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4.
63위계 마왕.
안드라스.
이진한은 그 이름에 가슴 위로 묵직한 돌덩이가 내려앉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로 지척에 있건만, 기이할 정도로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저 앞에 선 나르함의 기세가 더 뚜렷하게 존재감을 발휘할 정도였다.
“….”
하지만 이진하은 눈앞의 남자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미들턴에서 싸웠던 마왕 마르바스와 비교했을 때 최소 동급이거나 그 이상인 불길함이다.
죽음이 턱밑까지 손아귀를 뻗어온 것처럼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이러한 감각을 느껴본 것은 정말로 오랜만이었기에 일순간 사고가 경직되었다.
‘…아니.’
하지만 자신 역시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다.
그렇기에 입안의 볼살을 강하게 씹는 것으로 비릿한 피 맛을 느끼며 정신을 각성했고, 슬쩍 몸을 앞으로 숙여 상대의 행동에 즉각 반응할 수 있도록 무게중심을 옮겼다.
툭툭.
안드라스는 손안에 쥐고 있던 화살의 잔해를 털어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백 년 만인가. 새로운 용사가 등장한 것은.”
“기록상으로 조금 더 정확하게는 189년 만입니다.”
“꽤 텀이 짧아졌군. 더군다나 이번 대의 용사는 조금 특이해.”
“그렇지요. 보통은 신성이 발현되어도 처음부터 이리 강하지는 않으니까요.”
안드라스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베르너라 불리는 저 용사는 영웅 중 한 명인 《지혜》의 검은 현자의 계승자인 것도 모자라 짧은 시간 동안 수많은 업적을 세웠다.
위기감을 느낀 흑십자단이 이례적으로 자신에게 직접 요청할 정도였으니, 안드라스 본인도 큰 흥미를 느껴 이 땅에 강림했다.
“…고대 신의 잔재를 이용해 인과율을 충당한 건가.”
“거기까지 알고 있군. 재미있어.”
“나르함. 이걸 보고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나? 마왕들은 용사의 존재를 제외하고 신의 잔재에서 나온 힘을 흡수한 것으로 이 땅에 강림할 수 있다.”
“그런 것 정도는 이미 옛적에 알고 있던 것이네. 우리는 자네 생각보다 훨씬 더 오래되었고 깊은 곳에 있는 존재이니.”
“미친 놈들. 그런 걸 알고도 용사를 죽이려 해?”
“말하지 않았는가. 훨씬 더 오래되고 깊은 곳에 있다고. 우리는 자네가 알지 못하는 것을 많이 알고 있지. 마계의 침공을 막을 답은 이것뿐이네.”
이진한의 질타에도 나르함은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오히려 더 확신을 가진 채 그를 죽이겠다는 각오를 피력했다.
“한데, 호기심이 드는 군. 미들턴에서 마르바스와 마주한 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의 나와 비교했을 때는 어떻지?”
안드라스는 짐짓 궁금하다는 듯 두 팔을 들어 올리며 그리 물었다.
“마르바스가 강림한 건 극히 일부분에 불과했지만, 무지막지하게 강했지. 하지만 너는….”
“너는?”
“마왕다운 격이 느껴지지 않아.”
“하하.”
제법 재미있는 대답이었는지 안드라스는 웃음을 토해냈다.
“그래. 용사면 그 정도 패기는 있어야지. 그래도 지금 내가 발휘할 수 있는 힘은 당시의 마르바스 그 친구보단 많을 걸세. 나는 이곳 한정으로 강림한 것이거든.”
“…이곳 한정으로?”
“그렇네. 자네는 살아남으려면 나르함을 죽여 결계를 깨뜨리거나, 다른 수로 이곳을 벗어나면 되는 일이야. 나는 결계를 빠져나가지 못하니 말일세.”
이긴다는 선택지는 애초에 없었다.
그만큼 이쪽을 이쪽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었지만, 이진한은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방심하고 있을 때 기습한다.’
우스운 것은 뒤쪽에 있던 나르함 역시 당연하게 안드라스가 이기리라 믿는 듯 태평한 모습으로 있었다는 것이었다.
“일개 인간의 힘으로는 마왕과 대적할 수 없다. 설사 용사라도 말이야.”
“…그래, 원래는 그렇겠지.”
그렇기에 용사는 여행을 떠나며 하나둘씩 동료를 모집해 파티를 이루었다.
하지만 이진한은 달랐다.
기존의 상식을 부정하고, 고정된 법칙을 개변한다. 그것이 바로 대현자였다.
“하지만 나는 달라.”
“그럼 그 자신감 넘치는 말이 맞는 지 한 번 확인해볼까.”
쉬아아악!
안드라스가 가볍게 손을 휘두르자 검은 궤적이 들이닥친다. 인싞까지 이른 시간은 찰나지만, 피하기에는 그리 여유롭지 않았다.
이진한은 굳이 날뛰지 않은 채 두 팔을 교차하며 온몸에 가호를 둘렀다.
안드라스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자신의 몸으로 직접 체감하기 위함이었다.
파가가각!
날 선 발톱이 그의 가호를 깎아내며 한참이나 밀어보냈다.
땅 위로 깊은 족적이 남음과 동시에 가호를 비롯해 방어구의 내구도가 상당 부분 깎여 나갔고, 그 여파에 팔뚝 위에도 시뻘건 피가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 가운데서 이진한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가볍게 손짓 한 번 했을 뿐인데 이리 강력한 공격이라니. 그래도 그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안드라스를 바라보았다.
‘할 만 하다.’
마왕의 본신이 현현한 것이라면 모르겠지만, 그 일부 정도에 압도되어 쓰러질 정도는 아니었다.
“음.”
안드라스는 침음성을 흘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방금의 한 수로 이진한의 두 팔을 찢어버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작은 생채기 몇 개를 남긴 것뿐. 예상과는 다른 손맛에 그 얼굴에서 장난기가 서서히 사라졌다.
“설마 이걸 정면에서 막아낼 수 있을 줄은. 보고 받은 것과 다르군.”
“어떤 것이?”
“어중간하게 강해서 적당히 손대중하기 어렵다는 이야길세. 편히 보내주려 했건만, 고통을 자처하다니. 취미 한번 고약하군.”
이제껏 상대했던 용사들과는 결이 다르다.
단 한 번의 공격으로 그것을 파악한 마왕의 눈동자 위로 진한 살기가 깃들었다.
‘여기서 죽이지 못하면 골치 아파지겠군.’
용사 살해는 흑십자단과 서로 이해가 맞아 떨어져 합작하는 것이긴 했지만, 자신 역시 마왕 나부랭이였다.
마계에 위험이 될만 한 분자는 사전에 뿌리를 뽑아 놓는 것이 좋았다.
그렇지 않는다면 천여 년 전처럼 용사가 마계까지 쳐들어 자신들이 다스리는 땅을 초토화시킨 뒤 마왕의 목을 베는 참사까지 이어질 위험도 있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지.’
고대 악신이 세상을 멸망시키겠다며 중간계를 뒤흔들어 놓았을 때야말로 기습하기 절호의 기회였다.
하지만 그때 마계는 용사에게 입은 피해를 반절도 수습하지 못해 아쉬움만 삼켰다.
안드라스 역시 그즈음 마왕의 자리에 올랐고,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자 흑십자단과 손을 잡고 용사의 처분을 계속해온 것이었다.
“위험한 냄새가 코끝을 찌르는군.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조금 더 시간을 준다면 필시 큰 위협이 될 것이야.”
웅웅웅─.
거센 마기가 휘몰아쳤다.
뒤쪽에 있던 나르함조차 감당하지 못한 채 물러설 정도로 막대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며 안드라스를 중심으로 폭풍을 이루었다.
“나르함이 말하지 않았던가. 자네의 존재는 중간계에서도 마계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네. 그러니 두 세계를 위해서라도 죽어주어야겠어.”
파아아아앗!
응집된 마기가 수십 갈래로 솟구쳤다.
그 하나하나가 뱀의 머리로 변하더니 이내 이진한을 목표로 날카로운 이빨을 들이밀었다.
“…!”
템페스트를 쥐려던 이진한은 본능적인 위험을 느꼈다.
베히모스 꼬리에 달린 은빛 뱀이나 마인이 악마화로 변신한 히드라보다 더 섬득하고 위험한 느낌이었다.
‘저것에 닿으면 안 된다.’
이유는 모르지만, 이제껏 그의 목숨을 살려왔던 감각이 맹렬하게 경고하며 당장 피할 것을 종요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진한은 망설임 없이 땅을 박차며 대현자 클래스의 초월 스킬인 「무신」을 사용했다.
찰나 동안 신궁 클래스로 변환한 뒤, 장궁을 꺼내 손에 쥐고는 땅을 질주하며 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쐐애애액!
새하얀 빛줄기가 쏘아졌다.
그것들은 각각 뱀의 머리와 충돌하며 그 자리에서 터져나간다. 그러자 시커먼 운무가 주위를 뒤덮었지만, 아직 남아 있는 수십 마리의 뱀들이 그것을 뚫고 머리를 날려왔다.
“쯧.”
이진한은 그 뒤로 몇 번이고 화살을 쏘아보냈지만, 그것도 한계에 이르렀다.
뱀들은 학습 능력이 있는지 어느 순간에 이르자 유려한 움직임으로 화살을 피해내며 거리를 좁혀왔다.
그렇다고 큰 기술을 쓰기에는 저들의 움직임이 너무 빨라 그러한 여유를 주지 않았다.
촤라락!
곧 결정을 내린 이진한은 바닥에 무기들을 깔았다.
무신 스킬로 신궁에서 그랜드 소드 마스터로 변환 한 뒤 제일 먼저 눈에 띈 신도 무라마사를 쥐어 들며 검성의 검술을 펼쳤다.
검성류 오의 아라크네(Arachne).
그의 주위로 권역이 형성되며 균일한 간격으로 나뉘었다.
그 영역 안으로 들어오는 모든 것들이 기감에 포착되며 마치 거미줄에 먹잇감이 걸린 것처럼 움직임 하나하나가 생생히 느껴졌다.
쉬아아악!
농밀한 오러 블레이드가 응축된 무라마사가 쉴 새 없이 휘둘러졌다.
무라마사는 수십 마리는 될 법한 흑사의 머리를 쳐내며 그 잔재가 주인의 몸에 닿지 않도록 말끔히 지워냈다.
그 직후 강렬한 충격파가 퍼져 나가며 결계 내부의 지반이 무너져 내렸다.
찰나 동안 이어진 128번의 공방. 하지만 주위를 감싸고 있는 결계는 아주 잠깐 요동쳤을 뿐 여전히 그 단단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흠.”
안드라스는 또 한 번 손을 들었다.
그러자 곧게 뻗어 나온 그 손가락 끝에 마기가 응축되며 익숙한 파멸의 빛을 보이기 시작했다.
“저건.”
상처 하나 없이 그의 공격을 막아낸 이진한은 한쪽 눈을 씰룩거렸다.
북쪽 숲에서 하와와를 죽이고 자신들을 초주검으로 만든 메피스토의 가증스러운 힘. 녀석은 안드라스 계보의 마족이었던 걸까, 그때와 비슷한 파멸의 빛이 회오리쳤다.
파아앗─!
파멸의 빛으로 이루어진 레이저가 직선으로 쏘아졌다.
이때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속도로, 이진한 역시 본능적인 감각으로 검을 휘둘렀을 뿐이었다.
쿵!
손안으로 묵직한 감각이 짓쳐 들어왔다.
이진한은 절로 터져 나오는 신음을 억누르며 두 팔을 애써 내리눌렀다.
하지만 그 여파는 전혀 가볍지 않았다.
파각.
무라마사 위로 큰 균열이 생겼다.
한 번 더 휘둘렀다간 반으로 부러질 것 같기에 망설임 없이 놓고는 마검 그라나다를 소환해 손에 쥐었다.
파아앗!
악마화의 마기가 전신을 감쌌다.
오랜만의 악마화에 전신의 감각이 고취되며 막대한 힘이 차올랐다.
마치 전지전능한 신이 되기라도 한 듯한 감각. 곧 그는 땅을 박차며 안드라스에게 달려들었다.
그랜드 소드 마스터 초월 스킬
백야극광.
광택이 흐르는 묵빛 검강이 세상을 뒤덮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본 안드라스는 조소를 흘렸다.
“감히 마왕인 내게 악마의 힘으로 맞서려 하는가.”
마왕이 발현한 마기가 마치 해일처럼 들이닥친다. 백야극광은 것을 날카롭게 베어갈랐지만, 끝끝내 전부 해소하지 못한 채 소멸하고 말았다.
이진한이 두 번째 백야극광을 펼친 끝에 겨우 동수를 이루었을 뿐이었다.
‘언제까지 현현을 유지할 수 없을 거다.’
이진한은 샛노란 눈동자로 안드라스를 노려보았다.
이 공간에 존재를 한정했다고 할지라도 분명 한계가 있을 터.
나르함을 죽이는 것은 힘들어 보였으니 그때가지만 버티면 되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자존심이 용납지 않았다.
“그래, 누가 이기는지 해보자.”
마왕과 악마의 싸움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