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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166화 (166/210)

◈ 166.

“쯧.”

진홍의 보옥이 무참히 베어나가는 것을 본 이진한은 찡그린 얼굴로 혀를 찼다.

진홍의 보옥은 초월 마법 중에서도 가장 빠르고 안정적으로 발동할 수 있는 하위 마법.

하지만 이제 이 정도로는 앞으로 맞서 싸울 이들에게 치명상을 주지 못할 것으로 보였다.

‘그간 너무 다른 클래스에 집중했나 보네.’

완전한 초월지경에 오른 클래스는 대마도사와 용사뿐.

그렇기에 다른 클래스의 전력을 올려놓는 게 좋다고 판단했지만, 아무래도 너무 대마도사 클래스를 등한시했나 싶었다.

돌아가면 초월 마법의 연구도 서둘러야겠다.

그렇게 생각했을 찰나, 서로 마주보고 있던 이진한과 안드라스의 시선이 동시에 한 곳으로 향했다.

쿠구구궁─!

하늘 위로 선명한 마력의 잔향이 들이닥쳤다.

불꽃, 아주 시뻘건 불꽃이 칙칙한 하늘의 색을 물들이며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건.”

“외부에서 누군가 결계를 발견했나 봅니다. 이렇게까지 일찍 들킬 리 없는데….”

안드라스가 미간을 찌푸리자, 심각한 얼굴의 나르함이 중얼거렸다.

“이쪽에 조력자가 많거든.”

결계 자체를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어차피 로그가 남았을 테니 텔레포트 게이트를 조사하면 금방 이쪽의 전이 좌표를 알아낼 수 있었을 테지.

하지만 결계 위에 들이닥친 이만한 힘은 자신의 일행과는 한참 동떨어진 것이었다.

‘일레이나도 아닌 것 같고, 나탈리가 움직였나?’

현재 중간계 수호자의 총책이라는 막중한 자리를 맡은 그녀가 자신의 기운이 사라진 것을 느끼고 급히 이곳으로 달려왔을 수도 있었다.

“하늘에 띄우겠습니다.”

나르함이 허공에 손을 휘두르자 하늘 일부가 투명해지며 그 너머의 풍경을 비쳤다.

익숙한 얼굴의 일행들, 그리고 신성 왕국의 법복을 입고 있는 팔라딘과 추기경들, 끝으로 붉은 비늘이 뒤덮인 날개를 펄럭거리며 위용을 떨치고 있는 레드 드래곤까지.

“흠.”

다른 이들은 둘째치고 드래곤과 맞붙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인 듯 안드라스는 짧게 신음을 내뱉었다.

“안타깝네. 아쉽지만, 더 싸움을 이어나가는 건 힘들 것 같군.”

“누가 보내준다고?”

이진한이 템페스트와 용아청성창을 움켜쥔 채 이죽거리자,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어쩌겠는가. 결계가 부서지면 이 몸을 유지하지 못 하거늘.”

“…안드라스 님. 이야기와는 다르지 않습니까.”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된 것을 어떻게 되었는가.”

나르함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여기서 무조건 용사를 쓰러뜨려야 했다.

아니, 쓰러뜨리지 못해도 최소한 반신불수는 만들어야 자신이 빠져나갈 구멍이 열렸다.

하지만 지금 이진한은 두 눈에 투지를 활활 태워 올린 채 날카롭게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모양새. 여기저기 상처는 입었지만, 쉽사리 떨칠 수 있지 않아 보였다.

“그럼 저는….”

“미안하군. 아쉽게 되었네.”

“안드라스!”

“어차피 흑십자단은 자네가 마지막이 아니지 않은가. 뒤는 후임자와 잘해보겠네. 대의를 위한 숭고한 희생, 경의를 표하지.”

안드라스의 몸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이대로 현현을 끝내고 마계로 돌아갈 생각인 듯 점차 그 기운이 미약해지고 있었다.

“어딜.”

땅을 박찬 이진한은 템페스트를 강하게 움켜 쥐었다.

용사 클래스의 신성이 그 위로 찬란히 빛들며 형태를 구축한다. 그것이 매섭게 허공을 베어 갈랐지만, 안드라스는 허허 웃으며 자신의 왼팔을 들었다.

서걱─.

시체처럼 창백한 팔이 잘려 나가 바닥에 널브러진다. 하지만 안드라스는 이미 육체를 벗어나 사라진 상태였다.

-팔 한쪽은 기꺼이 주도록 하지. 조만간 다시 찾아가겠네, 용사여. 그때 결판을 내도록 하지.

“…이런 빌어먹을.”

귓가로 조소를 짓는 듯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남은 것이라곤 잘려나간 팔 한 짝과 자리에 우두커니 얼어붙은 나르함 뿐.

이진한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잘 알겠지? 저쪽 놈들과 손 잡으면 항상 이러한 결과만 남을 뿐이다.”

나르함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사라진 안드라스의 흔적을 바라보다 퍼뜩 정신을 차리곤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내 실수를 인정하겠소이다! 그러니…!”

“어, 그건 당연한 일이고.”

두둑.

템페스트와 용아청성창을 바닥에 박아 넣은 채 빈손을 들어 올린 이진한은 손가락의 관절을 꺾으며 뼛소리를 내었다.

“우리도 밀린 업보 좀 청산해야지?”

갑작스럽게 마왕까지 불러와 싸운 탓에 심신미약까지 걸린 상태였다.

“이 대가는 그리 가볍지 않을 거다.”

곧 결계 안쪽으로 나르함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

나탈리가 브레스를 쏟은 이후에도 그들은 갖가지 방법을 모두 시도해보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멀쩡히 형태를 유지하던 결계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갑자기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츠즈즈즈─.

“어, 어! 결계가 무너집니다!”

제일 먼저 그 이변을 발견한 팔라딘의 외침에 따라 잠시 그 앞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그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모두가 침묵한 채 긴장한 시선으로 그것을 바라보았고, 이내 안쪽에서 두 인영이 허공을 박차며 절벽 위까지 뛰어 오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툭.

이진한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미 안쪽에서 보았기에 새삼스럽지 않은 풍경이다. 그는 손에 쥐고 있던 고깃덩이를 내던지듯 놓으며 씩 웃었다.

“기다렸지.”

“베르너 님!”

제일 먼저 다가온 것은 일레이나를 비롯한 네 여인이었다.

그녀들은 넝마가 된 이진한에게 다가가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그를 살폈다.

“엉망인 걸 보니 안쪽에서 한바탕 하셨나 보네요.”

“그러게요. 한번 다쳤다가 수복된 흔적이군요.”

불굴의 가호와 엘릭서가 활약했다고 해도 단시간에 완전 회복 상태로 돌아올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녀들은 날카롭게 그 흔적을 포착하며 이진한을 다그쳤다.

“마왕이 쌔긴 쌔더라. 너희는 다친 곳 없지?”

“마왕? 마왕이라고 하셨습니까?”

성직자들 쪽에서 한 여인이 걸어 나왔다.

눈부신 금색 머리카락에 새하얀 피부. 어깨와 가슴에 새겨진 표식을 보아 신성 왕국의 고위층인 듯하다. 잠시간 두 눈을 가늘게 뜨며 그 여인의 정체를 유추하던 이진한은 곧 무언가를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성왕인가.”

“용사님을 뵙습니다. 부족한 몸이나마 그 자리를 맡고 있습니다.”

“흠.”

이진한은 성왕의 뒤를 넘어 성직자들을 바라보았다.

팔라딘과 추기경들. 그들은 온갖 감정이 얼룩진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와중이었다.

‘머리 박고 사죄해도 모자랄 판에.’

살짝 나쁜 마음이 든 그는 가볍게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러자 허공에서 주박의 사슬이 솟구치며 꽁꽁 싸매고 있던 무언가를 토해내었다.

촤르륵!

사슬이 풀려나며 안쪽에 있던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낸다. 안드라스가 도망치기 직전 그의 팔을 잘라낸 것으로 신성의 힘이 마기의 흐름을 차단한 덕분에 형태를 잃지 않고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컥!”

“우웩…!”

성왕은 괜찮았지만, 근처에 있던 팔라딘과 추기경들이 그 강력한 마기에 헛구역질하며 물러났다.

더러는 바닥에 쓰러져 실신한 이들도 있을 정도였다.

“성국의 고위 성직자라는 이들이 이리 약한 모습을 보이면 어떻게 해.”

“…무례를 용서하시길.”

이진한이 인상을 찌푸리자 성왕이 가볍게 손을 휘둘러 마왕의 팔을 감싸는 결계를 만들어냈다.

사실 그는 맨 처음에 성국이 자신을 다른 곳으로 보내 죽이려는 줄 알았다,

흑십자단이란 것도 허울 좋은 이름이 아닌가.

하지만 마왕이 등장했을 시점부터 그럴 가능성이 작다고 판단하였다.

‘만에 하나.’

정말 저들이 마왕과 손을 잡았다면 마계와 싸우기 전에 성국부터 엎어버려야겠지만.

“내가 지금 너희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란 건 알고 있지?”

기껏 초대에 응했더니 이런 상황이다.

변절자가 아니란 걸 증명해보라는 시선에 성왕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주신과 성왕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결코 용사님께 해를 가할 목적을 지니고 있지 않음을.”

금색 머리카락 위로 찬란한 신성의 빛이 떨어져 내렸다.

대현자의 눈으로 보아도 명백한 진실을 말하고 있다.

그래도 이 대가는 혹독히 받아낼 생각이었기에 고개를 끄덕여주곤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레드 드래곤 나탈리.

이제껏 잠자코 있던 그녀를 바라보았다.

-괜찮으신 거 맞죠? 갑자기 사라지셔서 얼마나 놀랐는데요.

-미안,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어떻게 할 여유가 없었다.

-일단 해결된 것 같으니 나중에 이야기해주세요. 제가 여기 더 있으면 저들이 기절하겠네요.

말단 성직자들이나 동행한 벨데르의 경비병들은 나탈리가 내뿜는 드래곤 피어 영향 아래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녀의 등장만으로 드래곤이라는 뒷배를 가지고 있다, 는 것을 얻었기에 이진한은 감사한 마음을 가지며 말했다.

-고맙다. 나중에 연락할게. 크루시아한테도 안부 전해줘.

-예. 그때까지 건겅하시길.

작게 고개를 끄덕인 나탈리는 곧 날개를 펄럭이며 자리를 떠났다.

그녀의 날갯짓이 만들어낸 광풍에 펄럭이는 모자를 억누르고 있던 일레이나는 슬쩍 이진한의 옆으로 다가와 입을 열었다.

“저기 고깃덩어리가 범인인가요?”

“그래. 팔라딘 나르함. 그가 날 이 결계로 데려왔다.”

“대략적인 이야기는 성왕이 해주셨어요. 흑십자단인지 뭔지 하는 단체가 용사를 마왕 침략의 존재로 규정하고 있다고.”

“잘 알고 있네. 내가 있으면 마계가 중간계를 침공할 인과율을 준다고 하더라. 그러더니 정작 자신은 마왕을 이곳에 불러내 날 죽이려고 하다니.”

정말 모순된 녀석이라며 이진한은 발치에 놓인 고깃덩어리를 툭 찼다.

“끄, 으으.”

나르함은 죽지 않았다.

그저 죽기 직전까지 수십 대를 얻어맞아 전신의 뼈가 박살 나고 살이 터졌을 뿐. 신성 왕국에 돌아가서 치료를 받으면 무리 없이 회복할 터였다.

‘그 뒤로도 혹독한 고문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말이야.’

신성 왕국의 이미지는 잘 포장해 있지만, 이단이나 변절자 같은 존재들에게는 거침이 없다.

오죽했으면 성왕 직속으로 이단 심문관인 도미니온이란 조직까지 있지 않은가.

“정말 미친 놈들이네요.”

“맞아요. 말의 앞뒤가 하나도 맞지 않아요.”

일레이나가 거리낌 없는 욕설을 내뱉자 다른 이들도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

성왕은 결계에 봉인 된 마왕의 팔과 고깃덩어리가 된 나르함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용사의 존재는 앞으로 마계와 싸우는 데 큰 요소로 작용한다. 하지만 초장부터 이리 뒤틀려 버렸으니 벌써 머리가 아파올 지경이었다.

“성왕 폐하.”

“…무슨 일이죠?”

그때 뒤쪽에서 한 팔라딘이 조심스러운 얼굴로 다가왔다.

곧 그가 전달한 내용에 성왕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어요.”

“예.”

그녀는 곧 자신의 일행에 둘러 싸여 있던 이진한에게로 다가가 인기척을 내었다.

“용사님.”

“어.”

퉁명스러운 반응이다.

성왕은 내심 용사라는 이름에 친밀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 반응에 섭섭했지만, 내색하지 않은 채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유리아 경이 구출되었다는 소식입니다. 흑십자단의 본부로 보이는 건물에 억류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다소 상처는 입었지만, 발견 즉시 치료에 들어가 생명의 문제는 없다고 합니다.”

“…그건 다행이네.”

“일단 돌아가시겠습니까? 장소가 그리 좋지 않으니.”

성왕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이곳은 마경이었다.

나탈리가 있을 때는 그 영향으로 억눌린 마물들이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녀가 사라지자 저 멀리서부터 스멀스멀 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러지.”

마왕과의 전투로 피로한 이진한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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