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0.
타다다닥!
호수의 가장자리로부터 도움닫기를 시도한 이진한은 힘껏 땅을 박차며 호수로 달려나갔다.
“…윽.”
기세만 보아선 순식간에 그 위를 뛰어넘을 듯했지만, 얼마 가지 못해 막대한 압력에 짓눌려 호수로 떨어지고 말았다.
티 하나 없던 표면이 무너져 내렸다.
물이 아니라 유사, 늪지대에 빠져드는 그런 감각이 전신을 감싸며 이질감을 연출해냈다.
“숨이 쉬어지네?”
물속임에도 불구하고 자유롭게 호흡할 수 있었다.
어차피 인간의 범주를 한참이나 뛰어넘은 육신이라 몇 시간 정도는 호흡 없이 버텨낼 수 있었지만, 운신의 제약이 사라졌다는 건 희소식이었다.
문제는 밑으로 내려갈수록 몸을 옥죄는 압박이 점점 더 거세졌다는 것이었다.
“끙.”
고작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디딘 것뿐인데 절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초월지경에 오른 대마도사가 염동력으로 자신의 몸을 쥐어짜고 있는 듯한 감각이다. 하지만 이진한은 두 눈을 부릅 뜬 채 다시 한 걸음을 내디뎠고.
“이런 씨팔!”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와 동시에 몸을 내리찍던 저항이 사라진다. 마치 길을 열어주는 것처럼 평범한 물길의 흐름이 그를 반겼다.
“…후우.”
다시 뭍 위에 올라간 이진한은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닦아내며 고개를 들었다.
“어땠어요?”
“나오려니까 그냥 열어주네?”
“당연하죠. 호수의 시련은 도전자를 죽이려는 게 아니니까요. 숨도 쉴 수 있으셨죠?”
프레이는 이상한 것이 있냐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너도 들어가 본 적이 있어?”
“네. 저는 절반 정도 성공했어요. 그즈음에 표시를 해놨으니까 들어가시면 볼 수 있을걸요?”
“…절반 정도나 나아갔다고?”
이진한은 헛웃음을 흘렸다.
몇 발자국만 내디뎌도 몸이 박살 날 것 같은데 그걸 견디고 저 깊숙한 곳까지 나아갔다니.
역시 성왕이란 이름은 허투루 다는 것이 아닌가.
“왜요? 절반 까지는 베르너 님이라면 어렵지 않을 텐데.”
“나는 고작 두 발자국 걸으니까 몸이 부서질 것 같던데?”
“두 발자국이요?”
“…?”
프레이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자, 무언가 잘못된 것을 직감한 이진한 역시 고개를 들었다.
“들어갈 때 무언가 해야 하나?”
“아뇨, 딱히. 그냥 신성력만 운용하면서….”
“신성력을 운용해야 한다고?”
“네. …설마 안 하셨어요?”
“나는 그냥 가호만 둘렀는데.”
“일단 여쭙겠는데, 그 가호라는 건?”
“물리 저항, 마법 저항, 이동 속도 버프 이런 거.”
“다 마법이죠?”
“신성 마법도 있었지. 자가 치유 계열의.”
용사 클래스의 초월 스킬인 「불굴」이라면 설사 신체가 뒤틀려 부서지더라도 순식간에 회복할 수 있을 터다.
문제는 회복한다고 하여도 금세 부서진다는 것이었지만.
“…제 실수에요. 현자님은 당연히 아시리라 생각했어요.”
프레이는 고개를 저은 뒤 두 손을 가슴 위로 모았다.
“대천사의 날개는 쓸 수 있으시죠?”
“당연하지.”
웅웅.
프레이는 찬란한 빛을 피워 올려 한 쌍의 날개를 만들어냈다.
곧 그녀는 자신의 몸을 감싼 그 신성을 가리키며 이진한을 바라보았다.
“호수를 넘기 위해서는 이처럼 전신을 물샐틈없이 신성력으로 감싸야 해요. 오래된 전승인데 모르셨나 보군요.”
“처음 듣는 이야기다.”
“그런 종류의 가호나 마법은 전부 무용지물이 되니까요. 지금까지는 맨몸으로 들어가신거나 다름 없어요. 저는 오히려 그렇게 해서 두 발자국이나 내디디신 게 신기할 따름이에요.”
“…그러면 진짜 무식하게 한 거네.”
이진한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천사의 날개를 몸에 둘렀다.
그러면서 한쪽 옆에서 물장구를 치고 있던 일행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마 한동안 이러고 있을 것 같으니까 너희도 여기 머물면서 수련하도록 해. 성국에는 좋은 것들이 많을 테니.”
“그 부분은 맡겨두세요. 제가 신경 쓰도록 할게요.”
프레이가 굳게 고개를 끄덕이며 확언했다.
일행 중 가장 뛰어난 일레이나보다 몇 배 더 상위 경지에 있는 그녀이니 믿고 맡길 수 있는 부분이었다.
“조심하세요.”
“힘들면 바로 나오시고요.”
엘레오노라와 이리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해왔다.
일레이나와 미르엘 역시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들과 짤막한 대화를 끝으로 이진한은 다시 호수를 향해 몸을 날렸다.
【1012:48:24】
1천 시간의 경계선이 허물어지기 직전.
그리 촉박한 건 아니었지만, 고인물로서의 감각은 옅은 조급함을 불러일으켰다.
“그래도.”
성검 아스칼론.
성검(聖劍)이라 불리는 검을 얻는 과정이다.
투자할 가치는 충분히 있었고, 더욱이 저 섬에 《안식》과 관련된 무언가가 있다면 반드시 도달해야 했다.
“그 아줌마. 나에 대한 기록도 개떡같이 남겨두고서.”
프레이는 어째서 자신이 검은 현자임을 알자 호색한이라는 색안경을 꼈는가.
그에 대한 의문은 성역으로 오기 전 신성 왕국에 보관된 영웅들의 기록을 읽자 해소할 수 있었다.
색마, 호색한.
숫한 여자를 울린 바람둥이.
입만 번드르르한 카사노바.
물론 자신들은 서로 면면을 잘 알고 있어 농담 식으로 적은 내용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후대 사람들이 보기에는 영웅이 직접 기록한 정사가 아닌가.
그렇기에 애써 설명해보아도 프레이의 의혹 섞인 시선을 풀어내기는 힘들었다.
“뭐가 됐든, 가보면 나오겠지.”
100시간 정도는 이 호수에 쓸 생각이었기에 과감하게 발을 내디뎠다.
신성력을 몸에 둘러야 한다는 말은 사실이었는지 이전과 같은 압박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어느 기점을 넘자 다시금 스멀스멀 손끝이 저려 왔다.
그렇게 12시간이 지났다.
“…저건.”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던 이진한은 바닥에 그어진 짧은 선을 볼 수 있었다.
섬까지 3분의 1 정도 되는 지점에 새겨진 흔적으로, 아마 프레이가 도달했다는 부근인 듯싶었다.
“일단 좀 쉬자.”
몸에 힘을 풀자 조금씩 뒤로 밀려나며 호수 표면으로 떠올랐다.
얼굴만 밖으로 내민 채 고개를 돌리자, 저 멀리 뭍에서 미르엘과 이리아가 대련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정령 검사인 이리아의 실력은 예사롭지 않은 것이었지만, 소드 마스터에 오른 미르엘의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래도 서로 적당히 실력을 조절하며 겨루는 듯하기에 흐뭇한 표정으로 그녀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밥 먹는 것도 힘드네.”
인벤토리에 보관해둔 음식으로 대충 허기를 달랜 이진한은 다시 호수 안쪽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한 걸음만 더 내디디면 프레이가 도달한 한계였다.
아직은 별 무리 없이 견딜 수준이었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발을 내디뎠고, 이내 두 눈을 부릅떴다.
꽈득, 꽈드득.
이전까지의 과정은 장난이었던 것처럼 차원이 다른 압박이 휘몰아쳤다.
몸을 둘러싼 대천사의 날개 역시 버티지 못한 채 찢겨 나갔고, 피부가 벌게지며 타격을 입었음을 알려왔다.
“쉽지는 않다, 이거지.”
프레이는 포기했지만, 자신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더 이를 악물며 앞으로 나아갔고, 점차 심해지는 반동을 견뎌내었다.
꽈드득.
근육이 뒤틀리며 살이 뭉개졌다.
찢어진 피부 위로 피가 터져 나오자 시야가 새빨갛게 물들며 그 잔상이 퍼져나갔다.
“…이러다 상어라도 나오겠네.”
이진한은 천천히 호흡을 내쉬며 쓴웃음을 지었다.
물론 바다도 아니고 이런 호수에 상어가 있을리….
샤아악!
물살을 가르는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잿빛과 흰색이 어우러진 기다란 몸, 등 위로 솟은 지느러미와 날카로운 이빨.
더없이 익숙한 동물의 생김새였다.
호수에 상어가 왜 나오는가.
그런 의문을 따질 틈도 없이 상어는 물살을 가르며 그에게로 질주해왔다.
“…이 시팔!”
시련도 정도껏 해야지 완전 막 나가자는 것이 아닌가.
근육이 뒤틀린 팔을 들어 올렸을 찰나, 검대에 매어 두었던 템페스트에서부터 목소리가 들려왔다.
-돕겠습니다.
쿠구구궁─.
템페스트에서 뿜어져 나온 날 선 바람이 소용돌이를 만들어냈다.
어지간한 몬스터 따위는 단숨에 산산조각 낼 날카로운 바람이었다. 하지만 상어의 가죽은 강철보다 더 단단한 것인지 아무런 흠집 없이 그것을 돌파해 이진한에게로 나아왔을 뿐이었다.
콰악!
날카로운 이빨이 그의 어깨를 사정없이 물어뜯었다.
설사 그렇다고 한들 이진한에게는 유의미한 타격을 주기 힘들었을 테지만, 장비나 방어구의 가호는 무시하는 것인지 어렵지 않게 살점을 찢으며 뼈를 짓뭉갰다.
“끄윽…!”
어깨 위로 닥쳐오는 화끈한 통증에 이진한의 눈에 핏발이 섰다.
이때까지의 싸움에서 수많은 상처를 입었지만, 이토록 여실히 느껴지는 건 처음이었다.
하지만 더 뼈아픈 것은 상어에 물린 것보다 힘겹게 내디뎠던 걸음이 몇 발자국이나 허사가 되었다는 점이었다.
꽈아악.
이진한은 한쪽 팔 정도는 내어줄 각오를 다졌다.
물린 어깨 쪽의 팔은 들어 상어의 입안을 움켜쥐었다.
그러곤 반대 손으로 주먹을 움켜쥐어 분노를 담아 힘껏 그 옆면을 후려갈겼다.
쩌억!
물속에서도 소리가 울려 퍼질 정도의 강렬한 일격이었다.
상어는 그 충격에 기절한 것인지 잠시 배를 까뒤집더니, 이내 정신을 차리곤 금세 몸을 움직여 도망쳤다.
“…한 마리라서 다행이네.”
두 마리 이상이었더라면 상대하는 데 곤욕을 치를 뻔했다.
꽈득, 꽈드득.
절반쯤 넘어가자 일반적인 가호로는 버티지 못할 정도로 상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렇기에 「불굴」의 가호가 발동했고 상처를 입음과 동시에 회복하며 비등한 차이를 보였다.
“이래서 용사를 위한 시련이라는 건가.”
어지간히 회복력이 좋은 이들이 아니고서야 이곳을 넘을 엄두도 내지 못할 듯싶었다.
문제는 자신 역시 간당간당했다는 점.
바로바로 회복하긴 했지만, 압력의 강도가 예사롭지 않을 지경까지 닥쳐와 숨 쉬는 것도 어려워지게 되었다.
“…후우.”
그렇게 호수로 들어온 지 24시간이 지났을 때.
이진한은 섬을 목전에 두었다.
다만, 그 전신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점점 더 거세지던 압박은 몸 곳곳을 갈가리 찢었고, 물속에서 새빨간 기류를 풍겨내며 점차 호수를 물들이고 있었다.
“이 고생을 했는데 별것 없으면….”
예배당 하나 정도는 부숴버릴지도 몰랐다.
이진한은 기필코 그러리라 다짐하며 섬 위로 기어 올라갔다.
***
“…방금 뭐라고 하셨나요?”
이진한이 호수로 들어간 지 하루가 지났다.
미르엘과 이리아는 그간 수없이 많은 대련을 반복했고, 일레이나와 엘레오노라는 각자의 마법에 대해 토론했다.
그 가운데 프레이의 권유로 신성 왕국이 자랑하는 영약과 포션을 섭취했으며, 나름대로 알찬 시간을 보냈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날이 밝음과 함께 프레이가 가져온 소식은 엘레오노라가 평정을 잃고 쥐고 있던 스푼을 떨어뜨렸을 정도로 놀라운 것이었다.
“…오스칼 제국의 수도가 무너졌다고 합니다. 온갖 마족과 마물이 풀려나 시민을 학살했고, 황궁 역시 저들의 손에 넘어갔다는….”
프레이는 바로 직전에 들어온 정보가 쓰인 양피지를 내밀었다.
엘레오노라는 황급히 그것을 받아들며 읽어나갔고, 종래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감싸 맸다.
“…결국 우려하던 일이.”
“예상보다 빠르군요.”
미르엘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황실이 이미 마족의 손에 떨어진 것은 기정사실이다. 하지만 아직 저들에게 쓸모가 많을 것이 분명하기에 물밑에서 이용하리라 생각했지, 이렇게 본격적으로 나서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여러분은 여기서 현자 님을 기다리도록 하세요. 저는 해야 할 일을 하러 가보겠습니다.”
프레이는 짤막한 인사를 끝으로 자리를 떠났다.
마계의 세력이 본격적으로 창궐한 이상, 이렇게 여유롭게 이야기만 나누고 있을 시간이 없는 것이었다.
‘어느 정도 준비해놓긴 했지만, 예상보다 너무 빨라.’
손쓸 틈도 없이 대륙에 핏빛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