로 도륙해낸바. 마기에 찌든 피륙이 신성한 불꽃에 의해 타들어 소멸했을 때, 그는 천천히 몸을 돌리며 남은 이들을 바라보았다.
“다음은 누구지?”
“….”
그 섬뜩한 기세에 다리우스를 비롯해 칼슈아도 멈칫했다.
조니악은 클래스 특성상 그들보다 전체적인 수준은 낮지만, 살상력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들의 합공을 받아내고서도 저리 손쉽게 조니악을 쓰러뜨리는 그 모습에 사뭇 충격을 받은 것이었다.
쐐애애액!
재차 소환된 마정령이 다시금 거대한 팔로 그의 몸을 짓눌러온다. 이진한은 이전처럼 허둥거리는 일 없이 아스칼론의 위로 농밀한 신성력의 오러 블레이드를 만들어내 무참히 그것을 베어 갈랐다.
서걱─!
믿었던 마정령조차 손쉽게 파훼되자 다리우스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이건 애초에 전력을 잘못 파악한 듯싶소이다.”
“허.”
칼슈아 역시 살짝 검 끝을 떨며 말했다.
검은 현자의 계승자? 아니, 애초에 전제가 잘못된 듯하다. 이건 마치 전설 속의 검은 현자 본인이 내보이는 듯한 신위가 아닌가.
저벅.
이진한이 가볍게 한 발자국 내디디자 그들 역시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뒤쪽에 있던 레이첼과 가니온 역시 굳은 낯빛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 앞의 전위가 쓰러진다면 자신들 역시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을 알고 있기에 수를 쥐어 짜내야 할 상황이었다.
“흥미롭구나. 그대. 도대체 정체가 무엇인가.”
낯선 목소리가 들려온 것도 바로 그와 동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