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4.
“베르야!”
푸른 머리카락의 여인이 다급한 얼굴로 수풀에서 뛰쳐나왔다.
유리아는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이내 호수 가장자리에 우뚝 선 이진한을 발견했는지 두 눈을 크게 떴다.
“베르너 님! 돌아오셨나요?”
“유리아.”
“아, 그러니까 베르가 저랬군요. 갑자기 뛰쳐나가서 얼마나 놀랐는지.”
유리아는 한숨을 내쉬며 그의 어깨 위에 머리만 툭 올려놓은 채 하품을 내뱉고 있는 까망베르를 바라보았다.
“네가 돌봐준 거야?”
“예. 귀여운 아이더라고요. 처음에는 귓등으로도 제 말을 듣지 않았는데 맛있는 먹이로 회유해서 친해졌습니다.”
“고마운 이야기네.”
이진한이 그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까망베르는 작은 울음을 내뱉으며 교태를 부렸다.
“그런데 다른 이들은?”
“아 그것이….”
흐뭇한 얼굴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유리아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그가 자리를 비운 것은 고작 이틀이었지만, 그간 쌓인 이야기가 적지 않다. 그렇기에 무엇부터 말해야 할지 고민이 들었기에 신중히 말을 골랐다.
“오스칼 제국의 수도인 폴포아르텔에 마계와 이어지는 게이트가 열렸습니다. 그 탓에 마계의 군세가 쏟아져 나와 폴포아르텔이 멸망했고, 그곳을 시작으로 천천히 제국이 무너져가는 중입니다.”
“…무슨.”
예상치 못했던 말에 이진한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설마 그것 때문에 다들 오스칼 제국으로 달려가기라도 했다는 건가.
그의 눈동자에서 그러한 우려를 읽은 유리아가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다른 분들은 그 소식을 듣자마자 성왕 폐하를 찾아갔습니다. 그러곤 성국의 심처에 있는 시련의 굴에 대한 사용을 부탁하셨죠.”
“시련의 굴?”
“예. 성국에서도 소수만이 사용할 수 있는 수련 시설입니다. 과정은 위험하지만, 통과만 할 수 있다면 가로막은 벽을 깰 수 있지요.”
이진한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원경 같은 종류의 수련 시설인 듯싶다. 다소 리스크를 각오하고 강해지는 종류의 시련은 흔히 있는 일이지 않은가.
정말로 그들이 위험해지면 자신에게 알림이 오게 되어 있지만, 아직 잠잠한 것을 보니 다들 수월히 해내고 있는 듯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원하신다면….”
유리아는 슬쩍 그의 눈치를 살폈다.
원한다면 자신의 권한으로 시련을 중지시키고 그들을 전부 불러 모을 수 있다.
하지만 이진한은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그녀들이 선택한 길이잖아. 믿고 기다려야지.”
“…그렇습니까.”
분명 상의 된 바가 없을 터인데 두터운 신뢰를 보인다. 유리아는 그것이 못내 부러웠다.
“성왕은? 그녀에게 바로 안내 부탁하지.”
“성왕 폐하께선 마계 침공에 대비한 대륙 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리베라 제국으로 가셨습니다. 베르너 님께 말씀을 남겨달라고 부탁하셨죠.”
“그런가.”
당연한 이야기였다.
상대가 마계의 군세라면 신성 왕국의 성왕인 그녀는 연합에서도 중심이 되는 존재가 될 터.
일이 터지자마자 바쁘게 돌아다니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혹시 아스칼론은 얻으셨습니까?”
유리아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초 성왕과 유리아는 그가 호수를 넘어 아스칼론을 획득할 때 걸릴 시간이 아무리 못해도 한 달은 넘을 것이리라 예상했다.
그마저도 희망적인 관측으로, 아무리 용사라 할지라도 뼈와 살을 어그러뜨리는 신성한 호수의 압력을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의견이 정론이었다.
하지만 이진한은 너무나도 쉽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벤토리에서 한 자루의 검을 꺼내 들었다.
“당연히 얻었지.”
새하얀 검신에 붉은색 자루를 지닌 아스칼론이 햇빛을 받아 반짝인다. 그 고풍스러운 자태에 유리아는 두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
“그것이…!”
파아앗!
그 감탄이 끝나기도 전에 아스칼론이 빛나며 새하얀 입자를 흩뿌렸다.
유리아는 눈앞을 뒤덮는 빛무리에 고개를 돌렸고, 이내 그것이 가라앉았을 때 이진한 옆에 툭 하고 나타난 작은 소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어?”
이 작은 소녀는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것인가.
바람에 흩날리는 새하얀 머리카락과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
풍겨 나오는 분위기는 어딘가 신성한 것이었다.
“이 아이는 대체….”
“성검의 정령이다.”
설명하기 귀찮았던 이진한은 그걸로 가볍게 퉁 쳤다.
《안식》이 만들어낸 사역마니, 성검이 잠들어 있던 검총의 관리자이니 하는 시시콜콜한 것들을 전부 설명하기엔 이전까지의 여정이 너무 고되었다.
잠도 자지 못한 채 호수를 넘고 아스칼론을 찾아 돌아온 것이기에 쉴 시간이 필요했다.
“성국의 팔라딘, 유리아입니다.”
“…로네입니다.”
가볍게 고개를 꾸벅 숙이는 유리아의 모습에 로네 역시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도서관 안쪽에서 보였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기에 슬쩍 시선을 보내자, 그녀는 이진한의 팔을 붙잡아왔다.
‘아하.’
자신은 일단 둘째치고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이 익숙지 않아서 그런 듯했다.
그는 피곤한 얼굴로 손을 로네의 손을 잡아주며 말했다.
“일단 좀 쉬고 싶은데. 당장 급한 일이 아니라면 돌아가자.”
“아, 네 알겠습니다!”
유리아는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천년 만에 나타난 아스칼론이나, 그 안에 성검의 정령이나 저 섬 안쪽에는 무엇이 있는지까지.
하지만 피곤함이 뚝뚝 묻어 나오는 그의 목소리에 궁금증을 꾹 눌러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바로 돌아가시죠.”
***
똑똑.
성궁으로 돌아가 휴식하길 한나절.
죽은 듯이 잠자고 있던 이진한의 귓가로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예민해진 감각이 정신을 일깨웠다.
일행이 나왔나 싶어 들어오라는 말과 함께 몸을 일으키자, 유리아가 조심스럽게 그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일이야?”
“그것이,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뭐?”
설마 무슨 일이라도 일어난 것인가.
황급히 일행의 상태를 알려주는 알림을 살폈지만, 저마다 정상임을 알려주는 신호만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기에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들자, 유리아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오스칼 제국의 사절이 베르너 님을 찾았습니다.”
“오스칼? 거긴 지금 박살 나는 중이잖아.”
이제껏 자신을 적대했으면서 지금에 와서 도움이라도 요청하려는 것인가.
이진한이 마른세수를 할 때, 유리아는 한층 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일반적인 사절이라면 당연히 거절했겠지만, 상대가 검성의 후계자인 ‘패력의 다리우스’인지라….”
“검성의 제자라고?”
남아 있던 잠기운이 싹 사라졌다.
당장 제국이 박살 날 위기에 처했는데 검성의 후계자가 왜 자신을 찾아온단 말인가.
‘뭔가 있다.’
수도에서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의 대역을 처형하는 것으로 여기까지 하자는 의사 표시를 해오긴 했지만, 검호를 죽인 이상 그들과는 양립할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설마 발등에 불이 떨어져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게 되어 도움이라도 청하러 온 건가.
“…그럴 린 없겠지. 가보자.”
차라리 도움을 청하러 온 거라면 고려해볼 법도 했지만, 시커먼 속내를 지닌 저들이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을지 몰랐다.
곧 유리아를 따라 응접실로 향한 이진한은 자신을 기다리는 면면에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자네가 용사인가. 이거 반갑군.”
치렁치렁한 붉은 머리의 남자가 씩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패력(覇力)의 다리우스」
검호가 거친 야생마였다면, 다리우스는 정갈한 군마(軍馬)와도 같았다.
탄탄한 몸과 근육, 그리고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미증유의 기세는 그가 검성의 적법한 후계자임을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리고….’
이진한의 눈이 가늘어지며 다리우스의 뒤쪽을 향했다.
그 뒤에 기립한 다섯 역시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머리끝까지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어서 육안으로 파악하긴 힘들었지만, 대현자의 눈은 손쉽게 그 위장을 간파하며 분석을 시작했다.
‘여성 두 명은 각각 마법사와 정령사, 남성 쪽은 검사, 어쌔신, 무투가인가.’
좋지 않은 소식이라면 한 명 한 명이 모두 한계를 뛰어 초월지경이라는 것이었다.
즉, 눈앞의 다리우스를 포함해 초월지경에 오른 강자가 모두 여섯.
어지간한 국가는 제대로 버티지도 못한 채 휩쓸려 나갈 그런 전력이었다.
“베르너다. 자잘한 소개는 하지 않아도 알고 있겠지?”
“물론. 당대의 용사를 눈앞에 마주하게 되어 영광일세.”
이진한이 자리에 앉아 다리우스 역시 착석했다.
유리아는 그 뒤에 기립하며 저쪽에 선 이들을 견제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래서, 무슨 일이지? 마르딘 쪽에서 엮인 케케묵은 은원을 정산하러 온 건가?”
“하하, 무슨 말을 그리 살벌하게 하나.”
“하긴 그렇긴 해. 제 안마당이 무너지는 상황에서 굳이 이 먼 길을 찾아올 이유는 없으니까.”
조롱하는 듯한 그의 말에 다리우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뼈 아픈 부분을 건드리는군. 자네 말대로네. 제국은 지금 역사상 유례없는 위기 가운데에 놓여 있어. 솔직히 말하자면 풍전등화나 다름이 없네. 이대로 마계 군세를 격퇴하지도 못할뿐더러 해결된 뒤에도 열강들이 모여 약체화된 제국을 갈가리 찢어 게걸스럽게 먹어 치울 테지.”
“용건부터 간단히.”
“…도와주게. 용사와 성국의 힘이라면 능히 제국을 위기에서 구해낼 수 있을 터. 무조건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네. 다른 왕국들이 제국을 견제하지 않고 연합 전선이라는 명목하에 합세할 수 있는 명분을 달라는 걸세. 우습게도 본국의 수도가 무너진 지금까지 다른 왕국들은 제국이 무슨 일을 벌이는 것이 아닐까 의심하고 있는 형국이라네.”
“흠.”
이진한은 팔짱을 낀 채 침음성을 흘렸다.
오히려 조급해진 것은 뒤쪽에 있던 유리아였다.
작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갈지 모르는 가운데 성급하게 앞으로의 거취에 대해 확답을 하는 건 성급한 일이었다.
이러한 부류는 다소 피해가 있더라도 신중히 검토한 뒤에 결정해야 함이 옳았다.
“….”
품속에 있던 통신용 수정구를 통해 은밀히 그에게 목소리를 전달하려 하던 유리아는 움직임을 멈췄다.
자신도 예상할 수 있는 사실을 그가 모를까.
그렇기에 경거망동하지 않은 채 조용히 상황을 주시했다.
“…명분이라, 좋은 이야기네. 그런 거면 도와줄 수 있지.”
잠시간의 공백 끝에 나온 대답에 유리아는 입술을 깨물었고, 다리우스는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정말 감사를 표하네. 그리고….”
“그런데 정작 당사자는 그리 조급해 보이질 않는걸.”
“…그게 무슨 소리인가?”
“제국 수도가 무너졌다면서. 황제를 비롯해 황궁에 기거하던 이들 대부분 사망. 그중에는 황실 직계 혈통인 황자들도 끼어있겠지. 아, 설마 이참에 제국을 먹으려는 건가? 검성 정도면 이름값은 충분하겠군.”
“…그 이상은 모욕으로 받아들이겠네. 아무리 제국이 힘든 가운데라 할지라도.”
“연기는 정도껏 하시지.”
이진한은 조소를 흘리며 탁자 위에 두 팔을 올려놓았다.
손을 교차해 그 위에 턱을 진 그는 짙은 미소와 함께 번뜩이는 안광으로 다리우스를 주시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순투성이야. 애초에 황실과 너희들이 마족과 결탁한 사실을 아는 내게 이런 허울 좋은 이야기들이 통하리라 생각하진 않을 테고….”
굳이 이렇게까지 번거롭게 일을 벌이는 이들의 진짜 목적이 무엇일까.
지금껏 그가 침묵한 채 있었던 것도 바로 그 점을 생각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진한은 다리우스 뒤쪽에 기립해 있던 한 인영을 바라보며 입가를 비틀었다.
“눈깔 그렇게 뜨지 말아라. 파내버린다.”
장내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히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