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1.
“나르함 경! 물러나십시오! 성왕 폐하의 칙서를 들고 왔습니다!”
구슬땀을 흘리며 말을 타고 달려온 유리아가 그들 앞에 멈춰 섰다.
나르함이라 불린 팔라딘을 비롯한 다른 성직자들은 여기서 갑자기 그녀가 나타난 것에 고개를 갸우뚱하며 의문을 표했다.
“유리아 경. 당신이 여긴 무슨 일이오.”
“성왕 폐하의 칙서를 가져왔으니 먼저 이것부터 확인해주시길.”
짧은 단발머리였던 그녀의 머리카락이 어느덧 어깨 뒤까지 자란 상태였다.
유리아는 서둘러 품 안에서 칙서를 꺼내 그에게 넘기며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구나.’
직전까지의 분위기가 그리 좋지 않은 것을 보니 한바탕 하기 직전이었는 듯했다.
팔라딘이 있다고 할지라도 수준의 차이가 심했다. 만일 여기서 교단 쪽이 피해를 보았다면 상황이 난처해졌기에 추후 그와의 관계성을 유지하는 데 많은 애로사항이 있었을 터였다.
“흠.”
나르함은 유리아가 건네준 칙서를 신중히 살피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이진한을 바라보았다.
“오해가 있었던 듯하군. 결례에 사과를 표하지.”
“…하하.”
이진한은 헛웃음을 토해내었다.
너무 뻔뻔해서 오히려 따질 마음도 들지 않은 태도였다.
“성왕 폐하께서 이곳은 제게 일임하셨습니다. 그러니 나르함 경께서는 돌아가 주시지요.”
정중한 축객령이었다.
잠시간 턱을 쓰다듬은 채 무언가를 생각하던 나르함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고, 알겠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성왕 폐하께서 그리 결정하셨다면 따라야겠지. 유리아 경. 뒷일은 부탁하네.”
“알겠습니다.”
나르함을 필두로 이곳까지 닥쳐왔던 성직자 무리는 말머리를 돌렸다.
이윽고 그들의 신형이 모두 사라졌을 때가 돼서야 유리아는 멋쩍은 표정으로 이진한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흠.”
이진한은 잠시 고민했다.
본래라면 그녀 역시 이곳에서 저들과 함께 돌아가라고 했겠지만, 성왕 폐하라는 단어는 쉬이 무시하기 힘든 것이었다.
최소한 이야기는 들어보아도 해가 될 건 없었기에 헤으응을 바라보며 물었다.
“들여도 되나?”
-…그것이 뜻이시라면.
“걱정하지 마. 잠시 이야기만 듣는 거니까.”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원한다면 그리 해도 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겨우 허락이 떨어지자 노심초사하고 있던 유리아는 그들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말했다시피 잠깐 이야기만 듣는 거니까. 제대로 된 내용을 가져오지 못했다면 실망이 클 거야.”
“…명심하겠습니다.”
표정이 살짝 굳은 것을 보니 이쪽의 요구 조건을 제대로 충족하지 못한 듯했다.
그렇게 그들은 다시 저택 안에 들어가 응접실에 자리했고, 적막한 분위기 가운데 대화가 시작되었다.
“먼저 사죄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북쪽 숲은 용사님과 관계있는 곳이니 될 수 있으면 마찰을 빚지 말라고 했는데, 전달 과정에서 무언가 오류가 있었던 듯합니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겠지?”
“네. 성왕 폐하의 칙서까지 받아왔으니 확실히 처리하겠습니다.”
“그리고 고대 신의 잔재 말인데.”
“네.”
이진한은 손을 들어 바로 밑을 가리켰다.
“이 지하에 엄중히 봉인되어 있다. 일전에 마물의 군세가 노스 벨헤드렘을 집어삼키고 북쪽 숲을 습격했던 것도 잔재를 강탈하기 위해서임은 알고 있겠지?”
“네, 그렇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도 위쪽에서 여러 말이 나왔습니다. 그래도 결과적으로 무사히 지켜내었으니….”
“그 부분은 너희가 왈가왈부할 건 아니고.”
이진한은 입가를 비틀며 그녀의 말을 잘랐다.
봉인의 주체는 자신과 이 땅에 머무는 세 자매인데 누가 누굴 거론한다는 것인가.
유리아도 자신이 말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입술을 씹었다.
“봉인은 내가 직접 확인하고 이중삼중으로 걸어뒀다. 마녀들의 사명도 그걸 지키는 일이니 쉽사리 뺏기진 않을 거야.”
“…그렇게 전달하겠습니다.”
“그래. 여기가 뚫린다면 애초에 빼앗길 거였다는 소리니까.”
물론 그전에 신호를 받은 자신이 돌아와 세 자매를 구해내고 이곳에 침입한 적을 쓰러뜨릴 것이다.
이전처럼 허무하게 하와와를 잃었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말 그대로 엄중한 보안을 걸어두었다.
실제로 아까의 성기사들이 결계를 해제하고 들어왔다고 할지라도 새로운 벽이 가로막았을 터.
그것을 전부 해제하는 데도 몇 날 며칠이 걸릴 것이며, 숲으로 발을 들이는 순간 몇 시간도 채 버티지 못한 채 싸늘한 시신이 될 것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내가 요구한 것이 있었지.”
“…네.”
유리아는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본단에 봉인된 성검이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말 그대로 봉인되어 있기에 성왕 폐하께서는 용사님께서 성검을 취하시려면 직접 오셔서 그것을 해금하는 수밖에 없다고 하셨습니다.”
“봉인이라.”
이진한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인지 거짓인지는 모르겠지만, 참으로 허울 좋은 핑계다. 또 그럴듯한 이야기였기에 함부로 의심하지 못한다는 점이 우스웠다.
“성검의 수리 쪽은?”
“아, 예. 듀란달 쪽은 수리가 가능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쪽도 설비와 정화 같은 여러 문제 때문에 용사님께서 직접 오셔야 한다고….”
스스로 말하고도 머쓱한 것인지 유리아는 멋쩍은 표정으로 눈치를 봐왔다.
“어쨌든 성국에 가야 한다는 소리이네.”
“부족한 것 없이 모시겠습니다. 분명 용사님께도 여러 도움이 되실 겁니다.”
“그 용사 소리는 빼지.”
“…알겠습니다, 베르너 님.”
“일단 우리는 이쪽에서 사흘 정도 더 머무를 예정이다. 성국에 가는 건 그 뒤로 하지.”
“…! 알겠습니다! 성왕 폐하께서도 크게 반기실 겁니다!”
순순히 성국으로 가겠다는 건 예상치 못했던 것인지 유리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렇기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개를 몇 번이고 숙이고는 기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럼 사흘 뒤에 준비를 끝낸 뒤 찾아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때까지 평안하시길.”
곧 그녀가 북쪽 숲을 떠나자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일행들이 한두마디씩 보태기 시작했다.
“뭔가 귀엽네요. 예전에는 밉상이었는데.”
“귀엽다고? 어디가.”
“그냥 그렇잖아요. 저 조그만 몸으로 애쓰는데.”
이진한은 헛웃음을 토해내며 일레이나의 말을 흘려 넘겼다.
“…설마 또 파티원이 늘어나진 않겠죠.”
“그러기는 힘들 겁니다. 이리아 님의 경우는 특수한 상황이었으니까요.”
“저, 저는 특수한 상황이었나요?”
엘레오노라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중얼거리자, 옆에서 미르엘이 고개를 저었다.
졸지에 특수한 상황이 되어버린 이리아는 자신을 가리키며 당황한 표정을 지었을 뿐이었다.
***
노스 벨헤드렘으로 돌아간 유리아는 새로이 거처를 잡았다.
이진한의 연락을 받고 급히 달려오느라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지만, 이미 이 근방은 교단이 꽉 잡은 상태. 방 한두 개 정도 얻는 것은 손쉬운 일이었다.
“나르함 경.”
“어, 유리아 경 아닌가.”
방에 짐을 푼 유리아는 그 길로 나르함을 찾아갔다.
고지식한 나르함의 성격은 교단 내에서도 유명한 것. 그러니 성왕 폐하의 칙서가 주는 위엄을 빌려 더는 북쪽 숲에 관여하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둘 참이었다.
“…그러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성왕 폐하께서도 이 건을 주의 깊게 주시하고 계시니 모쪼록 잘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흠. 알겠네. 내 당연히 그래야지.”
나르함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젊은 용사님께도 사죄가 필요하겠군. 무엇이 좋겠나?”
“그건, 이전에 보니 술을 좋아하시던데 그 부류가 괜찮지 않을까 싶습니다.”
실상은 그냥 이제 얼굴을 마주치지 않는 게 최선이었지만, 사람 일이 어떻게 돌아갈지 몰랐다.
그러니 적당히 대답하자 나르함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이라 나쁘지 않군. 마침 선물로 들어온 것 중 제법 괜찮은 것이 있어서 말이야.”
“그렇습니까.”
달그락.
나르함은 탁자 위에 있던 작은 병을 쥐어 들었다.
잠시간 그 내용물을 유심히 살피는가 싶더니, 느닷없이 유리아에게 내던졌다.
“…뭣!”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그래도 팔라딘이라는 위엄은 어디 가지 않는 듯 유리아는 눈부신 반응을 보이며 거칠게 그것을 쳐냈다.
하지만 그 여파로 인해 병이 깨어져 버렸고, 안쪽에 가득 차 있던 내용물이 쏟아지며 기체로 변해 그녀의 몸을 뒤덮었다.
“이게 무슨…!”
대체 이게 무슨 짓이냐.
유리아가 두 눈을 날카롭게 치뜨며 따질 찰나, 검을 뽑아 든 나르함이 다짜고짜 그녀에게 쇄도해왔다.
쿵!
농밀한 신성력이 담긴 검이 벽을 부수며 조금 전까지 유리아가 서 있던 자리를 무참히 베어 갈랐다.
겨우 기른 머리카락 끝자락을 잘리며 겨우 그 공격을 피해낸 유리아는 훌쩍 뒤로 물러서며 소리 질렀다.
“나르함 경! 대체 이게 무슨 짓입니까! 성왕 폐하의 칙서를 지닌 저를 왜…!”
“무슨 짓이냐니. 나는 그저 마족과 손을 잡은 부정한 변절자를 포획하려는 것뿐일세.”
“…뭐?”
누가 마족과 손을 잡았다는 것인가.
그러자 나르함이 씩 웃으며 눈짓했다.
“자네의 몸을 잘 보게나.”
“…이건.”
유리아의 숨이 턱 하고 막혔다.
왼팔과 몸, 그리고 얼굴을 타고 농밀한 마기가 달라붙어 체내에 파고들고 있었다.
어째서 직전까지 눈치채지 못했을까.
그녀는 황급히 신성력을 끌어올리며 그것에 저항하려 했지만, 나르함은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땅을 박찼다.
“그렇게 내버려 두지는 못하지. 자네는 여기서 쓰러져야 한다네.”
파가각!
그리 넓지 않은 방안에서 두 팔라딘이 격렬하게 검을 나눴다.
아무리 도시가 수많은 소음으로 채워져 있다고 할지라도 그만한 소란이 일어난다면 다른 이들도 모를 수가 없는 일.
몇 초 지나지 않아 밖에서부터 몇몇 인원이 달려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나르함 경! 유리아 경! 이게 대체 무슨 일…!”
“유리아 경이 마족과 내통하던 변절자였다! 모두 이 근방에 비상을 내리고 경계 태세를 취하도록!”
“예, 예?!”
팔라딘이 변절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성기사들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곧 유리아의 몸을 뒤덮으며 피어오르는 농밀한 마기에 기겁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 어찌 저리 사악한!”
“다른 이들에게 알려라! 유리아 경이 마족과 손을 잡고 변절했다!”
신체를 태우며 마기가 체내로 파고드는 모습은 괴이하기 짝이 없었다.
나르함의 외침과 눈으로 목도한 모습에 영락없이 넘어간 그들은 사방으로 흩어지며 전력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자네에겐 미안하게 생각하네. 평생 교단을 위해 살아왔는데 이런 말로를 걷게 하는 것을.”
“당신, 대체…!”
유리아는 반박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계속해서 몰아치는 나르함의 공격이 너무 거칠었기에 제대로 된 문장조차 뱉어낼 수 없었다.
더군다나 체내에 파고든 마기가 어찌나 강력한 것인지 팔라딘인 그녀조차 단숨에 정화해내지 못할 정도였으니 애초에 제대로 된 싸움이 성립되기 힘들었다.
캉!
거친 소음과 함께 유리아의 검이 손으로부터 튕겨 날아갔다.
동시에 가슴팍을 걷어차인 그녀는 깨진 파편 위로 바닥을 굴렀고, 이내 피를 토해내며 의식을 잃었다.
“비록 역사는 자네의 변절을 욕하겠지만, 나만은 그 순교를 기억하겠네.”
나르함은 엄숙한 표정으로 성호를 그으며 짤막한 한숨을 토해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