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3.
제일 먼저 이변을 깨달은 것은 일레이나였다.
마도사인 그녀는 텔레포트 과정에서 이진한과 마찬가지로 비정상적인 현상을 관찰했지만, 굳이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았다.
‘그 사람이 움직이겠지.’
텔레포트는 극히 예민한 마법이다.
이진한이 나선 가운데 자신이 어설프게 개입했다가는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었다.
예를 들어 팔이나 다리 한쪽만 좌표가 바뀌어 전이된다던가.
사실 그것도 많이 순화한 것이었다.
내부의 장기, 혹은 머리만 이동되면 예외 없이 그 자리에서 즉사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마법사 협회에서 기를 쓰고 안전과 보안을 기하는 것이거늘, 이쪽에 수작을 부려오다니 간도 큰 녀석들인 듯싶었다.
웅웅웅─.
텔레포트 자체는 별 무리 없이 종료되었다.
가볍게 눈을 뜨자 새하얀 대리석으로 뒤덮인 풍경이 보였고, 새하얀 법복을 입고 있는 이들이 앞으로 나와 정중한 기색으로 그들을 맞아주었다.
“반갑습니다. 저는 신성 왕국 소속 팔라딘 에르첼….”
“어? 베르너 님?”
팔라딘 에르첼이 자신을 소개하는 도중 엘레오노라가 의아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분명 직전까지 자신들과 함께 있던 이진한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곧 그 사실을 깨달은 미르엘과 이리아 역시 두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디 가셨죠? 분명 제 앞에 서 계셨는데.”
“어? 나르함 경도 사라졌어요.”
이진한의 부재.
그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기에 모두가 허둥지둥하며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마찬가지로 그들을 맞이하러 나온 에르첼 역시 그 갑작스러운 상황에 텔레포트 게이트 안쪽을 바라볼 뿐이었다.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아, 네. 베르너 님께서 도착하지 않으셨어요. 분명 함께 텔레포트 게이트로 이동하셨는데.”
“유리아 경은 어디 있습니까?”
“유리아 경이요? 그분은 급한 일 때문에 성국으로 돌아간다고 하셨는데. 이쪽의 인도는 나르함 경이 맡으셨습니다?”
“예?”
“네?”
서로 대화가 맞물리지 않았다.
뒤쪽에서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일레이나는 흐름이 잘못 흘러가도 한참 잘못 흘러갔다는 생각에 곧바로 「사계」를 활성화하며 손을 뻗었다.
쉬아아악!
대리석 바닥으로 기다란 선 하나가 그어졌다.
그 갑작스러운 현상에 미르엘과 이리아는 곧장 뒤로 물러났고, 에르첼은 표정을 굳히며 고개를 들었다.
“이게 무슨…?”
“유리아 경을 불러오도록 하세요. 텔레포트 게이트로 이동하는 가운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유리아 경은 현재 성국에 없습니다. 용사님과 일행분들을 맞이하기 위해 노스 벨헤드렘으로 가 있던 차입니다.”
“그럼 나르함 경이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 되겠군요.”
짧게 한숨을 내쉰 팔라딘 에르첼은 수하를 불러 사실관계를 확인하도록 했다.
하지만 유리아는 정말로 노스 벨헤드렘에 가 있는 것으로 되어 있고, 용사 일행을 팔라딘 나르함이 맡는다는 이야기는 일절 연락된 바가 없었다.
“모두.”
일레이나가 마나를 끌어올리며 그리 말하자, 그녀들은 각자 전투태세를 갖췄다.
이쪽에 수작을 부려온 이상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적어도 이진한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 그들과 대적하며 시간을 벌 생각이었다.
“…이런.”
에르첼은 그들이 보이는 날 선 적의에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단순히 성국의 사절로 그들을 맞이하러 나온 것이거늘 어째서 상황이 이렇게 흘러갔는가.
게이트를 통해 이쪽으로 저들을 인도한 것은 성국 측이니 지금 상황은 오해할 법도 했지만, 자신들은 정말로 모르는 일이었다.
“그쪽과는 관계없는 일일 수도 있지만, 저희가 이런 태도를 보이는 걸 이해하세요. 그간 아군이라 믿었던 사람들에게 당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라.”
일레이나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당연히 그녀의 주위로는 상대와의 거리를 무한히 덧붙여 늘린 「애드(add)」가 발동된 차였다.
“…이해합니다. 일단은 이쪽에서도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사람을 보냈으니 조금만 기다려주시길.”
“아니, 그럴 필요 없어요.”
그 직후 청아한 목소리와 함께 저 끄트머리서부터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에르첼은 그 선두에 선 이의 모습을 보곤 황급히 고개를 조아리며 예의를 표했고, 다른 이들 역시 자리에 부복하며 충성을 보였다.
“성왕 폐하.”
“유리아. 사흘 전부터 그 아이의 연락이 끊겼습니다. 저는 용사님과 함께하느라 그런 줄 알았지만, 상황이 돌아가는 걸 보니 그들이 나타난 듯싶군요.”
“그들이라면…?”
“흑십자단.”
찬란한 백금색 머리카락을 출렁이며, 신성 왕국의 정점인 여성이 성가시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용사의 존재가 이 대륙으로 마왕을 불러들인다고 믿는 정신 나간 자들입니다.”
***
툭.
이진한은 발끝으로 땅을 두드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으로 오게 된 지 얼마나 지났을까, 삭막한 대지는 이전과 같았고 누르스름한 하늘 역시 그 색이 바뀌지 않았다.
대지에 쌓인 수북한 마물의 시체만이 시간의 경과를 알려주는 유일한 증거물이었다.
“직접 싸우지는 않는 건가?”
“아쉽게도. 내가 이 공간의 중심이라서 말이야.”
“그런 중요한 걸 알려줘도 되는 거야?”
“딱히 문제가 될 거라곤 생각되지 않네.”
“자신감이 넘치네. 마왕이라도 불러온 거야?”
이진한은 발치에 있던 소를 닮은 마물의 시체 위에 걸터앉으며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나르함을 바라보았다.
지금 당장이라도 땅을 박차고 달려들면 그의 목을 베어낼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공간의 특수성 때문에 근처까지 접근할 수 없었다.
어떤 공격을 퍼부어도 닿지 못했고, 마치 끝없이 계속되는 간격이 존재하는 듯 무한한 거리가 그를 반겼다.
‘성가시게 됐네.’
대마도사 클래스의 초월 마법인 「무간」이나 일레이나의 오리지널 마법인 「애드(add)」와 비슷한 종류의 성질이었다.
이미 대현자의 눈이 해석에 들어가고 있지만, 이 공간 전체가 평범한 곳이 아니었기에 시간이 조금 더 걸릴 듯으로 보였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무엇이지?”
“내 일행은 어떻게 되었지?”
나르함은 쓴웃음을 지었다.
고작 묻고 싶은 것이 그것이냐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고는 간단하다는 듯한 기색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그들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자네 일행은 모두 무사히 성국 본단에 도착했겠지. 지금쯤이면 내가 흑십자단이란 것도, 자네가 이쪽과 얽혀 있다는 것도 모두 알려졌을 테지.”
“흑십자단은 성국에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는 단체인가?”
“아니, 오히려 반대일세. 그렇기에 신을 부정하는 역십자를 상징으로 삼고 있는 것이지. 이단심문관인 도미니온의 주 임무 역시 성직자 사이에 섞여 있는 우리를 솎아내는 것이라네. 아무리 그래도 팔라딘이 섞여 있으리라곤 생각지 못했겠지만.”
쉬아악!
나르함이 말을 해오는 와중 이진한은 기습적으로 템페스트를 내질렀다.
바람의 가호를 받은 칼날이 허공을 찢으며 날카로운 검기를 보였지만, 아쉽게도 이전과 같이 그에게 닿지 못했을 따름이었다.
“발버둥 쳐봤자 소용없네. 자네는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할 터이니.”
“이런 잡몹들로는 내 힘이 소모되길 바라는 건 너무 양심이 없는데.”
“그렇겠지. 자네가 지금까지 보인 업적을 보아하면 어디 드래곤이나 고위 마족을 데려와도 부족해 보이니.”
“…진짜 마왕이라도 데려온 거 아니지?”
이 지경에까지 이르자 이진한은 슬쩍 불안해졌다.
상대는 명백히 시간을 끌고 있다. 토끼몰이했으니 확실한 덫이 존재한다는 소리일 터.
자신의 행적을 알고 있을 테니 이 정도 수준으로는 발목을 묶기 어려우리라는 것도 알고 있을 것이다.
실제로 이 공간을 침식하고 있는 현상에 대한 분석도 이제 어느 정도 끝나가고 있었다.
‘그러면 도대체 뭘 기다리고 있는 거지?’
툭.
템페스트를 바닥에 박아 넣은 이진한은 두 팔을 교차한 채 마음을 달리 먹었다.
무슨 수작을 부리든 그 이전에 탈출하면 그만이다. 그러니 전력을 해방해 공간 자체를 무너뜨려 저들의 계획을 무위로 돌리고자 했다.
용사 클래스 초월 스킬 「신성의 증명」
파아앗!
농밀한 신성력의 필드가 주위를 뒤덮었다.
다시금 스멀스멀 지하에서부터 솟아올라 근처로 접근하던 마물들이 정화되며 타들었고, 겨우 버티는 녀석들도 몸이 허물어져 제대로 된 형태를 유지하지 못했다.
-키에엑!
갈라진 지반 사이, 온갖 마물을 합쳐 놓은 듯 괴랄하게 생긴 키메라가 기괴한 비명을 지르며 모습을 드러냈다.
녀석은 발밑에 깔린 신성의 증명에 녹아내리면서도 거칠게 땅을 박찼고, 이내 이진한을 짓뭉갤 듯 자신의 몸을 던져왔다.
“떠 올라라.”
대마도사 클래스 초월 스킬 「진홍의 보옥」
미증유의 마력 폭풍이 휘몰아치며 이 공간을 집어삼킬 듯한 거대한 태양을 만들어냈다.
그러자 그가 의도한 대로 너무나도 강대한 힘에 의해 공간의 일그러짐이 생겼고, 누르스름한 하늘이 무너져 내리며 태양이 기울었다.
쿠구구궁─!
키메라를 비롯해 수백의 마물이 그 새빨간 태양에 휘말렸다.
그것들은 흔적도 남기지 못한 채 지반과 함께 소멸했고, 종래엔 거대한 크레이터만이 그곳에 덩그러니 나타났을 뿐이었다.
“하하, 하하하!”
그 가운데 서 있던 나르함은 미친 듯한 웃음을 토해내었다.
무엇이 그리 기쁜 것일까.
이진한은 그 기괴스러운 모습에도 담담히 인벤토리에서 장궁을 꺼내 시위에 화살을 걸쳤을 뿐이었다.
쐐애애액!
한 점의 궤적이 허공을 빛살 같이 꿰뚫었다.
나르함은 이전과 같은 태도로 느긋하게 그 광경을 바라보았지만, 이내 허리춤에 있던 검을 거칠게 뽑으며 자신의 코앞까지 쇄도한 화살을 쳐냈다.
캉!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그의 신형이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이때껏 평정을 유지하던 포커페이스가 무너지며 진심으로 놀랐다는 기색이 그 눈동자에 서렸다.
“언제까지고 그 공간이 널 지켜주리라고 생각하지 마.”
이진한의 눈동자 위로 새파란 광망이 흘러나왔다.
아직 그 전체를 분석하진 못했지만, 화살이 통과할 한 점 정도의 계산은 끝냈다.
그렇기에 농밀한 오러가 담긴 화살이 다시금 시위에 걸릴 찰나, 나르함은 쓴웃음을 지으며 두 손을 들었다.
“과연 용사다워. 아니, 이 비범함은 영웅의 계승자라 그런 것인가?”
“그냥 내가 대단한 거다.”
대현자 클래스 초월 스킬인 「무신(武神)」을 발동함으로 신궁 클래스의 힘을 지니게 된 이진한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심장을 꿰뚫는 필중의 죽음.
녀석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면 시위를 놓는 순간 자신을 가두고 있던 결계는 중심을 잃고 깨어져 나가….
“미안하군, 조금 늦었네.”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정말 죽을 뻔했습니다.”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에 이진한은 두 눈을 크게 떴다.
망설임은 짧았고, 결단은 빨랐다.
파아앗!
세차게 쏘아진 화살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속도로 허공을 꿰뚫었다.
하지만 활을 전부 떠나기도 전, 불쑥 튀어나온 창백한 피부의 손이 그 깃대를 잡아 우지끈 부러뜨리고 말았다.
“그러면 안 되지. 나르함은 소중한 파트너란 말일세.”
“…너는.”
“아, 이런. 소개부터가 먼저인가.
마치 죽은 이처럼 푸르스름한 피부와 잿빛 머리카락.
텅 빈 동공에 점차 빛이 깃들기 시작한다. 이진한은 단언컨대 그것보다 더 불길한 무언가를 본 적이 없었다.
“반갑네. 나는 서열 63 위계의 마왕”
남자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안드라스라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