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5.
스읍─.
다리우스는 장내에 감도는 불순한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며 음미했다.
검성의 후계자, 패력의 다리우스.
선천적인 재능을 발견한 검성의 인도로 뼈를 깎는 노력을 아끼지 않아 젊은 나이에 작금의 경지에 이르렀다.
자신의 성에 틀어박혀 검호처럼 강자들을 초대해 사투를 벌이거나 안빈낙도의 삶을 보낼 수 있었지만, 그는 전쟁터에 직접 참여해 이 살벌한 기운을 전신으로 느끼는 것을 진심으로 좋아했다.
굳이 성국에 직접 찾아온 것 역시 같은 맥락으로 이어졌으니, 가늘어진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받으니 온몸이 오싹해지며 미칠 듯한 쾌감이 치솟아 올랐다.
“모순투성이라고 했나.”
다리우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지금 행동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여기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과정이 그가 원한 결과나 마찬가지였다.
“재미있는 이야기로군. 하지만 모순투성이라도 이루어질 수 있는 일도 있는 법이지.”
그는 가볍게 손을 휘저으며 자신의 뒤에 기립한 이들을 가리켰다.
마치 이때까지의 목적이 그들을 위함이었음을 설파하는 듯한 행동에 이진한은 좀 더 유심히 그 기운을 살폈다.
“소개하겠네. 저마다 일국에서 최강이라 불리며 대륙을 호령하는 이들이니. 그들을 일컬어 「원탁」이라 칭하네.”
스르륵.
여섯 모두 그 말과 동시에 머리에 뒤집어쓴 후드를 벗었다.
각기 개성이 뚜렷한 외모와 더불어 이진한의 감각을 건드리던 기운이 좀 더 선명하게 뿜어져 나와 범상치 않은 강자임을 드러내었다.
“…원탁.”
다리우스는 이진한의 동요를 원했지만, 반응이 나온 것은 그 뒤쪽에 있던 유리아 쪽이었다.
“알아?”
“대륙의 강자들이 모인 명예 조직입니다. 과거 영웅들의 유지를 이어받아 대륙을 수호한다는 명목으로 탄생했다죠. 저도 이름만 들어봤을 뿐….”
“그런 것 치고는 다 맛이 간 것 같은데?”
이진한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인상을 썼다.
왜 대륙을 수호한다는 이들 가운데 미증유의 마기가 휘몰아치고 있는가.
유리아가 이질감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감쪽같이 감추고 있었지만, 그의 감각 까지는 피할 수 없었다.
“뭐, 어쩌겠나. 경지에 오른 강자라 할지라도 그 기반은 인간이네. 필연적으로 부족한 부분이 있지. 나는, 우리는 그것을 채워주는 것으로 이들을 얻었다네.”
다리우스는 자랑스럽다는 듯 어깨를 폈다.
용사인 그를 쫓아 포섭하거나 복수하겠다는 건 모두 허울 좋은 명분에 불과했다.
진짜는 원탁의 강자들로, 다리우스는 물밑에서 이루어진 접촉으로 인해 그들 하나하나를 포섭해나갔다.
제일 먼저 포섭당한 「발푸르기스의 마녀」 레이첼 프라하리슈는 초월 지경에 오른 대마도사였다.
《영원》을 존경하며 현시점에선 일레이나보다 더 이름에 근접해있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조차 자신이 진짜 《영원》에 도달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막연하게 느끼고 있었다.
초월지경으로는 부족하다.
극의의 초월 너머에 있는 무언가.
레이첼은 그것을 신화의 경지라 칭했다.
하지만 주어진 재능과 잠재력은 초월지경에 도달함으로 모두 소모해버렸다. 남은 것은 이 알량한 수준을 유지하는 것이 전부. 그렇기에 그녀는 인간의 한계를 탈피하고 마법의 끝을 보고자 그들과 손을 잡았다.
두 번째로 포섭당한 것은 「무광(無光)」의 칼슈아 리히테나워였다.
리히테나워는 대적자가 없는 검술의 명가로, 그 적자는 대대로 검술에 있어 불세출의 재능을 지닌 채 태어났다.
하지만 아주 오래전부터 그 혈계에 계승된 저주가 두 눈의 빛을 앗아가는 것이 문제였다.
마법, 신성력, 비약. 세상 모든 기적을 가져와 치유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 가운데 빛을 되찾아 주겠다는 그들의 제안은 칼슈아에게 있어 너무나도 달콤한 울림이었다.
대수림의 하이 엘프, 가니온은 세 번째 포섭 대상이었다.
소수밖에 남지 않은 엘프 일족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모종의 병으로 인해 대부분 죽어가고 있었다.
칼슈아의 눈과 마찬가지로 세상의 모든 기적을 가져와 사용해도 치유할 수 없었고, 다리우스는 치료제를 명목으로 그녀를 포섭했다.
다만, 그 대가는 엄청났다.
순리를 벗어나 마왕과 손을 잡은 하이엘프는 순식간에 타락해버렸고, 정령왕들과의 계약이 모두 끊겨 버렸다.
그 대신 마계에 존재하는 마정령과 새로이 계약을 맺어 더욱 막강한 힘을 손에 넣었을 따름이었다.
네 번째, 어쌔신의 전설 「불가사리」 조니악.
그는 옛적부터 가니온을 마음에 품고 있었다.
그렇기에 손쉽게 그녀를 따라 다리우스와 손을 잡았고, 추후 일이 모두 끝나면 가니온을 얻게 해준다는 약조를 했다.
‘…저 남자까지 계약에 응한 건 의외였지만.’
다리우스의 시선이 원탁 제일 끄트머리에 있던 거한에게 향했다.
「태초의 반신」의 후손, 에우리스테우스.
무슨 동물인지 모를 것의 거죽을 머리에 뒤집어쓴 채 일관된 무표정으로 그 자리에 우뚝 서 있다.
나체로 드러난 상체는 구릿빛 근육이 꿈틀거리며 엄청난 힘이 내포되어 있음을 말해주었다.
그는 다른 이들과는 달리 자신들과 손은 잡았지만, 마기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체도, 신분도, 그 강함도 미지수라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혼자의 힘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탈리를 비롯해 다른 원탁들 역시 이들처럼 포섭하려 했지만, 아쉽게도 행방이 묘연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자네에게 제안이네. 자네 역시 어딘가 결여된 부분이 있겠지. 재화든, 꿈이든, 어떤 형태로든 말이야. 우리는 그걸 충족해줄 수 있네.”
“….”
이진한은 가만히 고개를 들어 두 팔을 벌린 채 일장 연설을 시작한 다리우스를 바라보았다.
“용사의 존재는 둘째치더라도, 그분들께선 자네의 강함을 눈여겨 보고 계신다네. 만일 우리와 손을 잡으면 단숨에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 높은 직위를 부여받겠지.”
“네놈보다 말인가?”
“물론이네. 그럴 경우엔 응당 예의를 갖춰야겠지. 아니면, 지금부터 그러길 바라는가?”
다리우스는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을 기세로 히죽 웃어왔다.
“거절한다면?”
“저런. 그 슬픈 대답은 우리 선택지에는 없네.”
수락하면 무한한 영광을, 거절하면 죽음을.
간단해서 좋은 조건이었다.
뒤쪽에 선 유리아가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이해가 가질 않는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와중, 이진한은 탁자 위로 턱을 괴며 조니악을 바라보았다.
“눈깔 그렇게 뜨면 파내버린다고 했지.”
“…하하.”
다리우스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원래는 조금 더 천천히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지만, 애초에 저쪽은 자신들을 간파한 상태였다.
높은 확률로 이런 흐름이 되지 않을까 싶었지만, 아쉽게도 예상을 벗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슥.
지목당한 조니악이 입가를 비틀며 앞으로 나와 다리우스의 옆쪽, 탁자 위로 다리 한쪽을 올렸다.
삐쭉한 잿빛 머리가 제법 인상적인 외모였다.
그는 한쪽 눈을 찡그리며 재미있다는 듯 실소를 흘렸다.
“당대 용사님이라고. 얼굴만 번드르르하고 몸은 비리비리해 보이는데.”
“네놈처럼 말한 녀석이 꽤 있는데, 지금은 전부 땅에 묻혀 있지.”
“입담도 제법이고 말이야.”
“그쪽은 별로인 것 같네.”
한치의 밀림 없는 기 싸움이었다.
이진하는 그 가운데 천천히 조니악을 살폈다.
어쌔신 클래스의 초월지경 「흑살(黑殺)」.
시선으로도 표적을 죽일 수 있는, 대인전 특화 클래스였다.
“자, 잠시만요! 지금 이곳에서 소란을 일으키면 저희 신성 왕국과 적대한다고 받아들이겠습니다.”
분위기가 점차 험악해지기 시작하자 유리아는 황급히 그들 사이로 끼어들었다.
저들의 목적이 흔들리는 제국과 야욕을 드러내는 왕국들의 사이를 중재받기 위함이라고 생각하고 있기에 이쪽이 주도권을 지니고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었다.
“아직 세상 물정도 파악하지 못한 머저리가 있었군.”
하지만 다리우스는 그런 그녀를 보며 비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그 눈과 머리가 장식이 아니라면 생각이라는 걸 좀 해보게나.”
“퍽이나 친절하시군.”
이진한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들과 마주섰다.
다리우스는 그것을 그의 의사 표시라고 여겼는지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순식간에 솟아난 검은 장막이 주위를 뒤덮으며 공간을 잠식해나가기 시작했다.
“베르너 님!”
“유리아, 너는 뒤처리를 부탁한다. 휘말리는 사람이 없게 모두 피난시켜.”
툭.
기겁하며 달려드는 유리아를 밀쳐낸 이진한은 순식간에 그 어둠에 잡아 삼켜졌다.
어찌할 도리도 없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 점차 커지는 장막이 벽과 천장을 무너뜨리며 몸집을 부풀려갔다.
쐐애액!
눈 부신 빛과 함께 뽑혀 나온 검이 그 위를 베어 갈랐다.
하지만 아무런 감촉도 없었고, 어둠 역시 갈라지는 일 없이 그 자리에 고고히 존재할 뿐이었다.
“…이건.”
이전 흑십자단이 그를 가두기 위해 사용했던 결계와 비슷한 종류로 보였다.
이쪽에서 일어난 소란으로 인해 점차 사람들의 기척이 짙어지는 것이 느껴진다. 유리아는 깊은 한숨과 함께 장막을 흘깃 바라보고는 밖으로 뛰쳐나갔다.
***
이진한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핏빛 하늘과 척박한 땅. 이전에 한 번 갇혔던 장소와 비슷한 풍경이었다.
“자, 그럼 머저리 같은 관객도 사라졌겠다.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나눠볼까.”
“네 뒤에 선 녀석들은 전혀 그럴 기색이 아닌데.”
툭툭.
발끝으로 땅을 두드려본 그는 장내에 휘몰아치는 투기와 살기에 쓴웃음을 지었다.
“이해는 해. 갑자기 주제에 넘는 힘을 손에 넣었으니 시험해보고 싶을 만도 하겠지. 용케도 여기까지 참아왔다고 칭찬이라도 해주고 싶네.”
초월지경의 강자가 여섯.
그에 반해 자신은 조력자 한 명 없었다.
얼핏 보면 절대적인 전력 차이에 손도 쓰지 못한 채 무너져 내릴 것 같았지만, 이런 불리한 싸움일수록 불타오르는 것이 고인물 아니겠는가.
척.
템페스트와 용아청성창이 각각 그의 손에 쥐어졌다.
억누르고 있던 기세가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와 자신에게 부닥치는 기운들을 전부 찢어발겼고, 그마저도 모자라 대적자들을 휩쓸었다.
“…허어.”
다리우스는 숨을 들이키며 본능적인 감탄을 내뱉었다.
마르딘에서 검호와 싸운 흔적의 보고를 받았을 땐 아리송한 점이 몇몇 있었다.
하지만 그 본인을 직접 눈앞에 마주하니 오히려 과소평가가 되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럼, 모두 힘내주게. 첫 번째 임무라네.”
“…반쯤 죽여 놓으면 되는 거죠?”
레이첼이 보랏빛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스태프를 쥐었다.
그 위에 박혀 있는 자수정으로 막대한 마력이 들끓으며 주인의 명령을 기다린다. 다리우스는 그것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반쯤 죽인다, 라. 그건 조금 힘들 듯하군. 정말 죽일 기세로 싸우지 않는다면 오히려 당하는 건 우리가 될 걸세.”
“그 말에는 조금 동의하긴 힘들군요.”
이때까지 잠자코 서 있던 칼슈아가 고개를 들며 입을 열었다.
“모두 나설 것도 없습니다. 여기서 기다리도록 하시지요.”
감겨 있던 그의 눈이 천천히 뜨인다. 초점이 없던 흰자위가 시커멓게 물들었을 때, 그 가운데가 샛노랗게 갈라지며 빛을 발했다.
“저 혼자로 충분합니다.”
쐐애애액─!
칼슈아 리히테나워.
「무광」의 검이 세상을 반절로 베어 갈랐다.
“「무신」 발동.”
그 너머에 홀로 있던 이진한은 자신에게로 닥쳐오는 섬뜩한 일격에 템페스트를 다잡았다.
대현자에서 그랜드 소드 마스터로 클래스 변환이 이루어진다. 인식의 차이까지는 찰나. 그 가운데 극의에 달한 검이 템페스트를 따라 터져 나왔다.
파각.
눈 부신 빛이 좌중을 휩쓸며 빛의 조각들을 흩뿌린다. 무광의 검격은 무참히 부서졌고, 칼슈아는 그 가운데 선 채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백야극광.”
“네놈만 그랜드 소드 마스터인 건 아니거든.”
이진한은 템페스트를 어깨 위에 진 채 씩 웃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