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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159화 (159/210)

◈ 159.

【1152:14:58】

렝케 가문에서의 마지막 날이 도래했다.

이진한을 비롯한 그 일행은 전부 준비를 끝냈고, 저택 중앙 홀에 모여 해가 뜨기를 기다렸다.

다음 목적지는 북쪽 숲.

몇 달 만의 귀환이었기에 엘레오노라는 살짝 기대된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잘 지내고 있겠죠? 막내는 태어났을까요? ”

“슬슬 아닐까 싶은데, 도통 연락이 오질 않아서 모르겠네.”

이진한은 손에 쥔 수정구를 바라보았다.

위험하면 연락하며 통신용 수정구를 남겨 줬었다. 하지만 정말로 위험할 때만 연락할 생각인지 그것은 지금까지 잠잠하기만 했다.

그렇기에 그곳에 갈 예정이라고 연락할까 했지만, 깜짝 놀라게 하지 않기로 했다.

“이리아 양은 올까요?”

“글쎄.”

일레이나의 말에 이진한은 어깨를 으쓱였다.

하루 이틀 정도 기다리며 시간을 주었다. 오늘 동이 트면 떠난다고 했으니 함께 갈 생각이 있다면 이곳으로 나올 터.

“저는 온 다에 걸겠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긴 해요.”

미르엘과 일레이나는 그녀가 파티에 합류할 것이라고 확정한 듯했다.

하지만 엘레오노라는 살짝 고민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짊어진 책임이라는 게 그리 가벼운 건 아니잖아요. 저는 잘 모르겠네요.”

황녀였던 엘레오노라는 이제야 이리아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 역시 그가 다가와 황녀 자리를 내려놓고 함께 가자고 했더라면 순순히 따라갈 수 있을까.

물론 렝케 가문의 당주와 오스칼 제국 황녀라는 위치는 천지 차이였지만, 그 마음만은 비슷할 터.

더군다나 아끼는 동생에게 그 무게를 지우는 일이라면 저어될 것이 분명했다.

“…슬슬 동이 트네요.”

창밖으로 보이는 산맥 끝자락으로 여명이 피어오르며 짙푸른 어둠을 몰아냈다.

슬슬 떠날 시각이 다가왔기에 이진한은 문 쪽으로 몸을 돌리며 일행을 바라보았다.

“가자.”

“안 오려나요.”

“인사라도 했으면 좋을 텐데.”

“아니, 차라리 이게 나아요. 맺고 끊는 건 확실하게 해야 하는 게 좋으니까.”

일레이나가 두 여인의 등을 밀며 이진한의 뒤를 따랐다.

곧 저택 입구에 준비된 마차에 다다랐고, 문을 열며 올라탈 찰나 높은 소리가 들려왔다.

피이이이─.

솟구친 신영이 천천히 활강하며 그들 쪽으로 내려섰다.

그 몸을 감싸고 있던 실피온은 흩어지듯 사라졌고, 이리아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이마에 서린 땀을 닦았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밤새 고민하느라 잠을 설치는 바람에….”

“늦잠 잤다고?”

이진한이 헛웃음을 흘리자 이리아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고개를 푹 숙였다.

“다른 분들과 이야기는 충분히 하셨나요?”

“아, 네. 장로를 비롯한 가신 분들과 상의 끝에 내린 결정이에요. 동생과도 어젯밤 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눴고요. 그 때문인지 일어나지를 못하더라고요.”

엘레오노라의 말에 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

“어쨌든 환영해요.”

“맞습니다. 일단 마차를 타고 이야기하시죠.”

결정이 바뀌기 전에 일단 마차에 태워서 출발하자는 생각으로 미르엘은 그녀를 마차로 인도했다.

모두 탑승한 뒤 마차의 문이 닫혔고, 곧 저택을 떠나며 출발하기 시작했다.

다른 이들은 이미 몇 번이고 이래왔기에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각자 자리를 찾아갔다.

이리아만이 살짝 어색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더니 주춤하는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원래 이렇게 마차를 타고 이동하나요?”

“먼 거리는 텔레포트 게이트를 이용해요. 짧은 거리는 마차로 이동하고요. 이곳 나스닥에도 텔레포트 게이트가 있었죠?”

“네. 항구 중심지라 설치되어 있어요.”

분명 익숙한 풍경일 터인데 창밖을 바라보는 이리아의 얼굴에는 긴장과 함께 설렘이 가득했다.

“그럼 이렇게 되었으니 다시 자기소개나 할까요.”

“앗, 그런가요.”

“긴장할 필요 없어요. 이제 같은 파티원이니까. 저는 일레이나 유클리드에요. 이터널 학파의 소속으로 애머시스트라 불렸고, 지금은 《영원》의 마법을 계승 받고 있어요.”

“미르엘입니다. 《정의》의 검술을 계승 받고 있습니다.”

“엘레오노라에요. 아시다시피 황녀였지만, 지금은 성을 버렸어요.”

“…아, 저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뭐죠?”

이리아는 살짝 수줍은 태도로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을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두, 두 분. 정말로 그렇고 그런 사이신가요?”

둘은 잠시간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뜻을 깨닫곤 입을 벌렸다.

“헛소리에요!”

“…대체 왜 그렇게 소문이 퍼졌는지 모르겠습니다.”

엘레오노라는 격하게 부정했고, 미르엘은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검을 매만졌다.

마치 소문의 원흉을 찾는다면 단 칼에 베어버리겠다는 심층 의식이 깃든 것처럼 보였다.

“제가 엘레오노라 님을 모시는 건 맞지만, 그런 불순한 감정은 추호도 없습니다.”

“맞아요. 어릴 적부터 함께 해온 친자매 같은 관계에요.”

“아, 그렇군요.”

이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의혹은 해결된 듯하나 기대와 달라 살짝 시무룩한 기색으로 보였다.

“…그래서 저희는 이제 어딜 가나요?”

“최북단이요. 북쪽 숲이라고 들어보셨나요?”

“아, 알아요, 《영원》의 계승자인 하얀 마녀들이, 앗.”

이리아의 시선이 일레이나를 향했다.

그녀는 자신에게 향한 그 눈동자에 이미 예상한 반응이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이쪽이랑도 아는 사이거든요.”

“정말로 마녀가 그곳에 있나요?”

“마녀라기엔 너무 귀여운데. 일단 가보면 알 거예요.”

여성끼리라 그런지 대화가 끊이질 않으며 순식간에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졌다.

그 사이 이진한은 어느 순간 내부에서 나가 마차 밖 난간에 기대 저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화 중 슬쩍 그에게로 시선을 옮긴 미르엘이 중얼거렸다.

“뭔가 복잡해 보이시네요.”

“원인은 짐작 가는데 자세한 이유는 모르겠단 말이죠.”

“…제 몸에 깃든 그 존재 때문인가요.”

이리아는 제 가슴께를 더듬었다.

대체 누가 그 안에 깃들었기에 검은 현자가 심란해할 정도란 말인가.

‘…설마, 진짜 《창조》가?’

자신의 선조가 나타나기라도 한 건가.

“일단은 조금 더 기다려보죠.”

엘레오노라의 말을 끝으로 그들은 조심스럽게 시선을 거두었다.

***

노스 벨헤드렘.

마인들의 습격과 유령 성채의 발현으로 멸망 당했던 도시는 몇 달 만에 제법 회복한 모습을 보였다.

깡그리 무너졌던 건물들도 제법 터를 잡았고, 곳곳에 돌아다니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애초에 희귀 광물이나 몬스터가 많아 사람이 몰리는 지역인지라, 위기를 기회로 잡은 이들이 몰려온 듯싶었다.

물론 이전과 더 해 달라진 점이라면 다른 지역의 평균보다 사제나 성직자의 분포가 눈에 띄게 늘었다는 것이었다.

“이 정도면 꽤 분전했네요. 중립 도시일 텐데.”

“쓸모가 많은 곳이니까.”

텔레포트 게이트를 넘어 노스 벨헤드렘에 당도한 그들은 폐부를 훑는 차가운 공기에 모두 기지개를 켜며 그 추위를 만끽했다.

어차피 이곳에 머물 이유는 없었기에 곧바로 마차를 타고 성을 나섰고, 마물 군세가 걸었던 가도를 달리며 북쪽 숲으로 향했다.

“이렇게 눈이 뒤덮인 풍경은 처음이에요.”

이리아는 창틀에 기대 새하얀 세상을 구경했다.

나스닥도 눈이 오긴 했지만, 이렇게 뒤덮일 만큼 많이 내리진 않았다. 그렇게 얼마를 지켜보고 있었을까, 그녀는 저 너머에서 달려오는 한 무리 마물들을 볼 수 있었다.

“잔여 마기가 몬스터에게로 깃들어 더 강해졌다고 하더니, 진짠가 보네요.”

엘레오노라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마차 위에 생긴 마법진으로부터 날카로운 삭풍의 바람이 휘몰아쳐 이쪽으로 다가오던 마물들을 모조리 도륙해버렸다.

“…엘레오노라 님은 바람 계통의 마법을 주로 쓰시나요?”

“네. 이쪽이 제 성향과 잘 맞거든요.”

“그럼 바람의 정령과 계약 맺어보시는 건 어떤가요? 비약적으로 위력이 상승하는 건 아니지만, 계약 맺은 것만으로도 효율이 올라가거든요. 저번에 보니까 정령 친화력도 어느 정도 있던 것 같으신데.”

“정말요? 저는 좋죠.”

마법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효율이었다.

그것을 조금이라도 높여준다니 거리낄 이유는 없었기에 냉큼 고개를 끄덕이자 이리아는 품에서 작은 돌멩이를 꺼냈다.

“풍환석 조각을 꺼내왔어요. 목적지에 도착해서 여유가 있을 때 한번 해보죠.”

“알겠어요.”

그렇게 몇 번의 마물 무리와 더 마주친 끝에 마차는 북쪽 숲의 결계에 도달했다.

-멈춰라. 이곳은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다.

엄숙한 경고가 들려왔다.

그 익숙한 목소리에 살짝 장난기가 발동한 이진한은 마차 밖으로 고개를 쑥 내밀며 외쳤다.

“문 열어주면 안 잡아먹지!”

-어?

그 말 하나로 이쪽의 정체를 곧바로 파악했는지 그녀는 의문성을 내었다.

곧 결계의 일부분이 지잉, 하는 소리와 함께 열리며, 누군가 빠른 속도로 달려왔다.

다다다다다다!

이진한은 마차의 문을 열고 내렸고, 이내 자신에게 달려든 호에엥의 몸을 받아주며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현자님!

“잘 지냈어?”

호에엥은 반갑다는 표정으로 그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고작 몇 달 만의 재회인데 꼬마였던 모습이 이제는 청소년으로 보일 정도로 많이 성장해 있었다.

이전보다 감정도 훨씬 풍부해진 것이, 이제는 정말 살아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툭.

그녀를 뒤따라 헤으응 역시 한층 더 성숙해진 모습으로 차분히 내려섰다.

-오랜만입니다. 연락하고 오시지 이렇게 갑자기 찾아오시다니.

“놀래켜주려고.”

“오랜만이에요!”

“오랜만입니다, 헤으응.”

“잘 지냈어요?”

이진한을 뒤따라 다른 세 여인도 반갑다는 기색으로 인사하며 마차에서 내렸다.

끝으로 이리아는 낯선 상황에 긴장이 되는지 그녀들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일행의 뒤로 따라붙었다.

“그 아이야?”

이진한의 시선이 헤으응의 다리를 붙잡고 슬쩍 얼굴을 내밀고 있던 작은 아이에게로 향했다.

-예. 이번 대의 하와와입니다. 현자님이 도와주신 덕분에 본래 주기보다 더 빨리 태어날 수 있었습니다.

-아, 안녀하셉, 읏!

말하는 것부터 긴장되는지 혀를 씹었다.

이진한은 귀엽다는 표정으로 그 머리를 쓰다듬어준 뒤 헤으응을 바라보았다.

“별일 없었지?”

숲에 설치한 결계나 마법들은 모두 이상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잠시 그것들을 점검하자, 옆으로 다가온 헤으응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크게는 없었습니다. 노스 벨헤드렘이 복구되고 사람들의 왕래가 잦아지며 다시 설화석을 캐는 원정대가 늘긴 했지만, 이곳까지 침범하지 않는다면 굳이 신경을 쓰지 않았으니까요. 그런데….

“그런데?”

-신성 왕국 측에서 계속 접촉해오고 있어요! 어떻게 알았는지 여기에 묻혀 있는 고대 신의 잔재를 조사하겠다며 길을 열어달라고 협박 중이에요!

“흠.”

이진한은 턱을 쓰다듬었다.

애초에 마족들에게 퍼진 정보이니 신성 왕국 측도 알고 있어도 이상하진 않았다. 문제는 그들이 왜 고대 신의 잔재에 관심을 드러냈냐는 것이었다.

-일단 들어가셔서 이야기하시죠. 바람이 찹니다.

“그래, 일단 들어가자.”

“온천, 온천도 준비됐죠?”

-온천은 24시간 내내 준비되어 있어요! 이번엔 저도 함께 들어갈 거예요!

북쪽 숲으로의 귀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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