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2.
약속한 사흘이 지났다.
이진한은 북쪽 숲 경계를 주시하며 곧 도착할 유리아를 기다렸지만, 어째서인지 점심이 한참 지날 때까지 그녀가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없었다.
“제가 한 번 가볼까요?”
성벽 위에 기대어 있자니 옆으로 다가온 이리아가 슬쩍 말해왔다.
정령사인 그녀는 굳이 노스 벨헤드렘 직접 가지 않더라도 근처에서 정령을 보낸다면 안쪽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진한은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저 너머를 바라보았다.
“준비하느라 시간이 걸리는 거겠지. 이쪽이 갑작스럽게 불러냈으니까 그 정도는 기다려주자.”
“네. 다른 분들한테도 그렇게 전달해놓을 게요.”
유리아는 고개를 끄덕인 뒤 물망초 빛깔의 머리카락을 살랑이며 자리를 떠났다.
잠시간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그는 눈 밑을 긁으며 노스 벨헤드렘 쪽을 바라보았다.
‘한시라도 날 성국의 본단으로 데려가고 싶어 하는 건 저쪽인데, 무슨 문제라도 있나?’
유리아의 말처럼 정령이든 무엇을 보내 확인해볼까 했지만, 그러다 괜히 이쪽이 아쉬워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어차피 특별한 일이 있다면 넘겨 준 통신용 수정구로 연락해올 터.
그렇게 얼마를 있었을까, 저 너머에서 한 무리 인영이 북쪽 숲을 향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음?”
선두에 있던 이는 유리아가 아니었다.
일전 숲의 경계를 공격했던 팔라딘 나르함이 성직자들과 마차를 대동한 채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탓!
성벽 위를 박찬 이진한은 순식간에 결계를 넘어 그들 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용사님을 뵙습니다.”
갑작스러운 등장이었지만, 팔라딘 나르함은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그를 맞이했다.
“유리아는 어디 있지?”
“유리아 경은 성왕 폐하의 갑작스러운 호출로 인해 급히 성국으로 먼저 돌아갔습니다. 듣자 하니 갑자기 오게된 터라 저쪽에도 문제가 터졌다고 하더군요.”
“문제?”
이진한은 품 안에 있던 수정구를 의식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면 이쪽에 연락해올 수 있었을 텐데 그럴 여유도 없을 정도로 큰일이 났다는 것인가.
‘마왕이라도 강림했나?’
슬슬 그래도 이상한 타이밍은 아니었다.
이단심문관인 도미니온으로도 꽤 높은 위치에 있는 듯해보였기에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상황이었다.
“유리아 경이 대신 사과의 말씀을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대신 제가 성국까지 호위할 터이니 걱정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나르함은 가슴을 두드리며 든든함을 어필해왔다.
물론 이진한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 행동이었기에 짧게 한숨을 토해내며 북쪽 숲 너머를 가리켰다.
“일행과 함께 올 테니까 잠시만 부탁하지.”
“느긋하게 준비하십시오. 이곳에서 기다리겠습니다.”
결계 쪽으로 돌아가니 이미 저들의 움직임을 눈치챈 일행들이 준비를 끝마친 뒤 가장자리에 도착해 있었다.
-아쉽네요. 며칠 더 있다 가셔도 되는데.
-바쁘시면 어쩔 수 없죠.
헤으응과 호에엥은 아쉬운 기색을 내비쳤다.
그래도 두 번째인지라 이전보다는 더 가벼운 표정이었고, 다음을 기약하며 이별을 고했다.
-…안녕히 가세요.
어린 하와와 역시 호에엥 옆에 꼭 달라붙어 꾸벅 고개를 숙여왔다.
이진한은 하와와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준 뒤 일행과 함께 결계를 나섰고 준비된 마차에 올라탔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무엇이지?”
출발하기 직전 열린 마차의 문 사이로 나르함이 말을 걸어왔다.
“고대 악신의 잔재는 확실히 문제없는 것입니까?”
“그래. 봉인이 유효한 걸 확인했고, 그 위에 내가 직접 이중삼중으로 덮어놓았으니 지금 당장 문제 될 일은 없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용사님과 더불어 《영원》의 마녀들이 지키고 있던 이 북쪽 숲의 명성은 철옹으로 자자한바. 설사 마족이 오더라도 쉽사리 넘지 못하겠지요.”
이진한은 속으로 조소를 흘렸다.
용사라는 것이 밝혀지자 이리 태세를 바꿔오는 꼴이라니.
유리아를 부른 것이 정답인 듯싶었다.
곧 마차가 출발했다.
그들이 원래 타던 마차는 이진한이 직접 제작하고 마법을 부여한 최상등품.
당연히 그것에 비하진 못했지만, 그래도 꽤 신경을 쓴 듯 내부 환경은 안락하기 그지없었다.
“…베르너 님.”
“어.”
이제껏 조용히 있던 엘레오노라가 흘깃 창밖을 바라보며 그를 불렀다.
성직자 무리에 감도는 이상한 분위기는 다른 이들도 충분히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이질적이었다.
‘나르함 저 남자는 변함 없지만.’
같은 팔라딘이나 추기경급은 담담한 모습을 보이고 있긴 하지만, 성기사나 사제들같이 말단으로 내려갈수록 감출 수 없는 동요가 눈동자에서 배어 나왔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 명백해 보이는 상황.
하지만 이진한은 내색하지 않은 채 따르는 척했다.
“다들 긴장의 끈을 놓지 마. 최악의 경우도 항상 생각해야 하니 말이야.”
“알겠어요.”
일레이나가 대답하자 나머지 셋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마차는 노스 벨헤드렘에 도착했고, 그들은 나르함의 인도를 따라 텔레포트 게이트로 향했다.
이곳부터 신성 왕국까지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게이트를 여러 번 거쳐서 이동해야 했다.
그렇게 중간 도시와 여러 국가를 지났고, 반복되는 전이로 인해 모두의 의식이 살짝 풀어졌을 무렵 이변이 발생했다.
파직.
신성 왕국으로 향하는 마지막 관문.
전이 술식이 발동됨과 동시에 이진한이 서 있던 좌표 위로 스파크가 튀며 누군가의 개입이 발생했다.
“…이건.”
그러면 그렇다는 표정으로 이진한이 가볍게 손을 뻗으며 마법을 파훼할 찰나, 주변에 있던 이들에게 시선이 닿았다.
텔레포트 마법은 이 세계에 현존하는 마법 중 가장 까다롭고 예민한 종류에 들어갔다.
개입한 술식을 역산해서 한 방 먹여주는 것은 일도 아니었지만, 그 여파가 어떻게 닥쳐올지는 그조차 예상할 수가 없었다.
실제로 바포메트의 던전에서 탈출할 때 고작 한 발자국 좌표를 바꿔 텔레포트를 사용한 것으로 빈사 상태에 이르지 않았던가.
자신은 괜찮았지만, 다른 이들이 버틸 수 있을지가 미지수였기에 손을 거두었다.
파가가각─!
그가 서 있던 좌표 위로 새로운 텔레포트 마법이 펼쳐졌다.
마법에 마법을 덧씌우는 고도의 수법.
적어도 마도사 중에서도 상위에 들어가는 실력자만이 할 수 있는 방식이었다.
웅웅─!
새하얀 빛이 눈앞을 뒤덮었다.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익숙한 감각과 함께 좌표가 뒤바뀌었고, 잠시 뒤 눈을 뜨자 낯선 공간에 덩그러니 내려앉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삭막한 대지, 누르스름한 하늘.
상태창에 해당 맵의 좌표가 표시되지 않는 걸 보니 던전이나 결계 안쪽인 닫힌 공간 같았다.
저벅.
마른 흙을 밟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기척을 드러냈다.
그 모습을 본 이진한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런 뻔한 전개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묻겠다, 그대여.”
팔라딘 나르함이 엄숙한 표정으로 그 앞에 서서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네는 정말로 용사인가.”
“고작 그런 걸 물으려고 이런 번거로운 짓까지 벌인 건가.”
신성 왕국에 가면 용사임을 증명하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더니, 텔레포트를 중간에 인터셉트할 정도로 중요한 과정이었는가.
이진한은 한숨을 내쉬며 손을 들었고, 그 위로 눈 부신 빛을 피워올렸다.
「신성의 증명」
기존 성직자와는 비교할 수 없는 순수한 기운이 어리며 주변에 퍼져나갔다.
나르함은 진지한 눈빛으로 그것을 바라보니 이내 짧은 탄식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로 충분하겠지? 아니면 뭐가 더 필요할까?”
“아니, 되었다. 이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으니.”
그렇다면 얼른 돌려보내달라.
이진한은 그런 뜻으로 어깨를 으쓱했지만, 나르함은 여전한 태도로 그 앞에서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자네에 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네.”
검은 현자의 계승자.
한계를 뛰어넘은 대마도사이며, 소드 마스터고, 창, 활, 정령, 그리고 신성력과 함께 마기를 다룰 정도로 갖가지 능력을 갖춘 실력자.
“솔직히 도무지 믿기지 않았네. 하늘에서 뚝 떨어져 내린 것인지 이전까지의 행적도 전혀 드러나지 않았고. 자네의 정체는 대체 무엇인가?”
“잘 알고 있으면서 굳이 또 내 입으로 설명해야 하나?”
“…그래. 참으로 대단해. 그야말로 영웅의 계승자라고 할 수 있어. 어찌 한 사람의 몸으로 그런 힘을 지니게 되었는지 부러울 따름이야.”
“질투하는 건가?”
“질투? 아니네. 그저 안타까울 뿐이야. 그저 영웅의 계승자였다면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되었거늘, 어찌하여 용사의 운명까지 받은 것인가.”
“….”
이상하게 흘러가는 이야기에 이진한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자신 정도 되는 실력자가 용사면 좋아할 일이지 무엇이 그리 안타까운가.
“용사의 존재를 부정한다고?”
“부정하지 않네. 용사는 필연적인 존재. 하지만 반기지 않을 따름이니.”
스릉.
검이 뽑혀 나왔다.
신성 왕국의 표시인 새하얀 성호가 그려진 장검이었다.
나르함은 그 표식을 떼어낸 뒤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빈자리에 박아 넣었다.
검은 역십자.
신을 부정하는 불순한 무리를 상징하는 그 표식이 어째서 팔라딘인 그가 지니고 있는가.
“….”
이진한은 표정을 굳혔다.
문득 베르하임 왕국에서 맥스웰과 싸울 때 그가 했던 말이 귓가에 울렸다.
-신성 왕국의 성직자들도 별반 다를 바 없다. 녀석들도 자신의 이득을 위해 우리와 손을 잡은 이가 적지 않으니 말이야.
“너 이 새끼 설마.”
마족과 손을 잡았느냐.
그 말에 나르함은 쓰게 웃으며 검을 다잡았다.
“인과율이라는 단어를 아는가. 예전에는 그리 알려지지 않은 사어(死語)였지만, 근래엔 지식인들이 많아 세간에 퍼졌지. 나는 그것이 보통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네.”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이지?”
“간단하네. 마왕이 있어야 용사가 있고, 용사가 있어야 마왕이 있다는 소리지. 즉, 마왕이 중간계에 올 수 있는 조건은 용사의 존재가 확립되어야 한다는 것일세.”
“뭔.”
뭔 개소리인가.
이진한은 황당한 표정으로 나르함을 바라보았다.
고대 신의 잔재를 흡수해서 강림하면 인과율이고 뭐고 다 충당되지 않는가.
설마 그것도 모르고 헛소리를….
“아니네. 지금껏 우리는 유구한 역사 가운데 그렇게 마계의 침략을 막았네. 용사의 존재를 지우는 데 실패했을 땐 항상 더 큰 피해가 따랐지.”
“…성왕이나 신성 왕국 측도 모두 같은 뜻인가?”
“아닐세. 우리는 교단에서도 이단 심문관이라 불리는 도미니온보다 더 은밀한 곳에 있지.”
「흑십자단」
그 이름을 말함과 동시에 스멀스멀 주위를 뒤덮기 시작한 진한 마기에 이진한은 헛웃음을 토해내었다.
“그렇다고 마족과 손을 잡아? 성직자라는 작자가?”
“필요악이지. 마왕 중에는 중간계와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이들도 있으니 말이야.”
“…혹은 더 손쉽게 용사를 죽일 방법을 갈구하는 이들일 수도 있겠지.”
“물론 그럴 가능성도 없지 않네. 하지만 이때까지의 역사로 보아 용사가 존재하지 않다면 마왕도 대륙에 강림하지 못하네. 그 전제는 아직 절대적이야. 그러니….”
세상을 위해 죽어주게.
나르함은 엄숙히 선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