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169화 (169/210)

◈ 169.

프레이는 옷자락의 끝을 움켜쥐었다.

-내가 《지혜》의 검은 현자다.

그녀가 그 말이 뜻하는 바를 이해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검은 현자? 당신이 그 영웅 중 한 명이라고요?”

“그래.”

“그걸 저보고 믿으라는….”

쿵─.

결계 내부로 막대한 존재감이 짓눌렀다.

말을 이어나가던 프레이의 목소리가 일순간 짓눌렸을 정도로 막대한 압력.

선홍빛 입술이 벙긋거리며 소리 없는 아우성을 토해내었다.

“이래도 믿기 힘든가?”

이진한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Lv.1008 「성왕 프레이」

프레이는 마족과의 계약을 통해 한계를 돌파한 마인들을 제외하면 검호에 이어 그가 두 번째로 만나는 초월지경의 강자였다.

이곳까지 오며 비약적으로 상승한 이진한의 레벨은 1107.

수치로 따지자면 고작 100레벨 정도의 차이였지만, 그 간극은 절대로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방안은 이미 「삼라만상」의 술식으로 장악해둬 풀려난 기세가 새어나갈 염려는 없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프레이는 손끝을 떨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럼, 정말로….”

“그래. 쉽사리 믿기 어렵다는 건 알아. 너도 네 위치가 있을 테니.”

사실 이때까지 순순히 믿어준 다른 이들이 이상한 것이었다.

이터널 마탑주 쪽은 「삼라만상」의 제어를 뺏어 직접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고 해도 베르하임 국왕을 비롯한 다른 이들은 그저 압도적인 강함만으로 믿어주지 않았는가.

이쪽이 불순한 의도를 지닌 채 작정하고 속아 남기려고 하는 사람이었으면 큰일이 날 수도 있었다.

“시원하게 정체를 오픈했으니까 잡다한 이야기는 생략해도 되겠지?”

“어, 음, 아. 그러니까 그렇게….”

프레이는 마치 풀리지 않던 퍼즐이 끼워 맞춰진 것처럼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중간중간 추임새를 내뱉었다.

“이해했습니다. 그러면 현자 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좋을까요?”

“아니. 이전처럼 대하도록. 아, 내친김에 그 용사라는 이름은 좀 빼도록 하고.”

낯간지러운 칭호인지라 그리 듣기 좋지는 않았다.

짧게 고개를 끄덕인 프레이는 푸른 눈동자로 이진한의 모습을 살폈다.

용사라고 알고 있을 때는 쓰기 좋은 장기 말로 보였지만, 고대 영웅 중 한 명인 것을 안 지금은 왜인지 대하기가 살짝 어려워졌다.

‘아니, 나는 성국의 성왕이자 《안식》의 후예. 그러니 현자님께서도 내게 정체를 밝혀주신 거겠지.’

거리낄 것 없다.

어차피 이제 한배를 탄 운명이 아닌가.

“…그래요. 생뚱맞게 용사가 튀어나오는 것보단 고대 영웅이 깨어나서 용사의 운명을 거머쥐었다는 게 더 개연성 있겠죠.”

“개연성은 둘 다 없는 것 같은데.”

이진한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곤 이내 표정을 거두며 진지한 기색으로 프레이를 바라보았다.

“이제 부연 설명은 필요 없겠지?”

“…네. 무엇을 말씀하시는 건지는 알겠어요.”

프레이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머뭇거리며 손을 움찔하더니, 이내 각오를 다진 듯 이를 악물며 블라우스를 여미고 있던 리본을 잡아당겼다.

스르륵.

옷깃이 열리며 가슴팍이 드러났다.

이진한은 그녀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입을 벌렸다.

“서, 성국에도 영웅님들에 대한 기록은 쓰여 있어요. 현자님은 분명 호색한이라고 하셨죠?”

자신의 몸을 바치겠다는 것이었다.

외간 남자에게 몸을 보이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프레이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예정된 일이긴 했지만, 아무래도 부끄러운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촉촉해진 눈동자로 고개를 들었을 찰나, 정신을 차린 이진한이 일갈을 내질렀다.

“아니, 이 미친! 성검이 있는 위치를 알려달라고!”

“…네, 네?”

“성왕 맞아? 대체 머릿속에 뭐가 들었는지.”

혀를 차는 소리에 프레이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 그러면 처음부터 그렇게 말씀하셨어야죠! 오해했잖아요!”

“…내가 잘못한 거라고?”

되려 적반하장 해오는 그녀의 모습에 이진한은 헛웃음을 흘렸다.

“정말! 세심하지 못한 분이시네요! 딱 봐도 그런 분위기였잖아요?”

“너, 막 엘레오노라 황녀와 미르엘 수호 기사의 금지된 사랑 같은 거 좋아하지?”

“…어어어, 어떻게.”

순식간에 정곡을 찔린 프레이가 이번엔 다른 의미로 손끝을 떨었다.

동대륙에 아주 선풍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황녀와 기사의 금지된 사랑 이야기는 이제 서대륙에도 그 마수를 뻗치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섭렵해오던 그녀가 그 소식을 접하는 것도 당연지사.

수많은 사람의 정신을 빼앗았을 정도로 매력적인 그 내용에 푹 빠져들었고, 근래에 읽은 도서의 분류가 한쪽으로 편향되어 있을 만큼 큰 영향을 받았다.

“큼. 아스칼론은 성역에 있는 호수의 정중앙에 있다고 합니다.”

“말 돌리는 게 어설픈데.”

“성검이 필요 없으시다고요?”

“누가 필요 없대? 그래서, 성역에는 바로 갈 수 있나?”

“평소에는 결계로 둘러쳐져 있어 문을 열려면 몇 시간 정도 걸립니다. 어차피 밤이 깊었으니 내일 해가 뜨면 가시죠. 그전까지 준비해놓고 있을게요.”

“그런가.”

이진한은 슬쩍 창밖을 바라보았다.

프레이의 말대로 이미 밤이 깊은 시각이었다.

다른 이들도 전부 자고 있을 터니 그녀 말대로 날이 밝은 이후를 기약하는 것이 좋아 보였다.

“그래. 그러면 이따가 부탁하지.”

“…알겠어요.”

대부분의 이야기가 일단락되었다.

물론 아직 전부 끝맺음 진 것은 아니었지만, 일단 오늘 밤의 회동은 여기까지였기에 프레이는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 편안한 밤 되세요.”

“미꾸라지 한 마리가 흩트리고 가서 편안하게 될지는 모르겠네.”

“이렇게 매력적인 미꾸라지 보셨나요.”

문가에 선 그녀는 이진한을 향해 혀를 한 번 내밀고는 방을 나섰다.

작은 소음과 함께 문이 닫혔을 때, 프레이는 조용한 복도 가운데 멈춰 선 채 등을 벽에 기댔다.

“영웅이라니.”

검은 현자, 용사.

둘 중 하나라도 무시하기 어려운 것인데, 한 사람의 몸으로 그 두 개의 운명을 짊어졌다.

‘당신이 원하는 방향은 무엇인가요?’

고요한 침묵 가운데 그녀의 시선이 대답 없는 하늘을 향했다.

***

날이 밝자 이진한을 비롯한 그 일행은 프레이의 안내를 받아 성국의 성역으로 들어섰다.

사실 성역이라고 그리 특별한 풍경은 없었다.

대부분 울창한 숲으로 뒤덮여 있었으며, 다른 곳보다 자연적으로 서린 마나의 농도가 짙다는 것만이 조금 달랐다.

“이 안쪽에 호수가 있다고요?”

“네. 사실 성역이라 규정된 이 구역 자체도 그 신성한 호수를 지키기 위한 방침이죠.”

일레이나의 말에 짧게 고개를 끄덕인 프레이는 손을 들어 저 너머를 가리켰다.

“다 도착했어요.”

“오.”

우거진 수풀을 넘자 새하얀 빛깔을 띠는 호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크기도 꽤 넓은 것이 조각배를 타고 한참을 나아가야 할 정도였다.

이진한의 시선이 닿은 것은 호수 정중앙에 있는 작은 섬이었다.

“저기에 아스칼론이 있단 말이지.”

“네.”

“…물에 신성력이 서려 있어요. 그냥 포션으로 사용해도 최상급은 될 것 같은데요?”

“호수 가까이에 있는 땅도 마찬가지네요.”

저마다 감탄을 토해내며 그 현상을 눈여겨보자 프레이는 짐짓 자랑스럽다는 태도로 가슴을 폈다.

“자연스러운 일이에요. 수도에서 올리는 기도의 신성이 이곳으로 모이고 있거든요.”

“신성이 이곳으로 모여요?”

“네. 여기야말로 성국의 심장이나 마찬가지인 곳이에요. 반대로 말하자면 이곳이 무너지면 성국도 휘청거린다는 이야기죠. 원래는 이곳에 오는 것도 저와 용사님을 제외하고는 안 되는데, 뭐 괜찮겠죠.”

프레이는 시원하게 과거의 규정들을 넘겼다.

어차피 자신이 성왕인데 뭐라 할 사람도 없지 않은가.

더군다나 그가 책임진다고 했으니 무슨 일이 일어나면 뒤처리는 확실하게 해주리라 믿는 것이었다.

웅웅웅.

그때, 한 줄기 바람이 그들 사이에 휘몰아쳤다.

예상치 못한 현상이었기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될 찰나, 이진한은 템페스트에서 솟구친 실피드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야?”

-느껴지시지 않는 겁니까?

“뭐를?”

-…《안식》의 기운이 말입니다.

“《안식》? 그 《안식》의 기운이라고?”

이진한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저 작은 섬에 그녀가 있다는 소리인가?

《안식》의 사제, 「로마네꽁티」

자신보다 다섯 살은 더 많은 누님이었다.

원래는 마법사를 하고 싶었는데, 자기는 몸치에 바보라 편히 플레이할 수 있는 사제 클래스를 선택했다고 했다.

태생이 금수저라 손쉽게 종교를 만들어 ‘월드’ 내에서 손꼽는 규모로 키워냈다.

그가 현자 클래스에서 종교를 만들어 팔라딘과 추기경 클래스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누님의 도움이 컸다.

그런데 그 누님이 저 섬에 있다고?

“…이건 생각지도 못했는데.”

이진한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천년이란 시간이 있었으니 아마 자신처럼 봉인되어 있을 확률이 높았다.

“알고 있었어?”

“아니요, 전혀. 저도 처음 듣는 소리예요.”

프레이 역시 덩달아 심각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천 년간 수많은 용사가 아스칼론을 얻기 위해 이 호수를 넘고자 했죠. 하지만 모두 하나 같이 전부 실패했답니다.”

“어째서?”

“호수를 넘지 못했으니까요.”

간단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이진한은 그 속에 숨겨진 뜻을 눈치채곤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모종의 장치가 되어 있군.”

“네. 모든 마법이 금지되어있고, 스킬도 사용이 불가해요. 섬으로 들어가려면 호수 안쪽을 걸어가는 수밖에 없어요.”

“위를 날아가는 것도?”

“네.”

이진한은 곧바로 마법을 발동했다.

대현자의 눈을 활성화함과 동시에 초월지경에 오른 대마도사의 경지를 극한으로 끌어올렸고, 온갖 마법과 가호를 몸에 두른 채 하늘로 몸을 날렸다.

아니, 날리려 했다.

“…진짜네.”

초월지경에 오른 대마도사도 예외는 없는 것인지 구축된 술식 위로 마나가 제대로 모이지 못하며 흩어져 버렸다.

몇 번이나 시도해봐도 같은 현상이기에 그는 미련 없이 마법을 포기했고, 고개를 돌려 프레이를 바라보았다.

“그러면 직접 걸어서 다녀오면 되지?”

“네. 도전하셨던 분들도 다 그렇게 하셨어요.”

“배를 띄울 순 없나요?”

이리아가 슬쩍 손을 들고 물었다.

하지만 프레이는 애매한 미소만을 지은 채 호수를 가리켰다.

“한 발만 담가보시겠어요?”

“…네, 뭐. 어렵지 않죠.”

이리아는 신발을 벗고 조심스럽게 호수 위쪽으로 한 발자국 내디뎠다.

하지만 그녀의 발은 호수의 표면에 머무를 뿐 그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막이 존재하는 것처럼 두둥실 떠 있어 밀어낼 뿐이었다.

“이건….”

“그 상태로 앞을 향해 걸어보세요.”

어렵지 않은 요구였기에 그대로 할 찰나, 이리아는 기겁하며 발을 빼낼 수밖에 없었다.

“뭐, 뭐죠 이건!”

일순간 발이 부서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다른 이들도 호기심에 발을 내밀었다가 같은 감각을 느낀 듯 숨을 토해내며 몇 발자국이나 뒤로 물러났다.

“일반 물과 밀도가 달라요. 농밀한 신성력을 머금고 있어서 위든 아래든 막대한 압력이 짓누르고 있답니다.”

이리아를 비롯해 일레이나, 엘레오노라, 미르엘 그 전부는 발을 담그는 것에도 실패했다.

“재밌는 방식이네.”

대현자의 눈으로 프레이의 말이 사실임을 확인한 이진한은 다시금 온몸에 가호를 둘렀다.

그다음 호수 안으로 슬쩍 발을 내딛자, 다른 이들과는 달리 너무나도 쉽게 그 안으로 파고들 수 있었다.

“나는 용사여서 가능한 건가?”

“아니요, 일정 경지 이상이면 모두 그 안에 들어갈 수 있어요. 일행분들은 아쉽게도 그러지 못한 것이고요.”

“…최소한의 커트라인이 초월지경인가.”

이진한은 헛웃음을 토해내었다.

저 안에 무엇이 있길래 이리 험준한 난관을 주는가.

내친김에 앞으로 걸음을 내딛자, 다른 이들이 느꼈던 것처럼 막대한 압박이 사방에서부터 밀려들었다.

“어느 선까지는 용사의 운명을 부여받지 않는 이들도 나아갈 수 있었어요. 하지만 그 이상은 무리더군요.”

“해봤다는 말인데.”

“이왕 성왕이 됐으니 궁금증은 해결해봐야 하지 않겠어요?”

“맞는 말이지.”

후우.

짧게 한숨을 토해낸 이진한은 호수 중앙을 바라보았다.

고작 한 발자국 내디뎠을 뿐인데 짓누르는 압박감이 예사롭지 않다. 중앙까지 도착하려면 대체 얼마만큼의 무게를 견뎌야 할까.

“…그래, 까짓거 해보자.”

이런 무식한 노가다는 자신이 제일 잘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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