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7.
처음 방문한 신성 왕국은 어딜 가나 새하얀 대리석으로 꾸며져 있어 웅장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대륙에서 가장 큰 종교 단체라는 것은 허울이 아닌 듯 시설뿐만 아니라 곳곳에서 돌아다니는 이들에게도 경건한 신앙심이 느껴졌다.
그 가운데 이진한 일행은 우선 휴식을 취했다.
마왕과의 싸움도 거쳐왔고, 그만한 난리가 있었다.
당장 대화를 나눌 분위기는 아니었기에 하루 정도 여유를 가지고자 하는 것이었다.
【1023:48:24】
궁전 내부에 있는 온천에 몸을 담구고 있던 이진한은 허공에 떠 오른 시간의 유예를 바라보았다.
“도통 오르질 않네.”
이전처럼 누구와 싸우거나 쓰러뜨려도 시간이 잘 늘어나지 않았다.
하다못해 마인들을 잡아도 넉넉히 주었거늘, 마왕 정도 되는 상대의 팔을 잘라냈음에도 미동조차 없다.
‘사도와 접촉해서 그런가?’
전세를 낸 온천 가운데를 가볍게 헤엄치며 복잡한 머리를 떨쳐냈다.
본래는 시녀들이 시중을 들겠다고 했는데, 그는 전부 거부한 채 밖으로 내보냈다.
눈치를 보아하니 여차하면 성왕이 직접 오고 싶어 하는 기색이었기에 한 발짝이라도 이 안에 들어온다면 용사고 뭐고 때려치우고 성국을 나갈 거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조용히 사색할 시간이었다.
흑십자단, 그리고 마왕.
성국으로 오는 와중 전혀 예상치 못한 만남이었다.
애초에 흑십자단이라는 조직이 있는 것도 몰랐고, 순탄하게 이쪽 여정이 시작될 줄 알았다.
하지만 이번 싸움으로 얻은 것이 없는 건 아니었다.
“맥스웰이 말했지.”
그가 섬기는 마왕 자간은 자신과 손을 잡고 다른 마왕을 쓰러뜨리는 것으로 자신의 세력을 키우길 원했다.
자간 본인은 중간계에 딱히 욕심이 없다. 마계의 지배력을 공고히 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니, 굳이 중간계까지 눈 돌릴 여유는 없다고 하였다.
마왕 안드라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의 태도를 보아 중간계의 침공을 원하지 않는 마왕도 다수 있는 듯했다.
하긴 72명이나 되는 마왕이 있다면 그 각각의 생각과 의지가 다를 터.
상위 위계의 마왕이 방침을 정한다고 하여도 모든 마왕이 각자의 세력을 일구고 있는 만큼 그와 반대되는 생각을 품은 이들도 있으리라.
자신에겐 잘 된 이야기였다.
가장 최선은 그런 마왕들을 찾아 물밑에서 손을 잡은 채 연계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조력을 받는다면 상위 위계의 마왕을 막아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들 역시 믿을 수 없는 존재란 건 마찬가지지만.’
당장 안드라스만 보아도 상황이 불리해지자 나르함을 버리고 도망가지 않았던가.
마왕이라고 하기에 옹졸한 모습이었지만, 그만큼 상황 변화에 예민하게 반응했다는 것이니 그리 희소식은 아니었다.
이진한에게 있어 차라리 패배하더라도 우직하게 싸워오는 상대 쪽이 더 편리한 대상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화나네. 몇 대 더 때려놓을걸.”
이진한은 나르함을 떠올리며 분통을 터트렸다.
어쩐지 첫 만남 때부터 비호감인 인상이었다.
안드라스가 도망친 직후 화가 풀릴 때까지 패버렸다고 생각했건만, 아직 해소하지 못한 앙금이 남은 듯했다.
나르함은 현재 사지의 힘줄이 잘린 상태로 성궁 지하 감옥에 수용된 상태였다.
흑십자단은 애초에 척결 대상이었고, 용사를 음해하려는 죄목을 물어 성왕이 직접 엄벌한 처벌을 지시했다.
휘하 성직자들도 이단 심문관들이 조사하고 있다니, 머지않아 남은 끄나풀들도 밝혀질 듯했다.
‘…현재 가장 신경 쓰이는 건.’
이진한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상태창을 띄워 올렸다.
가장 신경 쓰이는 건 마왕이나 신성 왕국 같은 요소가 아닌 시간의 유예 쪽이었다.
최악의 경우 이대로 유예가 늘어나지 않는다면?
【1023:48:24】
1천 시간, 41일.
한 달하고도 열흘이 조금 넘는 시간 안에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을까?
당연히 불가능이었다.
당장 마왕이 일부의 힘만 가지고 현현한 상태에서도 고전을 했다.
만일 정말로 본신으로 강림을 한다면 얼마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버리겠지.
최우선 과제는 작금 들이닥친 이 상황을 개선하는 것이었다.
시간의 유예만 어떻게 풀어내어도 여유를 챙길 수 있을 터.
“끄응.”
이진한은 온천 난간에 등을 기댄 체 미간을 찌푸리며 머리를 굴렸다.
시간의 유예가 닥쳐온 근본적인 이유는 천 년이란 시간의 여파였다.
자의인지 타의인지 몰라도 봉인되어 시간이 정지되었고, 깨어난 이후 그 업보를 감당해야 하는 것이었다.
해결책은 두 가지였다.
누군가 그것을 대신 감당해주던가, 아니면 무로 되돌려놓던가.
하지만 천 년이란 세월을 누가 감당해주는가.
드래곤? 아니, 이걸 감당하려고 하면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할지 그 방법조차 감히 잡히질 않았다.
유일하게 이러한 부류의 고민을 상담할 수 있을 법한 존재인 아이슬란 역시 갑작스럽게 동면에 들어 창구가 막혀버렸다.
그나마 현실적인 방안이라면 유예 자체를 없애는 것이었다.
“아, 현실에서도 이렇게 고민해본 적은 없는데.”
이진한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문질렀다.
사실 자신은 그리 똑똑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세계로 넘어온 뒤 캐릭터의 스펙과 동화된 것인지 본래보다 생각할 수 있는 역량, 쉽게 말해 사고의 최대 폭이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더군다나 사고의 보조를 돕는 대현자의 어시스트도 있으니 어지간한 것은 생각하는 것만으로 해결책이 나왔다.
천 년이란 시간을 감당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시간을 돌려버리면 된다. 세계 자체를 되돌리는 건 불가능하니 거스르는 것은 자신이 주체가 될 터.
“…초월 마법 중에 시간에 간섭하는 게 있었지. 「삼라만상」이랑 잘 섞어보면 괜찮을 것 같은데. 이 부분은 일레이나랑 좀 상담해봐야겠네.”
현재 성국의 대장장이들에게 복원을 맡겨둔 무기들과 마찬가지였다.
원래는 몇 달에 한 번 정도 손질하면 됐지만, 마왕 정도 되는 이와 격렬히 싸워 전부 크게 손상되었다.
특히 신도 무라마사는 손상의 폭이 커 자신이 직접 수리해야 했다.
시간의 유예를 해결하는 방법 역시 손상된 원인을 고친다는 것에서 같은 맥락이었다.
“후우.”
온천을 빠져나온 이진한은 조용히 복도를 걸었다.
일행은 이미 쉬고 있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굳이 찾고 싶지도 않았기에 배정받은 방으로 돌아가자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인영이 있었다.
“유리아?”
푸른 머리카락의 여성이 고개를 돌렸다.
이전보다 한참은 더 초췌해진 몰골로, 그간 고생이 심했는지 전체적으로 축 늘어진 분위기였다.
“아.”
“그간 고생이 많았다고 들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부족한 탓에.”
그녀는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고개를 푹 숙이며 울먹거렸다.
문득 그 모습을 보니 그간 자신이 너무 심하게 대하지 않았나 싶었다.
나이만 보아도 일레이나나 다른 이들과 비슷할 터인데, 신성 왕국이라는 이름만으로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았다.
더군다나 지금은 흑십자단에 구속되어 고초를 겪은 직후가 아닌가.
“설마 나르함이 흑십자단일 줄은….”
“괜찮아. 그리 큰 손해는 없고, 얻은 것도 적지 않으니까.”
턱.
이진한은 울먹거리는 그녀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어주었다.
유리아는 잠시 훌쩍거리며 가만히 있더니, 이내 얼굴을 문지르곤 고개를 들며 다시 평소의 담담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부족한 몸이나마 다시 베르너 님의 담당을 맡아도 되겠습니까?”
“상관없어.”
“…감사합니다. 성왕 폐하께서도 이 사건에 대해 예의 주시하고 계십니다. 현재 상층부에 숨어든 이들도 솎아내고 있으니 조만간 전부 정리할 수 있을 겁니다.”
“그쪽은 맡기지.”
이진한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설사 그렇다고 한들 어디에 첩자가 숨어있을지 모른다. 어차피 자신과 일행 말고는 절대 믿지 않을 작정이기에 그리 말해주었다.
“혹시 어딜 가실 생각이십니까?”
“공방으로 가고 싶은데. 안내해주겠어?”
“아, 맡겨 놓은 무기 때문에 그러십니까? 적어도 하루 이틀은 더 걸릴 터인데. 아니라면 성검 때문에…?”
“아니, 내 검의 수리다. 이건 남에게 맡기지 못할 정도로 파손되었거든.”
이진한은 무라마사를 꺼내 쥐었다.
검호를 쓰러뜨린 직후 탈취한 그것은 그간 톡톡히 활약해주었다.
이대로 잃기엔 아쉬워서 수리할 수 있다면 해볼 생각이었다.
“지금 상태로 보아서 고칠 수 있을지는 반반일 것 같은데, 일단 해봐야지.”
“알겠습니다. 제가 안내해드리도록 하죠.”
이진한은 곧 그녀를 따라 성궁 내부에 있는 대장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성국답게 대장장이들도 전부 신도인 것인지 그 천장 중심에 성호를 상징하는 새하얀 십자가가 새겨져 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팔라딘 유리아입니다. 용사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아, 이분이! 대장간을 맡은 마이스터 베카림이라 합니다!”
베카림은 수염이 더부룩한, 어느 곳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대장장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용사님의 무기는 이틀 정도는 더 손을 보아야 전부 고칠 수 있을 듯합니다. 원하신다면 하루까지 단축할 수 있긴 하지만….”
“아니, 천천히 부탁합니다. 저는 공방을 빌리러 왔습니다.”
“공방을 빌린다? 그냥 저희에게 맡기면 되실 것을….”
베카림의 의문에 이진한은 금이 간 무라마사를 꺼내 들었다.
툭 치면 부러질 것 같을 정도로 파손된 검신의 모습에 그는 신음을 흘리며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직접 수리하고 싶습니다.”
“대장 일에도 조예가 있으시군요. 알겠습니다. 제 자리를 빌려드리지요.”
“감사합니다.”
별문제 없이 자리를 잡은 이진한은 소매를 걷어 올리며 망치를 쥐었다.
화롯불에서 새어 나온 열기가 금세 주위를 감싼다. 고맙게도 템페스트에서 바람이 흘러나와 그 열기를 식혀주었다.
“그러면….”
조심스럽게 무라마사의 검신이 두들겨졌다.
어지간한 대장장이를 뛰어넘는 숙련도를 지니고 있어 혹시나 고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고 있었다.
하지만 망치질이 백번도 채 넘어가기 전에 날카로운 파열음이 그의 귓가를 울렸다.
파각!
“…아.”
푸른 검신이 이제는 손쓸 도리가 없을 정도로 부러지며 반으로 나뉘었다.
상태창에 적힌 무라마사의 특성이 사라진 것을 보아 검으로서의 기능을 잃은 것일 터.
여기서는 어떠한 수를 써도 살릴 수 없기에 이진한은 착잡한 마음으로 그 조각들을 인벤토리에 넣은 채 발걸음을 돌렸다.
“잘 되셨나요?”
“아니. 무리더라고.”
아끼던 무기 중 하나를 잃었다.
그 사실에 이진한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발걸음을 옮겼다.
검으로는 아직 그라나다도 있고 템페스트도 있었지만, 그 상실감은 쉬이 지우기 어려운 것이었다.
“…안타깝네요.”
유리아도 그 심정을 조금은 아는지 함께 옆을 걸으며 슬픈 표정을 지어주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 쉴 테니까 내일 보자.”
“예. 성왕 폐하께서도 내일을 고대하고 계실 겁니다.”
이제는 더 할 일이 없었기에 방으로 돌아가 쉬고자 했다.
유리아는 그를 배웅해주기 위해 함께 그 앞까지 걸어갔고, 슬슬 어두워지기 시작한 그때 문 앞을 기웃거리던 한 여인을 발견했다.
“…성왕 폐하?”
“읏!”
깜짝 놀란 얼굴의 성왕이 등허리를 꼿꼿이 폈다.
“….”
잠시간 둘의 시선이 마주치며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성왕은 곧 정신을 차렸는지 헛기침을 내뱉으며 말했다.
“크흠, 잘 쉬고 계시는가 싶어서요. 결코 불순한 의도는 없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