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2.
“누님답네.”
이진한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무협지 같은 장르 소설을 좋아했다.
종종 재미있는 작품이라며 추천해줬을 정도로 활발했으며, 자신 역시 몇 개는 재미있게 본 기억이 있었다.
수많은 검을 비롯해 병장기가 놓인 검총에서 진짜를 찾는 건 언젠가 읽었던 작품에 나왔던 장면이었다.
이쪽이 찾아올 걸 예상했으면서 이런 귀찮은 장치를 설치해놓다니.
아니, 오히려 예상했기에 이런 장난을 쳐놓은 것이 분명했다.
“….”
사역마는 물끄러미 시선을 보내왔다.
세 번째 질문을 사용할 것이냐는 뜻이었기에 이진한은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아니. 세 번째 질문을 좀 더 미뤄둘게.”
“알겠습니다.”
그녀는 뒤쪽으로 물러나며 입을 닫았다.
나름의 배려인 듯했기에 이진한은 사양할 것 없이 앞으로 나아가며 수북이 쌓인 검 중 하나를 들어 올렸다.
“흠.”
대현자의 눈이 검의 구조를 분석했다.
형태는 고급스러웠지만, 특별한 것이 없었기에 천천히 내려놓았고 그다음을 집어 들었다.
상식적으로 24시간 동안 이곳에 있는 전부를 감정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본래라면 대현자의 눈으로 일순간에 끝낼 수 있는 일이었지만, 이 구역에 가득 찬 신성력이 극심한 방해를 했다.
대현자의 눈 역시 초월지경의 스킬이라 망정이지 그 열화 판인 현자의 눈이었더라면 제대로 활성화하지도 못했을 터.
‘방법은 두 가지.’
하나는 어렵지만, 재고의 여지가 있다.
나머지 하나는 쉽지만, 뒤가 없다.
아직 시간은 충분했기에 전자를 선택한 그는 하나하나 검을 둘러보며 진위를 판별했다.
그렇게 한 시간쯤 그 사이에서 헤매던 이진한은 까마득하게 남은 숫자를 보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넌 계속 그렇게 있을 거야?”
“전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게 있는데 어떻게 신경을 안 써.”
사소한 손짓 하나하나마다 그렇게 시선을 보내오는데 어떻게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있을까.
그가 가볍게 손을 털며 검총의 출구로 향하자 뒤따라온 사역마가 의아한 시선으로 물었다.
“벌써 찾으신 겁니까?”
“아니, 조금 쉬려고.”
“…이제 약 22시간 정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22시간이나 남은 거지. 긍정적으로 생각해.”
“하지만.”
“원래 이런 건 타이밍이야. 때를 못 맞추면 24시간이 아니라 2,400시간이 있어도 못 찾는 거지. 한 번에 딱 찾아내야 해.”
손을 휘적휘적 휘두르며 도서관으로 나온 이진한은 적당한 탁자를 잡고는 그 위에 음식들을 꺼내 놓았다.
호수에서 쉬는 동안 수면 위로 올라가 허기를 달랬다고 하지만, 식사하는 것에 한계가 있었다.
어느 정도 여유를 되찾자 긴장이 탁 풀리며 다시 배가 고파졌기에 잠시간 쉬면서 보충을 할 생각이었다.
도중 이진한은 한옆에서 우두커니 서 있던 사역마를 보며 물었다.
“설마 도서관 내부에서 식사하면 안 된다는 규정 같은 건 없겠지?”
“그런 규정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부드러운 빵과 따끈따끈한 스튜를 메인으로 한 음식들이 탁자 위에 펼쳐졌다.
한 수저를 떠 올릴 찰나, 그는 슬쩍 고개를 들었다.
“너는 안 먹어?”
“저는 음식을 먹을 필요가 없습니다.”
“신체 구조는 인간의 것인데.”
“섭취 및 식사는 할 수 있지만, 신성력으로 충당하기 때문에 문제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시선은 빵 위에 고정된 것이 제법 흥미가 동한 듯했다.
이진한은 그것을 들어 반으로 쪼갠 뒤 하나는 자신의 후드로, 하나는 그녀에게 내밀며 말했다.
“먹어볼래?”
“…그렇다면 사양하진 않겠습니다.”
기다렸다는 것처럼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빵을 가져갔다.
이진한은 씩 웃으며 남은 빵을 후드 안으로 밀어 넣으려다가 까망베르를 일행에게 맡겨 놓고 왔다는 것을 깨닫곤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앉아. 다른 음식들도 많으니까.”
“…와.”
그녀는 탁자 위에 펼쳐진 음식들을 보며 두 눈을 반짝거렸다.
이런 음식들은 처음 보는 걸까. 나이 차이가 나는 동생 같았기에 절로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마실 게 다 떨어졌네. 물로는 아쉬우니까….”
이진한은 자리에서 일어나 위쪽 통로를 바라보았다.
널린 게 술이었으니 적당히 하나 정도 가져오면 될 터.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태도로 그리 말하자 그녀는 떨떠름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그건 사용자 「로마네콩티」의 것입니다.”
“괜찮아, 괜찮아. 그 누님도 그냥 가져다 먹으라고 했을 거야. 그리고 어차피 여기 폐쇄된다며. 나갈 때 다 쓸어가야겠네.”
“…그렇군요”
망설일 것 없이 와인 창고로 올라가 적당히 좋아 보이는 것을 가지고 돌아갔다.
사역마는 음식을 두고 멀뚱히 앉아만 있는 상태였기에 이진한은 그것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식기 전에 먹어.”
“알겠습니다.”
지시를 기다렸는지 말이 떨어지자마자 식사를 시작했다.
먼저 스푼으로 스튜를 조심스럽게 떠서 입에 가져간다. 이윽고 혀끝에 맴도는 맛을 느꼈는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머리카락 끝이 살랑살랑 흔들릴 정도로 선명한 반응을 보였다.
“이런 거 처음 먹어?”
“예. 저는 먹을 필요가 없었으니.”
“그러면 그동안 뭐 했어? 계속 활동상태는 아니었을 것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천여 년간 홀로 움직여오지 않았을 터.
예상대로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의 의사를 표시했다.
“일정 주기마다 깨어나 이곳을 관리했습니다. 그 이외에는 대기 상태로 있었습니다.”
“그런가. 그러면 밖에 나가본 적은?”
“제게 허락된 세상은 이곳이 전부입니다.”
이전과 같은 무표정이었지만, 이진한에게 있어서는 왠지 쓸쓸하게 보였다.
다시 자리에 앉아 잔에 포도주를 가득 채운 그는 문득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내가 널 뭐라고 불러야 하지?”
“제게 할당된 이름은 없습니다. 어차피 약 22시간 뒤에 정지하니.”
“그래도 부를 이름은 있어야지. 뭐가 좋을까. 로마네콩티, 로마, 마네. 둘 다 별론데. 로네, 로네는 어때?”
“…로네.”
이름을 부여받는다는 게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는지 입안에서 계속 곱씹었다.
‘마음에 든 건가?’
이진한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단숨에 잔을 비워냈다.
“자, 그럼….”
“다시 성검을 찾으러 가실 겁니까?”
“아니? 더 쉬려고 했는데?”
빈 잔이 다시금 가득 채워졌을 때 이진한은 손을 들어 자신이 걸어온 길을 가리켰다.
“저기 넘어오느라고 얼마나 고생한 줄 알아? 조금 정도는 숨을 돌려줘야지. 아, 돌아가는 건 어렵지 않겠지?”
“…네. 쉬울 겁니다.”
“그래. 그러면 잡담이나 하자. 여기 구경도 좀 하고.”
이진한은 자리에서 일어나 도서관을 뒤적거렸다.
언제 쓰였는지도 모를 오래된 책들, 낡은 티가 역력한 가구들. 사실 그것들엔 그다지 특별한 점은 없었다.
사실 그가 관심이 있는 건 로네 하나뿐이었지만, 경계심을 심어주지 않기 위해 감정을 숨겼다.
“누님은 어땠어? 만난 지 오래돼서 말이야.”
혹시나 정보를 얻어낼 수 있지 않을까.
이전이었더라면 세 번째 질문입니까? 하면서 물어왔을 테지만, 조금 전 식사 자리에서 제법 호감도를 딴 것인지 로네는 살짝 머뭇거리면서도 순순히 대답해주었다.
“사용자 「로마네콩티」는 친절하신 분이셨습니다. 제게 자신을 엄마라고 불러도 괜찮다고 하셨죠.”
“그럼 그렇게 불러. 사용자 「로마네콩티」라고 부르는 것보단 훨씬 낫네.”
“…제가 어찌 감히.”
“본인이 불러도 된다고 했잖아.”
이진한은 어깨를 으쓱였다.
처음 그녀의 말만 들었을 땐 단순한 사역마라고 여겼지만, 대현자의 눈이 시시각각 분석하고 있는 내용으로 보아 인지 정령의 계열인 듯했다.
용사 클래스와는 다른 초월지경인 교황 쪽의 특수 스킬로 만들어진 존재로 보인다. ‘월드’에서도 없던 것이기에 자세한 건 파악할 수 없지만, 사역마 같은 단순한 유기물이 아닌 이성을 지닌 구조체였다.
“밖에 나가본 적이 없다고 했지. 활동 범위는 이 섬으로 한정되는 건가?”
“이 지하로 한정됩니다.”
“밖에 나가고 싶지?”
“….”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이곳은 ‘월드’가 아니다. 게임 속이었더라면 로컬 NPC는 지정 구역을 벗어날 수 없었겠지만, 로네는 살아있는 생명체. 의지만 있다면 그 구속이 해제되었을 때 다른 곳으로 나갈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제 사명은 이곳을 지키는 겁니다.”
“22시간 뒤에 폐쇄되잖아. 그러면 끝나는 거 아니야?”
“그러면 저도 기능을 정지하는….”
“밖에 아까 먹었던 음식보다 더 맛있는 것들이 많다? 볼거리도 많고.”
원래 로네를 데려간다는 건 상정하지 않은 것이었지만, 《안식》과 닮은 그 외모를 보아하니 왜인지 애착이 갔다.
이리아 때와 비슷하지만 다른 경우로, 동생 같이 느껴져 놓고 갈 수가 없을 듯했다.
로네는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 듯싶더니 이내 한숨을 푹 내쉬며 대답했다.
“저는 이곳에 묶여 있습니다. 벗어날 수는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거야 해보기 전까진 모르는 법이지.”
“…저는 쓸모 없습니다. 할 줄 아는 건.”
“그건 내가 정해.”
구속은 그 육신에 한정되어 있다.
인지 정령은 상당한 고등의 존재다. 육신이 없어도 영체 상태로 존속할 수 있으며, 새로운 몸으로 옮겨갈 수도 있었다.
즉 AI나 인공지능같이 생각하면 된다. 만일 그것을 대현자의 기능과 합한다면….
“큼.”
머릿속에 스멀스멀 떠오르는 계획을 덮은 채 이진한은 가볍게 손바닥을 비볐다.
“자, 그럼 대충 쉬었고 다시 시작해볼까?”
도서관을 나가 검총으로 향하자 수북이 쌓인 검의 무덤이 보였다.
말은 여유롭게 했지만, 솔직히 초조한 심정이었다.
이대로 시간이 전부 흘러 이곳이 폐쇄된다면 영영 아스칼론을 손에 넣지 못하게 될 터.
“자, 해보자.”
가볍게 뺨을 두드린 이진한은 두 눈에 불을 켜며 진짜 성검을 찾아 나섰고.
“빌어먹을.”
시원하게 실패했다.
주어진 시간이 거의 끝나가는 데도 전체의 반절도 돌아보지 못했다.
“…어떻게 하실 건가요?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로네는 선택을 종용했다.
세 번째 질문을 사용할 것이냐.
그녀를 흘깃 바라본 이진한은 입가를 이죽거리며 「블랙 다이아몬드」를 꺼내 손에 쥐었다.
“뒤로 물러나.”
이제 두 가지 선택지 중 쉽지만, 뒤가 없는 쪽을 택할 차례가 온 것 같았다.
“네?”
로네는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어왔다.
이진한은 그런 그녀 앞에 강력한 배리어를 쳐준 뒤, 방대한 마력을 끌어올리며 이 공간 전체를 뒤덮었다.
“무, 무슨 짓을 하려고 하시는 건가요!”
“진짜 성검이면 이 정도 불꽃은 버티겠지?”
남은 하나의 방법은, 이 안을 전부 불살라 버리는 것이었다.
초고열의 화염을 퍼부으면 가짜는 전부 녹아내릴 터.
진짜 성검이라면 그 정도는 버텨낼 수 있으리라.
“아, 안 돼…!”
뒤에서 로네가 뭐라고 외쳐왔지만, 이진한은 가볍게 무시한 채 마법을 캐스팅했다.
대마도사 클래스 초월 마법 「죽음의 불꽃」
직관적인 이름답게 시뻘건 불꽃이 작열하며 사방에 뿜어져 나갔다.
초월지경에 오른 대마도사답게 그 불길은 완벽한 통제 아래 움직이며 벽이나 바닥을 그을리는 일 없이 병장기만을 모조리 녹여버렸다.
취이익.
그 어느 것도 촌각을 버티지 못했다.
겁화가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모든 것을 탐욕스럽게 집어삼켰을 찰나, 저 끄트머리 한쪽에 새하얀 빛을 내는 한 자루의 검이 새하얀 빛을 내뿜으며 고고하게 떠 올랐다.
“진작 이렇게 할걸. 저게 아스칼론이지?”
“….”
로네는 상식을 벗어난 상황에 입을 크게 벌린 채 얼어붙어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