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3.
사역마, 로네에게 있어서 사용자 「로마네콩티」는 세상 전부나 다름이 없었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사실에 입각한 이야기였다.
이때까지 마주하고 대화한 지성체라곤 그녀밖에 없었으며, 홀로 남게 된 이후로는 그 누구와도 이야기하는 일이 없었다.
「로마네콩티」도 그 점을 가엽게 여겼는지 간혹 바깥세상이나 다른 이들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곤 했다.
특히 그녀와 같은 영웅은 로네의 가장 지대한 관심사였다.
“영웅 중 가장 강한 이를 꼽자면 말이 갈리겠지만, 가장 특이한 이를 꼽자면 모두가 같은 생각이겠지.”
“그게 누구입니까?”
“진한이.”
“…진한?”
“아, 《지혜》를 말하는 거야. 검은 현자. 닉네임은 좀 추잡해서 말하기 싫거든. 진짜인지 확인하고 싶었는데, 꼬셔도 잘 안 넘어오더라. 《영원》, 그 계집애만 아니었어도.”
“…?”
로네는 당시 「로마네콩티」의 말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특별하다고 알려진 영웅 사이에서도 《지혜》의 검은 현자는 독보적이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천여 년이 지난 지금, 그녀는 그것을 온몸으로 체감하고 있었다.
화아앗─!
시뻘건 불길이 검총을 휩쓸었다.
황급히 신성력의 결계를 활성화해 그것을 막으려 했지만, 인지를 초월한 대마법을 막기에는 한참이나 여력이 부족해 보였다.
“찾았다.”
검들이 녹아내린 흔적 가운데 고고히 떠 오른 한 자루의 검을 발견한 이진한은 두 눈을 빛내며 발걸음을 옮겼다.
아직 곳곳에 잔열이 남아 공간이 일그러질 정도의 열기를 뿜어냈으나, 그는 개의치 않은 표정으로 손을 뻗으며 성검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파아앗!
눈 부신 빛이 뿜어져 나왔다.
천여 년 동안 잠들어 있던 성검이 드디어 주인을 찾는 신성한 순간이었다.
“후우.”
이진한은 들뜬 마음을 가라앉혔다.
묵직한 손잡이의 감촉은 오랫동안 써온 것인 듯 손안에 착 감겨들며 정겨운 느낌을 내뿜었다.
천천히 그것을 들어 올리자 검신이 잘게 진동하며 공명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하울링, 아스칼론이 그를 용사로 인정하며 주인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었다.
[성검(聖劍) 아스칼론(Ascalon)을 획득하셨습니다.]
상태창으로 메시지가 떠오른 것을 본 이진한은 입가에 새어 나오는 미소를 참지 못한 채 가볍게 그것을 휘둘렀다.
검의 궤적을 따라 옅은 빛의 잔재가 그려진다. 아스칼론에 담긴 막대한 신성력이 꼬리를 그리며 이어진 것이었다.
“이제 남은 시간은?”
이진한은 고개를 들어 멍하니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로네를 향했다.
그녀는 자신을 향한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리더니 입술을 살짝 떨며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10분 24초가 남았습니다.”
“빠듯하네.”
아스칼론을 쥔 채 로네 앞에선 그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원래 계획은 대현자와 그녀의 융합이었다.
융합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엄청난 시너지를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도출한 결과에 따르면 마법과 신성의 상극 성질 때문에 실패할 가능성이 컸다.
대체재로 마룡 벨라시온의 심장으로 만든 「블랙 다이아몬드」에 심을까 생각도 했었다.
마찬가지로 상극 성질이 걸렸고, 아쉬움을 삼키며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이야기가 다르지.”
더 좋은 것이 손에 들어오지 않았는가.
성검 아스칼론.
무구 계열의 최상위 계급인 ‘성검’으로 막강한 파괴력을 내뿜는 마검과 같은 등급이었지만, 전체적인 수준은 한 차원 위로 평가 받았다.
아스칼론의 스펙과 기능은 부서진 듀란달과 비슷한 정도였다.
필살기 같은 굵직한 스킬 이외에도 자가 치유, 신성 결계, 공격 보조 등 여러 잡다한 가호가 붙어있어 과연 성검이라는 감탄이 저절로 나왔다.
‘그리고.’
이진한은 아스칼론의 손잡이를 내려다보았다.
듀란달에는 추가 기능을 설치할 수 있는 슬롯이 있었다.
그는 다른 능력을 심는 대신, 성능 향상에 집중해 그 위력과 내구도를 대폭 올렸다.
덕분에 미들턴에서 마왕 마르바스의 일격을 버텨내고 그 목을 베어낼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이쪽 슬롯에 로네의 핵을 담으면 안성맞춤이겠지.’
다행히 아스칼론의 슬롯 구조가 듀란달과 비슷했기에 할 수 있는 시도였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마. 나는 널 성검과 링크시길 생각이다.”
“…아스칼론과 말입니까.”
“그래. 너는 성검의 정령이 되는 거지. 그러면 이 공간에 묶인 제약에서 해방되어 나와 함께 밖으로 나갈 수 있다.”
로네는 머뭇거렸다.
함께 가자고 말은 들었지만, 지금껏 이곳을 나갈 수 있으리라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제가 나가서 뭘 할 수 있을까요?”
경험도 없고, 지식도 없다.
아는 거라곤 이 도서관을 관리하는 방법과 사용자 「로마네콩티」가 전해준 알량한 지식뿐이었다.
“뭐든지.”
이진한의 대답은 확고했다.
해보지 않고는 알 수 없다. 경험이 없으면 겪어가며 배우면 되고, 지식이 없으면 배우면 되는 일이다. 적어도 자신은 이 세계에 온 뒤로 그렇게 살았기에 확실하게 대답해줄 수 있었다.
“….”
로네는 고개를 들었다.
떨리던 눈동자 위로 옅은 빛이 깃들었다.
가슴께로 들어 올린 손을 꽉 쥔 채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여오는 것으로 보아 나름대로 각오를 다진 듯했다.
“이제야 좀 사람 같네.”
이진한은 씩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어 주었다.
천 년이나 이런 퀘퀘묵은 곳에 갇혀 있었으면 밖에도 나가고 그래야 하는 법이 아니겠는가.
“….”
로네는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했지만,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이며 그 푸른 눈동자로 이진한을 올려다보았다.
백 마디 말보다 더 뚜렷한 표현이었다.
재차 그 각오를 확인한 그는 짧게 숨을 토해내며 입을 열었다.
“그러면 시작한다.”
십 분도 채 되지 않는 촉박한 시간.
하지만 어려울 건 없다. 대현자의 눈은 그동안 로네의 구조를 낱낱이 분석했고, 머릿속으로 충분한 정보를 구축했다.
진짜 인간을 만들려 한 것인지 신체 내외부의 기관이 실제와 거의 유사했다.
틀은 이미 준비되어 있으니 그대로 본떠 사용하면 될 뿐인 일.
지금의 형태를 고정한 뒤 그것을 기반으로 전체적인 정령 화를 시행했다.
웅웅─.
애초에 그 본질은 인지 정령이었으니 어려운 과정은 아니었다.
구축된 메커니즘을 이용해 신체까지 한꺼번에 각인시키면 될 일이었다.
파스스스.
곧 그녀의 몸이 발끝에서부터 새하얀 가루가 되어 사라져갔다.
로네는 흠칫하는 기색과 함께 겁먹은 표정으로 이진한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걱정하지 마. 잘 될 거야.”
신체의 형상이 핵에 각인되고 그 정보가 아스칼론의 슬롯 위로 덧씌워진다. 이렇게 한다면 성검이 파손되지 않는 이상 소환된 육체가 무너지더라도 신성력의 공급만 있더라면 형태를 수복할 수 있게 되었다.
“….”
빛 무리가 완전히 사라지며 성검으로 흡수되었다.
이윽고 남은 것은 빛이 완전히 바래 더는 일말의 생기조차 느껴지지 않는 공간이었다.
“색조가 사라졌네. 이게 그녀가 말했던 폐쇄인 건가.”
벽 위를 슬쩍 손으로 훑자 퍼석한 감촉이 느껴졌다.
멈춰져 있던 시간의 여파를 그대로 맞은 듯 점차 삐걱거리며 불길한 소음을 내기 시작했다.
깊은 숨을 토해낸 이진한은 긴장된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렀다.
“들려?”
-…네. 잘 들립니다.
“하아.”
로네를 성검과 링크시키는 작업은 어찌어찌 잘 된 듯싶었다.
머릿속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소리를 들어보니 자기도 신기해서 심상의 공간을 돌아다니는 중인 것 같았다.
파아앗!
곧 새하얀 빛무리와 함께 로네의 형태가 눈앞에 나타났다.
이전과 완전히 같은 모습으로, 피부 위에 혈색이 도는 걸 보니 인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신기한 기분입니다.”
“성검하고 연결되어서 그래. 힘은 충분하지?”
“네. 아스칼론은 천여 년간 이곳에 보관되어 막대한 신성을 축적했기에 문제없습니다.”
“그래. 나도 느꼈어.”
이진한은 아스칼론의 손잡이를 다잡았다.
듀란달과 스펙은 비슷했지만, 저장된 힘의 총량은 듀란달과 비교할 수 없었다.
그라나다가 고대 신의 잔재에서 한계를 몇 번 뛰어넘어 정말로 막대한 기운을 흡수해야 겨우 동수가 될 정도로 강력한 힘이 그 안에서 느껴졌다.
‘이 정도면 무라마사와 듀란달이 파괴된 게 호재인데.’
성검 아스칼론
마검 그라나다
정령검 템페스트
용아청성창
블랙 다이아몬드
기본적인 초월급 무구의 구성은 갖춰졌다.
마음 같아서는 부주력으로 사용하는 신궁 클래스의 활도 구하고 싶었지만, ‘월드’에서도 워낙 구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이쪽 세상에 와서도 여러 번 수소문해도 번번이 실패했었다.
“그럼 나가자.”
“네.”
고개를 끄덕인 로네의 형태가 다시 흩어지며 아스칼론의 속으로 사라졌다.
그는 아스칼론을 인벤토리에 수납한 뒤 이곳을 나서서 다시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러면….”
짤막하게 각오를 다진 뒤 힘껏 호수로 뛰어들자 거친 물살이 요동쳤다.
온몸에 신성력을 두른 채로 나아가자 다행히도 짓누르는 압박은 이전보다 훨씬 덜한 것이었다.
-…어째서 이 안으로 들어온 겁니까?
“호수를 건너 저쪽으로 넘어가야지. 수면 위의 압력 때문에 날아갈 순 없잖아.”
-지하도의 길은 사용하지 않는 겁니까?
“…뭐?”
-호수 밑에서 뭍으로 향하는 지하도가 있습니다. 설마 들어올 때도 여길 넘어서 오셨습니까?
“…일단 묻겠는데, 거기는 아무나 드나들 수 있어?”
-그건 아닙니다. 적어도 팔라딘 급은 되어야 섬까지 들어올 수 있겠네요.
“이런 씹….”
팔라딘 급은 호수에서 몇 발자국 들어오지 못한 채 한계를 맞이하고 말 터였다.
그런 팔라딘조차 드나들 수 있는 통로가 있다니.
“하긴 천 년이나 되었으니 잊혀질 법도 하지.”
어차피 이곳까지 왔으니 일단 나아가기로 했다.
그러면서도 그간의 고생이 허무해지는 이진한이었다.
【975:24:15】
1천 시간의 경계선이 깨졌지만, 충분한 수확이라 생각했다.
밖으로 나가는 길은 수월했다. 압력 거의 느껴지지 않아 빠르게 물살을 가르며 나아갔고 머지않아 뭍에 다다랐다.
“…?”
하지만 그를 기다리는 건 아무도 없었다.
연락은 따로 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한둘 정도는 이곳에서 기다려주리라 생각했거늘.
삐이이익─!
그와 동시에 창공으로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익숙한 고음에 고개를 들자, 이틀 사이 어린 강아지 정도의 크기로 성장한 까망베르가 날갯짓하며 빠른 속도로 이곳을 향하고 있었다.
“컥.”
가슴 묵직하게 들이닥치는 충격에 신음 토해냈다.
이제는 제법 힘이 세졌다. 까망베르는 그 품 안에 안겨 온몸으로 난리 치며 반가움을 표시했다.
그러곤 이내 로브의 후드로 들어가자 묵직함이 느껴지며 고개가 뒤로 당겨졌다.
“…공간 마법이라도 걸어둬야겠네.”
고작 이틀 만에 이렇게 컸으니 앞으로는 더 클 터.
후드 쪽에 저 몸을 담을 수 있는 공간이라도 구축해놓아야겠다.
“그나저나….”
이진한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변의 기운을 훑었다.
자신이 나올 걸 생각하지 않았나? 그러던 찰나 저쪽에서부터 이곳으로 달려오는 기척을 발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