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6.
꽈아악.
검을 쥔 칼슈아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자신의 공격이 너무 쉽게 막혀서 그런 것도 있지만, 이쪽을 바라보는 이진한의 눈빛이 마치 하수를 향하는 것 같아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것이었다.
「무광」의 칼슈아.
검술 명가인 리히테나워 가문의 역대 가주 중 가장 뛰어난 재능을 지닌 채 태어났다고 알려졌지 않은가.
지금껏 자신을 이렇게 취급한 이가 없었기에 처음 겪는 모멸감이 전신에 가득 찼다.
“이번 것도….”
이번 것도 그리 여유롭게 막을 수 있을지 보자.
칼슈아가 검을 다잡으며 자세를 취할 찰나, 그 옆으로 다가오는 기척들이 있었다.
“혼자만 먼저 재미 보면 안 되지.”
“맞아요. 다 함께 여기에 온 이유를 떠올려봐요.”
조니악이 씩 웃으며 단도를 움켜쥐자 레이첼도 동감이라는 듯 스태프를 들며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유롭게 있는 다리우스를 제외하고는 모두 전투태세에 임하며 홀로 선 이진한을 마주했다.
“…살벌한데.”
말과는 달리 그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뒤쪽으로 갖가지 무구가 땅에 박히며 각기 다른 광채를 뿜어내었다.
“검, 창, 도, 활, 저건 원반인가?”
“차크람이다. 어디 소수 부족이 쓰던 무기라고 들었는데, 과연 검은 현자의 계승자군. 하지만….”
쉬아아악!
레이첼의 의문에 답하던 조니악의 신형이 일순간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칼슈아와의 격돌로 인해 피어오른 먼지가 일순간 반으로 갈라지더니 한 줄기 검은 섬광이 허공을 갈랐다.
캉!
샛노란 불똥이 튀어 오른다. 이진한이 자신의 목을 노리고 들어온 검을 막아낸 것이었다.
“진짜 검은 현자도 아니고, 그 계승자 따위 어중간한 열화판에 불과할….”
“수가 뻔해.”
조니악의 말을 끊은 이진한은 가볍게 허리를 비틀며 거센 발길질로 그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조니악은 그 즉시 두 팔을 교차한 채 자리에서 뛰어올랐고, 저항 없이 그 힘에 순응해 뒤로 물러나는 것으로 피해를 최소화했다.
“….”
두 팔 위에 내리꽂힌 묵직한 일격에 조니악의 눈빛이 서늘하게 빛났다.
그가 다시금 땅을 박차려 한 찰나, 지척까지 닥쳐온 칼슈아가 빛살처럼 뛰쳐 나가며 외쳤다.
“전위를 맡겠습니다!”
“흥.”
조니악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콧김을 내뿜으면서도 허공으로 몸을 숨기며 점차 기척을 감췄다.
어쌔신 업계의 전설 「흑살」의 진가가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후우.”
이진한은 자신에게로 닥쳐오는 갖가지 기운들을 바라보며 짧은 호흡을 내뱉었다.
정면으로는 칼슈아, 사각에서는 조니악이 빈틈을 노릴 터.
저 멀리에는 대마도사 레이첼과 하이엘프 정령사 가니온이 원거리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다리우스는 아직 관망하는 상태인가. 그렇다면 다른 한 명은…?’
이진한의 두 눈이 커졌다.
적은 모두 여섯. 다리우스를 제외하고 움직이는 이는 모두 넷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한 명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쐐애애액!
그때 머리 위로부터 거센 파공성이 터져 나왔다.
“…!”
에우리스테우스.
그가 태양을 등진 채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고 있던 것이었다.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는 공격이었다.
눈앞에서 닥쳐오던 칼슈아와 조니악을 두고 고민하던 이진한은 이내 결정을 내렸다.
“클래스 변환.”
쥐고 있던 템페스트를 놓고는 오른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러자 그 위로 거친 마나의 격류가 소용돌이치며 공간 자체를 일그러뜨렸다.
콰아아앙!
에우리스테우스와 이진한의 주먹이 서로 충돌했다.
아레나가 준 정보에 의하면 「태초의 반신」이라 불리는 존재의 후손으로 태생부터 강력한 힘과 튼튼한 신체를 가졌다고 했다.
진짜 반신의 후손인지는 몰라도 완력으로는 져본 적이 없다는 소리는 과장인 줄 알았지만, 주먹 너머로 느껴지는 힘을 보아하니 사실인 듯싶었다.
‘단순히 완력만으로는 날 뛰어넘나.’
서로 전력을 다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쪽이 밀렸다는 건 힘 자체만을 두고 보자면 에우리스테우스가 더 강하다는 이야기였다.
그 가운데 뭉개진 지반으로 뛰쳐 들어온 칼슈아가 맹렬한 기세로 검을 휘둘러왔다.
캉!
이진한은 왼손을 뻗는 것으로 그라나다를 소환해 그 공격을 막아냈고, 허공에서 주박의 사슬을 엮어내 등 뒤를 찔러오던 조니악의 검을 묶었다.
“…놀랍군. 홀로 드래곤을 쓰러뜨렸다는 건 헛소문이 아니었어.”
“이 정도로 놀라기엔 이른데.”
이진한은 흥미롭다는 시선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조니악을 보고는 조소를 흘리며 고개를 들었다.
피 튀기는 육탄전은 이제까지 수없이 거쳐왔고, 특히 도원경에서 많은 데이터를 쌓았다.
그때 싸웠던 각각의 분신은 이들과 비교해서 아득히 뛰어넘는 수준의 강자였기에 아직 여유가 있었지만, 문제는 이들이 아니었다.
파지지직─.
이쪽과 조금 떨어진 상공.
허공이 찢어지며 균열이 생겨난다. 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이진한에게 있어서도 미지의 존재였다.
‘읽히지도 않는 건가.’
대현자의 눈도 파악에 실패했다.
한 가지 알 수 있다는 것은 저 존재가 소름 끼칠 정도로 강하고 끔찍하다는 것이었다.
쉬아아악!
균열 사이로 기다란 손이 뻗어져 나왔다.
검붉은 마기를 띤 그것은 끝도 없이 쭉쭉 늘어나며 세 명과 손발을 맞대고 있던 이진한에게로 닥쳐왔다.
“흡!”
순간 전력을 펼쳐 발목을 잡고 있던 속박을 떨쳐낸 그는 그라나다를 놓고는 인벤토리에서 성검을 뽑아냈다.
일단 마(魔) 관련에는 이것이 쥐약이었다.
새로이 얻은 아스칼론이 영롱한 자태를 보이며 눈 부신 빛을 내뿜었고, 하늘 높이 치솟은 신성력의 기둥이 균열에서부터 빠져나온 팔을 베어 갈랐다.
키에에엑─!
듣기 싫은 비명이 귓가를 스쳤다.
손끝에 서리는 그 감촉에 이진한은 균열에서 빠져나온 존재의 정체를 대략적이나마 깨달을 수 있었다.
“정령이구나. 마계의 정령이니 마정령인가?”
실체가 없는 허사를 베는 감촉.
일반 검이었다면 마나를 실었다고 할지라도 치명적인 타격을 주기 힘들었을 것이리라.
하지만 성검은 그러한 종류의 한계 따위는 가볍게 씹어 먹기에 성검이라 불리는 것이었다.
검신에서 찬란하게 피어오르는 그 빛은 마정령에 있어 치명적이었고, 순식간에 그 형태를 잃고 무너져 내렸다.
“놈!”
칼슈아가 그를 수백 조각으로 도륙 내 버릴 심산인 듯 미친 듯한 공격을 가해왔다.
리히테나워 가문 역대 최강의 가주란 것은 허명이 아닌 듯 그 순간은 이진한조차 잠시 긴장해야 할 정도였다.
서걱.
정면에서 부닥친 공격은 전부 막아내었지만, 사각을 노리고 파고 들은 조니악의 일격은 미처 피해내지 못했다.
저 짧은 단검에 물리와 마법 방어를 관통하는 능력이라도 있는 것인지 두르고 있던 방어구의 효과가 무효화 되었다.
옆구리 부근에서 피가 튀어 오르자, 이진한은 짜증 난다는 듯 인상을 썼다.
“성가시게!”
숨 쉴 틈을 주지 않을 생각인지 그 직후 에우리스테우스의 묵직한 공격이 떨어져 내렸다.
흩날리는 먼지 속에 다시 몸을 숨긴 조니악까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는 상황. 당장 손발이 서너 개여도 부족한 찰나에 그는 대현자로 클래스를 되돌리며 회심의 수를 사용했다.
《영원》 오리지널 마법 「삼라만상」
주변 공간을 순식간에 장악해서 자신과 그 사이에 있는 거리를 무한대로 늘렸다.
일레이나의 마법인 「애드」의 상위 호환인 마법으로 무투 계열 클래스인 에우리스테우스라면 단시간 내에 그것을 돌파하기 어려울 터였다.
콰지직─!
하지만 그 재치가 무색하게도 에우리스테우스의 막대한 힘이 공간 자체를 무너뜨려 「삼라만상」의 마법을 뭉개버렸다.
“주먹질로 마법을 부숴? 진짜 무식하네.”
헛웃음을 토해낸 이진한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성검을 놓았다.
에우리스테우스의 주먹은 그의 코앞까지 이른 상태. 이대로라면 적지 않은 여파를 받을 것이 분명했지만, 이진한은 담담한 표정으로 딱 한 마디를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악마화」
쿵─!
그의 전신이 순식간에 새카만 마기로 뒤덮이며 막중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지척에 있던 칼슈아와 조니악은 오싹해지는 감각을 느끼고는 훌쩍 뒤로 물러났지만, 에우리스테우스만이 개의치 않은 채 그를 곤죽 내고자 주먹을 멀어 넣었다.
탁!
“…!”
하지만 그 노력이 허무하게도 그의 주먹은 이진한의 코앞에서 가볍게 붙잡히고 말았다.
“너희들만 악마와 계약한 줄 알아?”
일렁이는 마기 사이로 활짝 뜨인 동공이 샛노란 색으로 갈라졌다.
에우리테우스는 온몸을 옭아매는 그 압박감에 아주 잠깐 멈칫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빈틈은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쿵─!
마기에 휩싸인 주먹이 그의 복부를 강타했다.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파괴력에 절로 입에서 피를 토해내며 두 눈을 부릅떴다.
어지간한 고통에도 단련이 돼 있는 에우리테우스였지만, 장기를 짓뭉개는 그 충격만큼은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일단 한 놈.”
퍽!
가볍게 발길질하는 것으로 그 몸을 차낸 이진한이 스산한 눈빛으로 좌중을 훑었다.
그 시선을 받은 칼슈아와 조니악이 흠칫 몸을 떨었을 찰나, 뒤쪽에서부터 날카로운 외침이 들려왔다.
“떨어져!”
파바바밧!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둘은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이 거리를 벌렸다.
왜 그런가 싶어 고개를 들자, 이진한은 곧 저 위에서부터 드리우는 거대한 그림자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사용하기만 했지, 맞서는 건 처음인데.”
「진홍의 보옥」
대마도사 클래스의 초월 마법이 웅장한 기세로 이쪽을 향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지금껏 자신과 싸워왔던 이들이 보아온 풍경이 이것인가. 잠시간 그것을 감상하던 이진한은 가볍게 손을 들어 올렸다.
쿠구구궁─.
진홍의 보옥보다 조금 더 위, 막대한 마력이 뭉쳐 새로운 초월 마법을 펼쳐냈다.
레이첼은 어떻게든 그것에 간섭해 마법의 발동을 막으려 했지만, 마법사 간의 경지 차이는 절대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초월지경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쿠웅.
검붉은 태양이 떠올라 진홍의 보옥을 짓뭉개며 궤도를 틀었다.
종래엔 그들과 동떨어진 곳으로 떨어져 내려 다시 한번 커다란 폭발과 함께 깊은 크레이터를 만들어냈다.
“설마 이거 한 번으로 끝이야?”
이진한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며 묻자, 구겨진 얼굴의 레이첼이 재차 마법을 발동했다.
그것을 두고 보기만 할 이진한이 아니었기에 땅을 박차고 달려들자, 기회를 엿보고 있던 칼슈아와 조니악이 달려들었다.
콱!
하지만 그 둘은 변변찮은 반항조차 하지 못한 채 목을 붙잡히고 말았던바.
손아귀에 힘을 주자 뿌득하는 소리와 함께 목뼈가 부러져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
구우우웅.
이진한의 손 위로 소환된 마검 그라나다가 섬뜩한 소리를 자아낸다. 그 위에 응어리진 시커먼 마기는 자신의 힘을 주체하지 못해 넘실거리며 주위를 뒤덮어갔다.
“이 정도로 내게 덤벼온 거면 실망인데.”
그는 가늘어진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원탁의 멤버가 약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 각각이 마르딘 영지에서 싸운 검호보다 강했으며, 확실히 일국을 호령할 만한 강자라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상대가 터무니없이 나빴을 뿐이었다.
도원경에서의 뼈를 깎는 수련이 없었다면.
「무신」 스킬을 익히지 못하거나 아스칼론을 얻지 못했다면.
꽤 힘겨운, 아니 어쩌면 패배했을 수도 있었다.
“…과연 대단해. 어쩌면 지금의 이들로도 쓰러뜨릴 수 있으리라 생각했거늘, 턱도 없었군.”
“다음은 검성이라도 나오나?”
“아쉽게도 스승님께선 이런 일로 움직이시지 않는다네. 그 노인네는 엉덩이가 무거운 양반이거든.”
“스승에게 말이 험하네.”
“제자를 이렇게 고생시키는데 이 정도는 귀여운 투정이지. 그러니….”
딱.
다리우스는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실력 파악은 전부 끝냈겠지? 다들 이번에는 잘 싸워주길 바라네.”
“….”
이진한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가슴이 뭉개져 튕겨 나간 에우리스테우스는 자력으로 회복한 듯 입가에 묻은 피를 닦으며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사실 그에겐 물어볼 것이 있어 목숨을 끊어내진 않았다.
내부를 짓뭉갰으니 한동안 움직이지 못하리라 생각했거늘, 너무 무르게 판단한 듯싶었다.
하지만 칼슈아와 조니악은 분명 목뼈를 분질러 절명한 것을 확인하지 않았는가.
“…제기랄, 이렇게 당해본 적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군.”
“동감입니다. 외인의 손길이 이 몸에 닿은 적은 가히 수십 년만이로군요.”
둘은 뼈 소리와 함께 목을 부여잡으며 몸을 일으켰다.
다만, 그 전신에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미증유의 마기가 풍겨 나오고 있다는 것이 다른 점이었다.
파아아앗─!
에우리테우스를 제외한 전원이 짙은 마기에 휩싸인다. 피부는 점차 검게 물들었고, 그들이 뿜어내는 기운은 모조리 마기로 치환되었다.
“이들은 직전까지 인간이었을 적의 힘으로만 자네를 상대했다네. 새로이 얻게 된 힘은 아예 사용조차 하지 않았지.”
“어째서지?”
이진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굳이 그래야 할 이유라도 있는가.
초장부터 전력으로 왔다면 그래도 좋은 흐름을 이끌어 나갈 수 있었을 터인데.
그 의문에 다리우스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가벼운 여흥일세. 그러니 이번엔 조금 더 각오해야 할 것이야.”
“…각오?”
슈우욱.
마기를 풀어 헤침으로 악마화를 해제한 이진한이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다시 성검을 쥐었다.
“각오는 너희들이 해야 할 거다. 마인이 된 상태에서 성검에 베이면 꽤 아프거든.”
가급 적 한 번에 죽일 수 있도록 노력해주마.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여섯 마인이 이진한에게로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