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1.
오스칼 제국의 수도가 무너진 것을 전해준 프레이가 급히 자리를 떠났을 때, 그들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사실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하지만 마계 세력이 창궐한 와중 성왕인 그녀들 자신들의 궁금증 해소를 위해 붙잡아 놓을 수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본인이 직접 그 사실을 전하러 와준 것부터 이쪽을 신경 써주고 있다는 증거였다.
“….”
엘레오노라는 호수로 고개를 돌렸다.
햇빛을 받은 그 표면이 은은한 백색을 띤다. 자신들은 들어갈 엄두도 내지 못하는 그곳에서 그는 홀로 외로운 사투를 벌이고 있을 것이었다.
“마음이 심란한 건 알겠어요. 그래도 이상한 짓은 하지 말고 진정하도록 해요.”
일레이나는 혹시나 그녀가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선수를 쳤다.
반역자로 몰려 쫓겨나긴 했지만, 고향인 오스칼 제국의 수도가 무너졌다는 말이 주는 의미는 적지 않을 터다.
“네?”
하지만 엘레오노라는 무슨 말이냐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들었다.
위로의 말을 내뱉을 심산이었던 일레이나가 오히려 더 당황스러울 정도로 평온한 표정이었다.
“아니, 그쪽에 지인들이 많잖아요. 그래서 상심했을 줄 알고….”
“아.”
엘레오노라는 쓴웃음을 지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나 했더니. 그쪽에서 저에게 우호적이던 분들은 진작에 처형되거나 멀리 쫓겨났어요. 음, 그러네요. 안타깝고 슬프기보단 아쉽다고 해야 할까.”
“…아쉽다고요?”
“네. 할 수 있다면 제가 죽여버리고 싶었는데.”
“맞습니다.”
그녀의 말에 미르엘이 검 자루를 매만지며 동조했다.
둘은 아직 그 처절한 때를 잊지 못했다.
자신들을 따르고 돕던 이들 모두 역모로 몰려 죽거나 죽는 것보다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황실에 대한 충성? 황제가 주는 권위?
전부 바닥에 떨어진 돌멩이보다 가치가 없는 것이었다.
할 수 있다면 그들을 모두 쳐 죽이고 황실 깊숙이 관여한 마족을 단죄하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그러한 기회는 오지 않을 듯했다.
“그, 그렇군요.”
슬쩍 일레이나의 뒤로 물러난 이리아가 눈치를 보았다.
그간 어울려 지내며 나름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들의 이면에는 이런 어두컴컴한 모습이 숨어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평소의 모습과는 상당히 다르기에 괜한 공포심까지 드는 이리아였다.
“그렇군요.”
어쭙잖은 감상이 아니라 차라리 다행이다.
그리 생각하며 일레이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둘이 처음 그를 만난 과정도 순탄치 않다고 들었다.
복수심이 생기는 것도 당연한 일이지 않은가.
더는 온실 속의 황녀님이 아니었으니.
“그렇다면 이제 다들 한층 더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는 거예요. 마계가 작정하고 중간계를 침공한 이상 싸움은 더 심화하겠죠.”
일레이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이전보다 더 숱하게 강자들이 그를 찾아오리라.
가만히 있어도 폭풍의 핵이 되는 존재인데 용사라는 운명까지 지니고 있으니 마족들에게는 눈엣가시인 존재일 터.
필연적으로 막대한 이목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이제 어중간한 각오로는 그 옆에 있을 수 없어요.”
일레이나의 말은 다른 이들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하는 것이었다.
《영원》의 마법을 계승해 독자적으로 연구하는 과정에 제동이 걸렸다.
마음만은 벌써 「삼라만상」을 습득해 초월지경에 올라 있었지만, 현실은 그 열화판인 「사계」를 다루는 것도 벅찰 지경이었다.
“…맞습니다. 지금 상태로는 힘들겠지요.”
미르엘은 입술을 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의》의 검술을 배워 소드 마스터에 올랐다곤 하지만, 닥쳐오는 적 중 발에 채는 것이 마스터며 마도사였다.
고작 마인 한 명과의 싸움에도 목숨을 걸어야 하는데 어떻게 그 옆에 서 있겠나.
“….”
엘레오노라와 이리아 역시 고개를 숙였다.
“…그나마 유의미한 전력이 되는 건 프레이, 그녀뿐이겠죠.”
성국을 이끄는 성왕일 뿐만 아니라 같은 영웅인 《안식》의 후예.
즉, 여기 있는 이 중 그 누구보다 그에게 가깝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장 어떻게 할 수….”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엘레오노라의 말에 일레이나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가로챘다.
“거기서, 제안이 있어요.”
빠르게 강해지는 방법이 있다.
물론 자칫 잘못한다면 죽음에 이를 수도 있는 큰 리스크를 동반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성공한다면?
“확실한 건가요?”
“프레이가 보장했어요. 자신이 강해진 것도 그 시련을 넘어선 덕분이라고.”
한 쌍의 보랏빛 눈동자가 좌중을 훑었다.
자신은 이미 각오를 내렸다. 그러니 다른 이들 역시 할 수 있겠냐는 의사를 묻는 것이었다.
“…저는.”
곧 엘레오노라가 입을 열었다.
***
파스스─.
뭍으로 올라온 이진한이 발을 내딛자 밟힌 모래가 부서지며 기묘한 감촉을 주었다.
바다도 아니고 모래라니. 헛웃음이 나오는 상황이었지만, 호수 가운데 상어까지 있으니 그리 이상할 건 없었다.
“흠.”
섬은 오랫동안 인적이 닿지 않은 듯 고요한 분위기였다.
그리 크지 않은 면적일 터임에도 불구하고 울창한 수풀이 우거진 탓인지 원래 규모보다 더 커 보였다.
대현자의 눈이 섬 전체의 구조를 파악했다.
곧 숲 가운데 있는 작은 집 한 채를 발견할 수 있었고, 이진한은 망설임 없이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끼이익.
경첩이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안은 평범한 집의 풍경이었다. 주방, 거실, 그리고 침실까지. 특색이랄 것이 없는 공간이었다.
“누군가 묶은 흔적은 없는데.”
문을 열고 들어가면 《안식》, 그 누님이 맞아줄 거라는 기대는 무참히 배반당했다.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니었기에 그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며 집 안 구석구석을 수색했다.
“지하 쪽에 뭔가 있나.”
집과 달리 이 밑은 대현자의 눈으로도 꿰뚫어 볼 수 없는 무언가가 장치되어 있었다.
그렇다는 건 즉, 높은 확률로 지하에도 시설이 있다는 이야기였기에 그곳에 희망을 걸었다.
이진한은 집안 곳곳을 돌아다니며 물건들을 건드렸다.
그러던 찰나 책장에 놓인 화분을 들었을 때, 옆면의 벽이 움직이며 지하로 내려가는 통로가 나왔다.
“흠.”
통로는 컴컴했지만, 그깟 어둠 따위로는 대현자의 눈을 가릴 수 없었다.
그렇게 얼마를 내려갔을까, 통로는 처음으로 평지에 도달했다.
“술?”
펼쳐진 풍경은 다양한 술이 저장된 창고였다.
위스키, 포도주, 럼, 맥주 등등 셀 수 없을 정도의 술들이 나열되어 고고히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무슨 날짜가.”
근처에 있던 포도주 한 병을 꺼내든 이진한은 라벨에 쓰인 연도를 보고는 헛웃음을 토해냈다.
최소 천 년은 지난 것이었다.
슬쩍 주위를 돌아보니 대부분 비슷한 연도에 생산된 것이었고, 그나마 가장 최근에 만들어진 것이 아슬아슬하게 세자릿수에 걸친 것이었다.
퐁.
코르크 마개를 따자 향긋한 향이 퍼져나갔다.
신성함이 가득 찬 공간이라 그런 것인지 썩지 않은 채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 같다. 본래라면 먹을 엄두도 내지 못했겠지만, 이진한은 제 몸의 튼튼함을 믿고 그것을 한 모금 들이켰다.
“…맛 하난 죽이네.”
주당인 누님이었던 만큼 전부 좋은 술로만 갖춰놓은 듯하다. 곳곳에서 그녀의 손길이 닿은 흔적을 느낄 수 있었기에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이진한은 곧 다시 지하로 내려가는 통로와 마주했다.
“….”
적막한 통로 안으로 발을 내디디는 소리와 함께 포도주가 목을 넘어가는 소리가 뒤따랐다.
꽤 도수가 높은 것인지 벌써 알싸한 기운이 올라온다. 살짝 기분이 좋아지려던 찰나, 통로 끝에 도달한 이진한은 안쪽에서 보이는 풍경에 발걸음을 우뚝 멈춰 섰다.
“…어.”
그 너머의 공간은 도서관 같은 곳이었다.
빼곡한 책장이 벽을 둘러쌌고, 그 중심에 한 여성이 의자에 앉아 졸고 있는 듯 두 눈을 감고 있었다.
풀어 헤쳐진 새하얀 머리카락, 티 하나 없는 투명한 피부.
화이트와 바이올렛이 적절하게 혼합된 그 의복의 모습은 기억 속에 있는 장면과 정확하게 일치했다.
《안식》의 사제 「로마네콩티」
이 세계에서 온 뒤로 처음 만나는 동향 사람이었다.
이진한은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대현자의 눈으로 그녀를 살폈다.
‘살아 있다.’
생체 반응이 선명했다.
죽은 것도 아니고, 봉인된 것도 아니었으며, 멀쩡히 살아 숨을 쉬고 있었다.
저벅.
본능적으로 한 발자국을 내디뎠다.
그러자 굳게 닫혀 있던 그녀의 눈꺼풀이 잘게 떨리며 천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누님.”
자신을 직시하는 선명한 푸른 눈동자에 이진한은 나지막하게 내뱉었다.
분명 자신이 아는 그녀임을 직감했다.
저 나른한 눈매도, 귀찮아하는 표정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 눈동자도.
기억 속의 모습과 한치의 다름이 없었다.
“…코드 《지혜》. 확인되었습니다.”
“뭐?”
하지만 이진한의 감상은 그녀에게서 나온 말에 의해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규정에 따라 당신은 세 가지 질문을 하실 수 있습니다.”
“잠깐, 잠깐!”
이진한은 다급한 태도로 외쳤다.
로마네콩티는 왜 그러냐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푸른 에메랄드 같은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았을 분이었다.
“누님! 접니다! 진한이! 방금 깨어나서 아직 정신이 없는 것 같은데…!”
“오류입니다. 문장을 질문형으로 구성해주십시오.”
“….”
등골을 스치는 싸한 감각에 이진한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치 기계와 같은 태도다. 머릿속으로 수많은 상념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는 무엇이지?”
“첫 번째 질문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여성은 잠시 눈을 감았다 뜨며 대답했다.
“저는 코드 《안식》, 사용자 「로마네콩티」의 사역마입니다. 이 도서관의 사서이자, 세 가지 질문을 받을 수 있으며, 모든 답변이 끝날 시 작동을 정지합니다. 답변의 범주는 사용자 「로마네콩티」가 저장한 정보에 제한됩니다.”
사역마.
동시에 대현자의 눈이 그녀의 말이 사실임을 알려왔다.
“하아….”
이진한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끝까지 차 있던 기대감이 한순간에 사그라드는 것이 느껴졌다.
근처에 있던 빈 의자를 끌고 와 그녀 앞에 앉은 이진한은 머리를 움켜쥐었다.
‘제기랄.’
이 자리에 있던 것이 정말로 누님이었더라면 바람의 정령왕 실피드와의 대화에서도 해소하지 못했던 의문을 들을 수 있었을 텐데.
그리고 그 존재 하나만으로도 큰 버팀목이 되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어째서 널 여기 남겨둔 거지? 내가 이리로 올 걸 알았나?”
“두 번째 질문입니까?”
“…잠깐만.”
이진한은 말을 멈췄다.
그녀는 세 번의 질문을 할 수 있다고 했다.
문답이 모두 끝나면 작동을 정지한다니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함이 옳았다.
“애매하네. 세 번밖에 못 하다니.”
“가동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서둘러주시길 바랍니다.”
“가동 시간?”
“이곳으로 들어오신 시점으로부터 정확히 24시간이 흐르면 저는 남은 횟수와 관계없이 정지하고, 이곳 역시 폐쇄됩니다.”
“…그런.”
생각지도 못한 페널티였다.
잠시간 머리를 싸맨 채 고민하던 이진한은 지금 가장 필요한 질문을 하기로 했다.
“아스칼론은 어디 있지?”
“두 번째 질문 인지하겠습니다.”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뒤, 의자의 끝을 꾹 눌렀다.
그와 동시에 한쪽 벽면이 내려가며 어디론가 향하는 길이 나타났다.
“성검 아스칼론은 이 너머에 있습니다.”
“그래.”
최우선은 아스칼론을 손에 넣는 것이었다.
이진한은 사역마를 따라 그 안으로 향했고, 이내 눈 앞에 펼쳐진 풍경에 헛웃음을 흘렸다.
“이건, 뭐.”
검, 검, 검, 검.
아니, 검뿐만 아니라 수많은 병장기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이래서는 어느 것이 아스칼론인지 찾는 것도 한세월이 걸릴 듯했다.
“세 번째 질문을 사용하시겠습니까? 저는 어느 것이 진짜 성검 아스칼론인지 알고 있습니다.”
“두 번째 질문으로는 안 되나?”
“두 번째 질문은 성검 아스칼론이 어디에 있는지를 물으셨습니다. 저는 당신을 이곳에 안내한 것으로 그 답변을 했지요. 어느 것이 아스칼론이냐는 것은 세 번째 질문으로 충당하실 수 있습니다.”
“빌어먹을 가성비네.”
“참고로 이 안에서 한 가지만 선택하실 수 있습니다. 선택과 동시에 이 공간은 폐쇄되는 구조이니, 유의해주시길 바랍니다.”
사역마는 그리 말한 뒤, 이진한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세 번째 질문을 사용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