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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165화 (165/210)

◈ 165.

“주신의 이름과 성국의 명예를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저희는 기필코 용사님을 음해하려는 목적이 없습니다.”

성왕은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흑십자단 역시 성국의 신도들 아닙니까?”

“그들은 먼 옛날부터 이어진 비인가 조직입니다. 성국 내에서도 이단과 함께 최우선 척결 대상으로 삼고 있지요. 설마 나르함 경이 흑십자단 소속일 줄은.”

“첩자 색출은 나중에 하고 당장 조사를 시작해야 합니다.”

미르엘은 차분한 표정으로 날 선 목소리를 내뱉었다.

성왕 주변에도 팔라딘급 실력자가 많지만, 이진한에게서 직접 《정의》의 검술을 배운 자신이라면 질 것 같지 않았기에 언제든 무력행사를 할 수 있음을 보인 것이었다.

그 옆에 있던 엘레오노라 역시 완드를 움켜쥐었고, 일레이나 역시 차가운 표정으로 좌중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함 경. 조사를.”

“예.”

성왕의 명령을 받은 팔라딘을 비롯해 곧바로 꾸며진 조사대가 주위를 급박하게 뛰어다녔다.

그렇게 얼마간 대치하고 있자 얼마 지나지 않아 해답을 들을 수 있었다.

“전이 중간에 개입된 좌표를 역산하면 그 위치는 마경으로 나옵니다.”

“마경?”

일레이나는 그 로그가 적힌 양피지를 빼앗아 들었다.

작은 글씨로 빼곡하게 몇 장이나 되는 분량이었지만, 이터널 학파의 애머시스트라는 천재답게 순식간에 그것을 파악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경 맞네요.”

“즉시 이동하지요.”

“직접 가시나요?”

성왕의 즉답에 일레이나는 살짝 놀란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용사님은 성국에서 제일 중요한 존재입니다. 이리 허무히 잃을 수 없어요.”

“…그리 쉽게 쓰러질 사람은 아니니까 그렇게 걱정은 안 해도 돼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서두르죠.”

성왕은 수하들에게 몇 가지 지시를 내리고 팔라딘과 추기경들을 비롯해 성국 최정예 전력을 대동한 채 텔레포트 게이트 앞에 섰다.

일레이나와 엘레오노라, 미르엘도 그 뒤를 따랐고 그들은 몇 번의 복합 전이를 거쳐 순식간에 마경에 도달했다.

“…이거, 내 살다 살다 마경에 성왕 폐하께서 오실 줄은 몰랐는데.”

“처음 뵙습니다, 마후마임 경.”

“저는 기사가 아닙니다. 경비 대장이라 불러 주십시오. …그리고 그쪽은 구면이로군.”

“오랜만이에요.”

“오랜만입니다.”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은 핑크 모히칸을 한 사내, 마후마임 경비 대장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래, 일단 한시가 급하다지. 마차는 준비해놓았으니 곧바로 이동하도록 하지.”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성왕은 사양하지 않은 채 마차에 올랐다.

도시에는 아직 그녀의 방문이 알려지지 않은 것인지 잠잠하기만 하다. 대신 수많은 인원이 호위하는 그 마차에 누가 타고 있을지 의문과 호기심이 얼룩진 시선만이 뒤따랐다.

그렇게 얼마쯤을 갔을까, 그들은 곧 광활하게 펼쳐진 절벽의 끄트머리에서 멈춰 섰다.

“…이곳 맞습니다.”

신성 왕국의 사제가 텔레포트 로그와 주변 지형의 좌표를 분석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 앞에 있는 것은 절벽에서 파생된 깊은 계곡뿐. 끝도 보이지 않는 그 지하에 다들 인상을 찌푸렸다.

“대체 여기에 무엇이 있는 거죠?”

“한번 시험해보면 알겠죠.”

일레이나는 발치에 굴러다니는 돌을 집어 들었다.

이미 다른 이들이 무언가를 던져 그 안쪽에 무언가 있는지 확인해보았지만, 탐지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기에 다들 이번 역시 같은 결과가 나오리라 생각했지만, 일레이나는 집어 든 돌멩이 위에 봉파자의 술식을 담았다.

‘분명 불가시의 결계가 있을 거야. 그를 가둘 정도면 상당히 고도의 술식이겠지.’

어지간한 탐지 마법에 걸리지 않는 것도 당연한 일. 하지만 이 돌멩이에 인챈트한 봉파자는 《영원》이 직접 짠 술식에 자신이 개량을 거듭한 것이었다.

툭.

날아간 돌멩이가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이질적인 소음을 내었다.

곧 그 너머의 풍경이 일렁이며 누군가 물감을 쏟아붓듯 색이 입혀졌고, 선명한 자색 빛의 결계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건!”

“저 결계를 해제하겠습니다! 모두 집중해주세요!”

성왕의 지휘 아래 성기사와 추기경들이 해주의 술식을 읊었다.

웅장한 신성의 빛이 절벽을 뒤덮었고, 구체를 이루고 있는 결계를 향해 떨어져 내리며 정화하기 시작했다.

“…이런.”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결계는 일말의 변화조차 없다.

성왕이 한쪽 눈을 찡그릴 찰나, 이번에는 일레이나가 앞으로 나섰다.

웅웅웅.

「사계」가 극한으로 활성화되었다.

성국의 신성과 함께 결계를 공략했다면 더 큰 위력을 발휘했겠지만, 아쉽게도 마법과 신성은 상극인지라 그 위력이 반감되어 뒤 차례에 펼치는 것이었다.

“돌파하라.”

봉파자의 술식이 풀려 나오며 결계를 뒤덮는다. 처음 그것을 발견했던 것이 그녀였던 만큼 다들 기대를 지닌 채 바라보았지만, 아쉽게도 자색 결계의 외피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

일레이나는 입술을 씹었다.

봉파자가 부족한 것은 아니다. 자신의 경지가 얕기 때문에 저 결계를 돌파하지 못한 것이었다.

이진한은 봉파자의 술식으로 스승님의 삼라만상을 뒤덮고 심지어 그 제어권을 빼앗아 자신의 것으로 삼았다.

하지만 이쪽은 결계 하나 돌파하지 못하는 꼴이라니. 그 한심함에 눈물이 다 나올 것만 같았다.

쿠우웅.

그때 세찬 바람이 지상 위로 모래바람을 일으켰다.

돌연 생겨난 거대한 그림자는 사람들의 머리 위를 뒤덮었고, 곧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드, 드래곤!”

제일 먼저 그 정체를 파악한 마후마임이 경악성을 토해냈다.

이전에 두 차례 마룡에게 습격당한 트라우마 때문에 발작적으로 검을 뽑아 들었지만, 상식적으로 대항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저건.”

도중 엘레오노라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날개를 펄럭거리며 이쪽으로 가까이 다가오는 드래곤의 모습이 낯익다. 광택이 흐르는 붉은 비늘, 샛노란 눈동자. 얼마 전에 보았던 레드 드래곤 나탈리였다.

“위대한 존재이시여! 어찌하여 저희를 핍박하십니까!”

그 압도적인 존재감에 모두가 두려워하며 떨고 있을 때, 성왕이 앞으로 나서며 크게 외쳤다.

나탈리는 곧 절벽 위에 내려앉았고, 날카로운 눈동자들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향했다.

-나는 중간계의 수호자로 이곳에 왔노라. 결코 그대들을 핍박하려는 것이 아니니 걱정하지 말아라.

“그렇다는 것은….”

-용사의 기척이 이곳에서 사라진 것을 느꼈다. 더불어 마왕의 것으로 추정되는 마기가 감지되었지.

“…!”

성왕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그렇다면 결계의 표면을 타고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저 불길한 기운이 마왕의 마기라는 것인가.

구우우우─!

나탈리의 입으로 온 세상의 마력이 빨려 들어갔다.

드래곤의 가장 강력하고 직관적인 공격 수단, 브레스의 발현이었다.

곧 그 입이 열리며 시뻘건 불꽃으로 이루어진 마력의 폭풍이 토해져 나와 절벽을 휩쓸었다.

“큭!”

“모두 물러나라!”

“실드, 실드를 만들어!”

누구랄 것 없이 그 거센 여파에 뒤로 물러났다.

성왕을 비롯한 성직자들은 다른 이들을 지키기 위해 널찍한 실드를 만들었고, 그 뒤에야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츠즈즈즈.

얼마 지나자 불꽃이 가라앉는다. 절벽이 녹아내릴 정도의 열기였지만, 선명히 자리한 결계의 형태는 이전과 다름이 없었다.

-흐음.

나탈리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이진한의 기척이 사라짐과 동시에 마왕으로 보이는 강대한 기운을 포착했다.

필시 연관이 있을 거로 생각해서 곧바로 달려온 것이지만, 설마 결계 하나에 가로막힐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뭐, 그분이라면 죽지는 않겠지.

성룡 정도는 가볍게 가지고 놀던 실력자가 아닌가.

과거 영웅이라 불렸던 존재이니 마왕이란 존재도 어찌어찌 해주리라 생각되었다.

-그러니 그전까지 준비해야 한다.

나탈리의 시선이 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려 있던 인간들에게로 향했다.

***

툭. 투둑.

이진한은 제자리에 선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전신은 넝마가 되었고, 축 늘어진 왼손의 끝을 따라 시뻘건 피가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옛날 생각나네.”

그는 거친 미소를 짓고는 오른손등으로 눈 위에 흘러내리던 피를 닦아냈다.

다시금 전의를 불태우자 「불굴」의 가호가 빠른 속도로 상처를 수복하기 시작했다.

“흠.”

안드라스는 침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 역시 온전한 상태는 아니었다. 그리 긴 시간이 지난 것은 아니었지만, 쉴 새 없이 이어진 공방으로 인해 오른팔이 형체도 없이 뭉개진 뒤였다.

부루룩.

이진한이 불굴의 가호로 몸을 회복한 것처럼 그 역시 마기를 모아 다시 신체를 재생시켰다.

“이리 어려운 싸움이 되리라곤 예상치 못했는데 말이야.”

“이쪽도 동감이다.”

쨍그랑.

빈 엘릭서 병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며 산산조각이 났다.

다시금 체력을 회복한 이진한은 냉정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웅웅.

안드라스 주위로 시커먼 색의 검 여덟 자루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이기어검술.

어느 정도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한 순간 발현된 검들이 닥쳐와 이쪽의 손발을 어지럽혀 치명상을 입을 뻔했다.

더군다나 짧게 짧게 끊어서 사용하던 「무신 」 스킬의 유효 시간도 곧 막바지에 다다라 쓸 수 있는 유력한 패가 사라져갈 따름이었다.

“후우.”

대현자 클래스로 돌아온 이진한은 두 눈을 부릅떴다.

마기의 흐름은 어느 정도 눈에 익었다.

원래 힘을 생각하자면 이마저도 전력은 아닐 터지만, 그가 운용하는 힘의 총량은 전체적으로 대충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

“나르함. 자네의 요청에 응하길 잘한 것 같군. 잘못했다간 과거의 실수를 재현할 뻔했어.”

“…저도 놀랐습니다. 설마 이토록 강할 줄이야.”

이미 한참이나 뒤쪽으로 물러난 나르함은 경악한 시선으로 이진한을 바라보았다.

어찌 일개 인간이 이리 강할까.

마왕이 제 상태가 아니라곤 하지만, 단신으로 그에게 대적할 수 있다는 건 믿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쉬시식!

여덟 자루의 검이 다시금 쏘아졌다.

이번에야말로 그를 무참히 찢어버릴 심산인 듯 검 끝에 서린 기세가 예사롭지 않았다.

슉!

이진한은 블링크 마법으로 가볍게 그것을 회피한 뒤 아까 전부터 몰래 짜고 있던 마법의 술식을 발동시켰다.

파아아앗!

선명한 마력의 잔향.

이때까지 아끼고 아꼈던 초월 마법의 술식이 허공을 가득 채우며 그 존재를 알렸다.

동시에 이진한은 다른 마법을 구현하며 재차 마법을 발동했다.

촤르륵!

땅속과 허공을 비롯해 사방에서 솟구친 주박의 사슬이 그의 전신을 속박했다.

“음.”

안드라스는 그것을 단숨에 끊어내려 했지만, 예상외로 저항이 강한 듯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던 찰나 하늘 위로 떠오른 또 하나의 태양이 지상으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쿠구구궁.

“초월 마법인가.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군.”

파가각.

거칠게 어깨를 휘둘러 두 팔을 속박한 주박의 사슬을 끊어낸 안드라스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자네가 내 마기를 베어냈는데 나라고 자네의 마법을 베어내지 못할 리가 없잖는가.”

그 손으로 농밀한 마기가 응축되어 한 자루의 검을 이뤄내었다.

이제껏 만들어진 것보다 더 길고 날카로운 것으로 저 하늘 끝에 닿을 듯 길게 늘어났다.

쉬아아아악!

이 세상을 반으로 베어버릴 듯 귀기 어린 기세로 검이 휘둘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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