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8.
“함께 나들이라도 다녀오신 건가요?”
성왕 프레이.
그녀는 살짝 머뭇거리는 태도로 물었다.
그 모습이 영락없이 사랑에 빠진 소녀와 같았기에 유리아는 짐짓 당황하는 표정으로 짧게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베르너 님의 부탁으로 공방에 다녀온 차입니다.”
“공방. …베르너 님인가요.”
벌써 이름으로 부를 정도로 혼자만 친해졌냐는 그 부루퉁함에 유리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어찌나 이 사랑스러운 분인지.
그녀는 이진한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럼 저는 돌아가 보겠습니다. 두 분께선 조용히 이야기 나누시지요.”
“…아앗, 두, 둘은 부끄러운데.”
프레이는 몸을 배배 꼬며 쑥스러움을 표했다.
이진한으로서는 딱히 거절할 일이 아니었고, 마침 하고 싶은 말도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이곤 방문을 열었다.
유리아가 떠난 뒤 프레이는 머뭇거리는 태도로 방 안에 발걸음을 내디뎠다.
이런 으슥한 시각에 남자와 단둘이 한 공간에 자리하는 것이 사뭇 낯선 태도였다.
그렇기에 어색한 동작으로 맞은 편에 앉았을 때, 이진한은 인벤토리에서 찻잔을 꺼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 가면은 언제까지 쓸 거지?”
예전에 아레나 길드에서 넘겨준 대륙 정세에 관한 정보에는 신성 왕국과 현 성왕인 프레이에 관한 내용도 기록되어 있었다.
그녀는 원래 성녀로서 어릴 적부터 성국에서 자라왔다.
그러던 차 오 년 전 전대 성왕을 비롯한 고위 성직자들이 대거 자리를 내려놓고 본래의 본분으로 돌아가 수양하겠다고 은퇴한 일이 있었다.
다음 성왕의 자리를 두고 치열한 경쟁이 발생한 것은 당연한 일.
숱한 유명세를 가진 성직자들이 성왕이란 이름을 거머쥐기 위해 발버둥 쳤지만, 모두의 예상을 뚫고 성왕에 오른 것은 다름 아닌 프레이였다.
겉으로는 이제까지 별일 없이 평탄히 성국을 다스려왔다고 되어 있었다.
하지만 물밑으로는 온갖 개혁과 첨삭이 진행되었다. 권력의 집중을 피하고자 나뉘어 있던 권한과 책무가 중앙으로 집권 되었고, 반대의 목소리를 내던 이들이 모두 숙청되었다.
이전 성왕과 고위 간부들 역시 수양이라고 하긴 했지만, 소리소문없이 사라진 것의 배후에는 그녀가 있다고 판단할 정도였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아레나의 추측일 뿐이었다.
이면에 너무 이질적인 일들이 많았기에 그러한 결론을 냈고, 이진한은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에 그 점으로 푹 찔러본 것이었다.
“가면이라뇨?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어요.”
프레이는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린다.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인지 어리둥절한 기색이 강했다.
하지만 숱한 군상을 만나온 이진한은 그 표정이 잠깐이나마 무너졌던 것을 포착할 수 있었다.
“그러면 서로 진솔한 이야기는 나눌 수 없겠네.”
그렇기에 아쉬운 건 없다는 표정으로 문가로 눈짓했다.
망설임 없는 축객령이었다.
프레이는 잠시간 침묵한 채 천천히 문가를 돌아보았다.
다분한 의도가 들어있는 행위였다.
다른 사람이 보았다면 매몰차게 자신을 내치는 태도에 슬퍼하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이진한은 그 행동이 문밖에 다른 사람이 있는지 인기척을 확인하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미지 신경을 많이 쓰는군.”
이진한은 피식 웃은 채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방을 두르는 결계가 펼쳐진 것을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두 팔로 가슴을 가렸다.
“겨, 결계를 치고 무슨 짓을 하려는 건가요!”
“….”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반응이 튀어 나왔다.
아레나 길드에서 준 정보가 맞나 싶을 정도로 이질감이 없었다.
하지만 이진한이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는 뜻으로 헛웃음을 흘리자, 새빨간 안광이 스며든 어둠 사이에서 빛이 났다.
“이미지 신경을 많이 쓴다고요? 당연하죠. 독재자라는 인식을 바꾸기 위해 몇 년을 노력했다고 생각하시나요.”
프레이는 앞으로 기울였던 몸을 등받이에 기댔다.
팔걸이에 두 팔을 올리고, 다리를 꼼으로 이제껏 없던 진중한 분위기를 연출해내었다.
“처음은 좀 삐걱거렸어도 손쉽게 구워 삶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일행이 전부 여자인 것으로 보아 여색을 밝히는 사람이라.
그렇기에 남자에 숙맥인 여성상을 연기하면 어렵지 않게 그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이제까지 많이 해왔던 것이 아닌가.
지켜주고 싶은 사랑스러운 성녀의 모습에서 고난과 역경을 헤치고 성왕으로 우뚝 서려는 자신의 모습을 연출했다.
이전에 지녔던 사랑스러움을 잃지 않으며 힘겹게 애쓰는, 자신의 말 한마디에 설사 불구덩이라고 할지라도 몸을 내던질 수 있게 해주는 개연성을 심어주었다.
그것이 겹겹이 쌓여 작금의 성국을 이루었으니, 용사 한 명 정도 구워 삶는 것은 일도 아니었을 텐데.
“아쉽게 되었네요. 용사님과는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프레이는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이진한은 어림도 없다는 표정으로 손가락을 까딱였을 뿐이었다.
“겉과 속이 다른 여자는 질색이라.”
“모르셨나요? 여자는 전부 겉과 속이 다르답니다. 일행으로 계신 분들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짧게 한숨을 내쉬던 프레이는 이내 문득 깨달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아니, 이미 네 명이나 있는데 한 명이 늘어도 상관없잖아요? 넷이나 다섯이나. 귀찮게는 안할 테니까 그냥 원할 때 와서 잠이나 자고 가세요.”
“…나보고 기둥서방 짓을 하라고?”
“용사와의 유대는 그만큼 중요하니까요. 성왕의 남편이 용사라면 다들 든든해 하겠죠.”
“네 입지도 한층 더 단단해지고?”
“이해가 빠르시네요. 어떻게 되어도 서로 이득 보는 일이겠죠. 일행 분들 설득은 제가 맡을 게요. 별 다른 잡음 없이 끝낼 자신은 있어요.”
“하하.”
이진한은 헛웃음을 흘렸다.
행적을 보아 어느 정도 가면을 쓰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일단 그건 둘째치고 정산부터 해야지.”
이진한은 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은 채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이쪽은 초대를 받아 성국에 오던 중 큰 피해를 보았다.
마왕과 일기토를 하고, 최악의 경우엔 죽을 수도 있었던 사건이었다.
설마 그것을 입 싹 닫고 지나가려고 하느냐는 그 시선에 프레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 건에 관해서는 정말 할 말이 없어요. 변절자들은 이미 오 년 전에 전부 다 정리한 줄 알았거든요.”
프레이는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어렸을 적부터 성녀로서 신성 왕국에서 키워졌다.
그녀는 뛰어난 두뇌를 가지고 있었다.
명석했고, 객관적이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선과 악의 뚜렷한 경계를 구분했고, 그렇기에 성국이 부패로 물들어가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 수 있었다.
“집이 무너져 가는 게 싫었어요. 그래서 방법을 갈구했죠.”
이때처럼 열심히 공부하면 정식으로 성녀가 되었을 때 모두 정리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날이 갈수록 병세가 심해지는 그 모습들에 그저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러다 문득 알아차렸죠. 성녀라는 휘광과는 별개로 제게 사람을 따르게 하는 능력이 있다는 걸.”
세간에서는 카리스마니, 포용력이니 하는 종류의 것일 터다. 그렇기에 프레이는 그것을 이용해 착실히 기반을 닦아나갔다.
물밑에서 아무도 모르게 여러 조직과 접선했고, 종래에는 성인이 되어 정식 성녀가 되던 해에 일시에 썩은 가지들을 정리해버렸다.
그 가운데 이단 심문관 조직인 도미니온이 톡톡히 활약했다.
변절자들은 물론이고 흑십자단 같은 이단들도 모조리 솎아내어 다시 성국의 신성함을 되찾고자 했다.
하지만 아직도 그 잔뿌리가 남아 있다는 것에, 심지어 팔라딘이라는 중추라는 것에 한숨만 새어 나올 뿐이었다.
“허심탄회하게 말씀드릴게요. 원래는 할 수 있는 건 모두 해드릴 생각이었어요. 그만큼 용사란 중요한 존재니까요.”
“성검도?”
“네. 유리아를 통해 말씀드린 것과 같아요. 파손된 성검을 고칠 수도 있고, 봉인된 성검에 도전하실 수도 있어요.”
“둘 다 하지.”
“이미 준비해 놓았답니다.”
어렵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프레이의 모습에 이진한은 옅은 기대를 품었다.
“그래서 봉인되어 있는 성검은 무엇이지?”
엑스칼리버가 실존하는 세계관이다. 잘만 한다면 최강의 성검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에 손끝이 살짝 떨렸다.
“아스칼론이에요. 원래는 브리튼 쪽에 봉인된 엑스칼리버를 가져오고 싶었지만, 그건 아주 옛적에 소실되었다고 하더군요.”
“소실되었다고?”
“네. 지금 그곳에 있는 건 가짜에요. 공국의 이름값을 높이기 위한 장치죠. 아, 이거 브리튼 공왕과 저를 제외하고는 모르는 사실이니 말씀하시면 안 돼요?”
“…가짜라니.”
이진한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래도 아스칼론 역시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을 정도로 유명한 성검이었다.
자신이 원래 지니고 있던 듀란달에도 뒤지지 않는 수준일 터.
“용사님께서 지닌 검이 듀란달이었죠.”
“그래.”
“혹시 어디서 얻으셨는지 알 수 있을까요? 겸사겸사 용사님의 출신도. 그간 행적은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는데, 그 이전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베일에 감춰줘 있었거든요.”
“…아.”
이진한은 문득 깨달았다.
그녀는, 이들은 자신이 누군지 모른다. 유리아가 말했던 통과 의례도 자신을 신용해도 되는지 판별하는 절차일 것이리라.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바라보았다.
하늘 위에 걸린 한 쌍의 달은 여전히 그곳에 있다. 손을 뻗어 커튼을 치고는 방안을 감싼 결계를 한층 더 강화했다.
“날 아직 완전히 믿지 못하겠지?”
“피차 마찬가지 아닌가요? 사람을 수십이나 처죽인 성녀를 믿으실 수는 있고요?”
“방법은 있지. 아주 간단한.”
이진한은 인벤토리에서 양피지 두 장을 꺼내 들었다.
강력한 구속력을 지닌 마력 계약서였다.
본래라면 이런 것까지 할 생각은 없었지만, 이 짧은 대화를 통해 여실 없이 깨달았다.
작금 상황을 타파하는 데 이 여자의 존재는 절대적이다. 꼭 함께 가야 할 뒷배라고 느꼈기에 그러한 조치를 취한 것이었다.
“…마력 계약서인가요. 좋아요. 그것 만큼 확실한 건 없겠죠.”
프레이 역시 그렇게 느꼈는지 차라리 이게 낫다는 듯 후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보였던 선명한 신성의 잔흔은 분명 용사의 것이었다.
몸도 내줄 각오였는데 마력 계약서라고 피할 이유가 있을까.
웅웅.
곧 서로 규제가 얽힌 계약이 성사되었다.
프레이는 다른 말 하기 없다는 표정으로 두 손을 들며 입을 열었다.
“저는 이미 전에 말씀드린 것이 전부에요. 성녀일 적에 물밑에서부터 성국을 장악해 전대 성왕을 비롯해 썩어 빠진 고위 성직자들을 전부 쳐 죽였어요. 이 사실이 외부로 알려진다면 큰 파국이 일어나겠죠.”
“그렇지. 사실 너무 쉽게 말해주는 게 아닌가 싶었어.”
“해볼 만한 도박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리고 여차하면 묻을 생각도 했었으니까.”
“자신감이 대단하네.”
“무력적으로 그런다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그렇게 한다면 저희 쪽도 피해가 클 텐데 제가 그러겠어요?”
신성 왕국의 이미지와 성왕이라는 이름의 무게를 이용하려 했다는 뜻이었다.
“자, 이제 말씀해주세요. 당신이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프레이는 진지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설사 유희 중인 드래곤이라 할지라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사실 그 부분을 유력하게 의심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레드 드래곤이 직접 마경까지 행차할 이유가 없지 않는가.
그러한 시선에 이진한은 씩 웃으며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정체를 밝히는 건 오랜만인데.”
검은 깃털이 흩날리며 오스칼 제국의 문양이 허공에 떠 올랐다.
『검은 현자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며.』
《지혜》를 상징하는 뚜렷한 증표.
프레이는 이미 그가 검은 현자의 계승자인 것을 알고 있었기에 잠자코 그것을 바라보았지만, 뒤이어 나온 이야기에 두 눈을 부릅떴다.
“내가 《지혜》의 검은 현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