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0.
사시사철 눈으로 뒤덮인 북쪽 숲의 풍경은 여전했다.
새하얗게 물든 침엽수 사이로 작은 동물들이 뛰어 돌아다닌다. 이전 싸움에서 입었던 피해는 거의 다 복구한 것인지 숲 전체에 활기가 감돌았다.
“후우.”
이리아는 하늘이 탁 트인 온천 가운데 몸을 담그며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드디어 긴장이 풀린 듯한 모습에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엘레오노라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좋죠? 온천으로는 여기만 한 곳이 없는 것 같아요. 황실에 있을 때보다 몇 배는 더 흥취가 있다니까요.”
“그런 것 같아요. 예전에 온천으로 유명한 관광지 몇 군데 들러봤는데 지금이 제일 좋네요.”
이리아는 조심스레 손을 들어 떨어져 내리는 눈의 결정을 받았다.
온천의 열기 때문인지 그것은 금세 사르르 녹아들며 물로 변해 흘러내렸다.
“긴장이 풀리니 조금 낫네요. 여기 오기 전까지는 소변 마려운 강아지처럼 계속 눈치만 보더니.”
“일레이나.”
“사실이잖아요. 좋은 뜻으로 말한 건데.”
말을 좀 곱게 하라며 미르엘이 두 눈을 가늘게 뜨자, 일레이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온천 가장자리에 두 팔을 기댔다.
“그래도 앞으로 마음 단단히 먹어야 할 거예요. 저 남자, 함께 있으면 온갖 재해와 분란을 끌고 오니.”
“…베르너 님께서 의도하신 건 아니지만요.”
차마 부정할 수 없었던 엘레오노라가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미약한 변호를 했다.
“하긴, 그렇게 생각될 만도 하겠네요.”
이리아는 북쪽 숲으로 오는 와중 그간 그들이 겪었던 여정을 대부분 전해 들었다.
마물 군세니, 마왕이니, 악마니, 드래곤이니.
평범한 사람이라면 일생 동안 한 번도 겪기 힘든 일들을 요 반년 사이에 전부 경험했다는 것이 아닌가.
“여기도 거의 반파될 정도로 타격을 입었어요.”
“반파 정도가 아니죠. 숲은 전부 불타 뭉개지고, 저택도 무너졌었으니까요.”
일레이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다른 곳보다 그리 좋지 않은 기억이 담겨 있는 장소였다.
자신의 모든 마법이 무력화되고 팔이 뜯겨 나가던 감각은 아직도 생생했다. 더 가슴이 아픈 것은 세 마녀 중 장녀인 하와와를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지금이라면.’
「사계」의 이론이 확립되고 그것을 기반으로 한 마법을 몇 가지나 만들어낸 지금이라면 이전보다 더 효과적으로 메피스토의 발목을 붙들어 맬 수 있었을 터.
그렇다면 하와와가 무리할 필요도 없었을 테고, 목숨을 잃지도 않았을 터였다.
“하아아아아아아.”
일레이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이야기하고 있던 다른 이들은 갑자기 그녀가 왜 그런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세요? 술이라도 한 병 꺼내올까요?”
“…누구를 술꾼으로 알아요? 딱히 거절은 하지 않겠지만.”
어차피 오늘은 푹 쉬라는 말을 들었다.
그렇다면 가벼운 음주 정도는 괜찮을 터.
일레이나가 가볍게 손을 까딱이며 염동력을 발할 찰나, 그보다 먼저 한줄기 미풍이 그들 사이를 가로질렀다.
달그락.
바람의 하급 정령인 실프가 온천 구석에 준비된 술병 중 하나를 꺼내 그들 앞에 대령했다.
“편리하네. 나도 하나 계약할까?”
“정령은 하인이 아니라 친구라고요.”
“마법은 도구나 수단에 불과한데, 부럽네.”
“…전부터 생각했던 거지만, 일레이나 님은 성격이 살짝 나쁘시네요.”
“뭐?”
그들이 온천에서 아웅다웅하고 있을 무렵, 이진한은 응접실에서 세 자매와 마주하고 있었다.
-…고대 신의 잔재를 해방해야 할지도 모른다고요?
“당장 그렇게 한다는 건 아니야. 여차하면 그럴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음.
헤으응은 곤혹스러운 눈치로 두 자매를 바라보았다.
이제껏 자신들은 몇백 년에 가까운 시간을 이 사명에 바쳤다. 그러는 가운데 갑자기 봉인을 해제하라는 이야기는 쉽사리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아무리 현자님이라고 하셔도 조금 꺼려지는 이야기네요. 그게 얼마나 위험한지 아시잖아요.
호에엥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피력해왔다.
“알지. 엄청난 힘의 집약체인 건.”
단순히 그 겉으로 흘러나오는 힘을 흡수하는 것만으로도 그라다나의 힘이 몇 배는 증폭되었다.
메피스토는 자신의 한계를 탈피해 상위 종족이 되었고, 그 힘을 받아들일 수 있는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일 터였다.
-어쩌면 마왕을 이 세상에 현현 시킬 수도 있는 위험이 있습니다. 현자 님께서 그것을 푸시겠다면 저희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지만…….
봉인의 매개체는 하와와.
즉, 그 봉인을 해제하면 이제 세상에 남은 그녀의 흔적이 모두 사라지게 되는 것이었다.
“말했잖아. 지금 당장 그렇게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단지 하나의 가능성만 열어두는 거라고.”
아직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을 고대 신의 사도라 불리는 그 존재의 말이 진실일 수도 있고, 바람의 정령왕 실피드가 해온 이야기가 진실일 수도 있었다.
서로 상층 되는 성질의 내용이기 때문에 그 한쪽은 분명 거짓이 되는 상황.
그 방향의 키를 잡은 것은 자신이었기에 신중히 선택을 내려야 했다.
“그리고….”
웅웅─.
이진한이 재차 신중한 모습으로 말을 이을 찰나, 허공으로부터 옅은 진동이 울려왔다.
그 순간 세 자매의 얼굴이 신경질적으로 확 구겨지며 모두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또 왔네요.
-정말 지긋지긋하지도 않은가.
-혼내줘도 되나요?
“누가? 아, 신성 왕국 측?”
이진한이 두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들이 바라보고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자 확대된 시야 안에 한 무리의 인영이 결계 앞에 우뚝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어떻게 할까요? 이전처럼 안 된다고 하고 돌려보낼까요?
“그렇게 간단히 물러날 분위기는 아닌 것 같은데?”
선두에 선 팔라딘이 여섯, 추기경급으로 보이는 성직자가 셋이다.
팔라딘이 소드 마스터, 추기경이 마도사 취급을 받는 것으로 생각해보면 예사로운 전력은 아닐 터.
그 뒤로 수십에 달하는 성기사와 사제를 동반한 것을 보니 오늘 끝장을 볼 심산인 듯 보였다.
-이런 미친 작자들. 우린 중립이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잠깐만.”
이진한은 문득 좋은 생각이 들었다.
예전처럼 무력으로만 해결하는 것은 제일 마지막까지 남겨두어야 할 수단이다. 더 깔끔하고 간편하게 처리하는 방법이 있다면 거리낄 이유가 없었다.
“유리아.”
품에서 수정구 하나를 꺼낸 이진한은 이단 심문관 도미니온 유리아를 호출했다.
신성 왕국으로 돌아가 일이 잘 처리되면 연락하겠다는 그녀는 어째서인지 지금까지 감감 무소식이었다.
그렇기에 자신 역시 굳이 불러낼 생각이 없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제법 쓸모가 있을 듯했다.
-아, 앗! 베르너 님!
“바빴나 보네. 지금껏 연락 한 번도 없고.”
-…아하하. 아닙니다, 교단에 돌아와 성왕 폐하께 그간 있던 일들을 고하고 베르너 님의 전언을 말씀드렸습니다. 지금 그 부분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던 와중입니다.
슬쩍 뼈를 찔러오는 말에 유리아는 땀을 뻘뻘 흘리며 대답했다.
“뭐, 그건 그거고. 한 가지 부탁할 게 있어서.”
-아, 넵. 말씀하십시오.
유리아는 두 눈을 빛냈다.
한동안 소식이 없던 자신에게까지 굳이 연락을 취해 부탁해온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라는 소리일 터.
여기서 쓸모를 입증한다면 신뢰도를 올릴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이어진 이야기에 그녀의 얼굴이 구겨졌다.
“지금 신성 왕국 측의 사람들과 마찰이 있어서 말이야. 북쪽 숲 알지? 너도 여기 찾아왔다면서. 지금 노스 벨헤드렘에 체류하고 있던 팔라딘과 추기경들이 찾아와서 이곳을 조사하겠다고 무력 시위를 펼치고 있다.”
-…하아.
수정구 너머로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곳은 베르너 님과 연관이 있는 곳이니 마찰을 빚지 말라고 누누이 이야기해놓았는데.
“봉인된 신의 잔재를 조사한다고 하는데, 이미 내가 확인은 끝냈거든. 더 뭐가 필요한가?”
-아닙니다. 애초에 그곳은 성역이자 금지로 지정된 구역입니다. 교단 측 의견도 일단 거리를 두고 보자는 것이었으니 아마 그쪽 현장 지휘자의 독단으로 벌어지는 일 일 겁니다.
자신들과는 관계없다는 칼 같은 손절이었지만, 이진한은 슬쩍 고개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
“…결계를 두드리면서 난동부리기 시작한 것 같은데, 그러면 쓸어버려도 되는 거지?”
-아앗, 아, 안 됩니다! 지금 제가 곧바로 출발할 테니…!
뚝.
이진한은 수정구의 통신을 끊었다.
“이러면 곧바로 오겠지. 자, 이제 그러면….”
팔라딘과 추기경 나부랭이라 할지라도 계속 이렇게 두드리면 결계의 내구성이 떨어지기 마련이었다.
특히 마법은 신성과 상극. 그들이 성스러운 빛이 뿜어내자 결계의 일부가 쇠약해지며 그 농도가 옅어지기 시작했다.
-혼내주러 가볼까요!
막내, 하와와가 의욕을 보였다.
그간 시달린 것이 많은 듯 자신이 직접 두 손으로 묵사발을 내주겠다는 의사 표명이었다.
“그래, 혼내주러 가자.”
그 귀여운 모습에 웃음을 터트린 이진한이 응접실을 나섰다.
세 마녀와 함께 나가는 사이, 온천욕을 끝내고 나온 일행과 마주쳤다.
“밖에 무슨 일 있죠?”
“어. 용케 눈치챘네.”
“그간 놀고먹기만 한 건 아니거든요.”
외부의 소란을 눈치채고 이미 준비를 끝내둔 것인지 전부 단단히 무장한 상태였다.
그렇게까지 할 상대는 아니었지만, 저들에게 경각심이라도 심어주고자 그대로 결계의 가장자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호에엥.”
-네.
마스터키를 지닌 호에엥이 이진한의 부름에 고개를 끄덕이며 결계의 일부를 해제했다.
그러자 나눠진 구역의 경계가 사라지며 밖에 서 있던 이들과의 공간이 연결되었다.
“흠. 진작 이럴 것이지.”
선두에 서 있던 거구의 팔라딘이 근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일행에게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결계를 약화하던 신성의 빛이 사그라들며 주위는 다시 고요해졌다.
“북쪽 숲의 마녀들에게 고하네. 우리는 신성 왕국의 성직자들. 이곳에 봉인되어 있다는 고대 신의 잔재를 확인하기 위해 왔으니 순순히 길을 터주기를 부탁하지. 같은 영웅의 계보를 잇는 후손으로서….”
결계가 사라지며 그 너머의 풍경이 보임에 따라 팔라딘은 말을 멈칫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하얀 세 마녀의 인상착의는 틀림없었지만, 그 옆으로 정보에 없던 인영들이 몇 명 자리하고 있지 않은가.
“…자네들은?”
미약한 적의가 말끝에 묻어 나왔다.
이진한은 그 모습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신을 가리켰다.
“나 몰라?”
“자네가 누구인지는 관계없네. 이것은 신성 왕국이 행하는 신성의 과정. 누구든 예외 없이 따라야 할 것이야.”
“흐음.”
이진한은 짤막한 대화를 통해 저 커다란 팔라딘의 성격을 파악했다.
‘독불장군인가.’
자신이 믿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듣지 않은 외골수였다.
그렇기에 잠시 어쩔까 생각을 하던 사이, 팔라딘이 먼저 말했다.
“순순히 길을 열게. 우리는 단순히 조사를 위해 나온 것이니 협조해준다면 위해는 가하지 않겠네.”
-누구 마음대로 길을 열라는 거지? 이곳은 《영원》의 성역이다. 왕국이나 제국의 황제라 할지라도 감히 들어오지 못해. 신성 왕국이 뭐라고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지?
헤으응이 날카로운 태도로 말했다.
호에엥과 하와와 역시 마찬가지인 태도. 그것에 팔라딘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대답했다.
“마녀여. 너희들은 단지 마녀라 불리는 이유로 우리의 심판대에 오르기 충분한 존재들이다. 《영원》에 대한 존중으로 그 부분은 넘어가 주려 했거늘, 스스로 가시밭길에 들어가겠다는 것인가.”
“어이.”
이진한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치고 나오며 팔라딘에게 말했다.
“누가 누굴 마음대로 심판대에 세운다고?”
“자네, 어서 일행을 설득하도록. 어떤 연유로 이곳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신성 왕국과 척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잘 알고 있을 테니 말이야.”
“…미쳐버리겠네.”
대화가 통하질 않았다.
이진한이 한숨을 내쉬자 팔라딘은 통첩의 유예가 끝났다는 듯 가볍게 손을 들어 올리며 수하들에게 신호했다.
“앞으로 셋을 세겠다. 그전까지….”
“잠─까안───!”
팔라딘의 말을 끊고 큰 고함이 울려 퍼진 것도 바로 그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