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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158화 (158/210)

◈ 158.

“니아?”

이리아는 갑작스러운 동생의 등장에 두 눈을 크게 떴다.

이 지하는 당주에게만 출입이 허락된 공간.

그렇기에 니아는 들어온 적이 없어야 했지만,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발걸음으로 걸어들어와 그들 앞에 섰다.

“언니, 미안. 사실 나도 이곳에서 언니가 없을 때는 간간이 수련하곤 했어.”

“어떻게?”

“고서에서 발견했거든. 당주가 아니더라도 직계 혈통이면 출입할 수 있는 방법을.”

사실이라면 심각한 중죄에 가까우나, 이리아는 굳이 동생을 타박할 마음이 없었다.

옛날부터 정령 친화력이 비정상적으로 높은 자신과 비교되어왔다. 그러니 스스로 이런저런 방법을 갈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터니.

“….”

니아는 자신에게 향하는 시선들에 흠칫했다.

하지만 이내 각오를 다진 듯 두 주먹을 꽉 쥐며 앞으로 나아가 고개를 들었다.

“사실 언니가 당주 자리를 썩 내켜 하지 않는 건 알고 있어. 어릴 적부터 모험가를 꿈꿨잖아? 가문에 묶여서, 그리고 나 때문에 포기했지만.”

“니아. 그런 게 아니란다.”

이리아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똑 닮은 동생을 바라보았다.

“처음엔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달라. 나는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렝케 가문의 당주야. 그 누구도 아닌 스스로 선택한.”

“그래도 어릴 적부터 꿈은 모험가였잖아?”

“….”

이리아는 살짝 멈칫했다.

부정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사실 베르너가 자신을 따라오라 제안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던 것도 그 제안을 확고히 거절할 자신이 없어서였다.

‘하지만….’

가문과 동생을 어떻게 버리겠는가.

겨우 마음을 가라앉힌 이리아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지만, 니아는 자신의 앞으로 두 손을 모으며 눈 부신 빛을 뿜어내었다.

사르륵.

그녀의 주위로 퍼져나간 자글자글한 물방울이 곧 한데 모여 형상을 이루기 시작한다. 정령이 뚜렷한 인간의 모습을 할 수 있는 건 중급 정령부터 뿐. 그리고 지금 니아 앞에 나타난 정령은 명백히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언제….”

물의 중급 정령 네레이드가 허공을 유려하게 선회하며 헤엄친다. 이리아가 마지막으로 기억하기에 동생은 하급 정령을 소환해내는 것이 겨우인 재능이었다.

하지만 언제 이렇게 발전한 것일까.

단순히 중급 정령이 아닌, 조금만 더 가다듬는다면 몇 년 이내에 상급 정령과의 계약을 노려볼 법한 수준이었다.

“나도 몰래 많이 노력했거든. 언니한테 도움이 되려고. 그러니까 망설임 없이 선택해도 돼.”

“…나는.”

설마 니아가 이렇게까지 성장했을 줄은 몰랐기에 이리아는 당황한 눈치로 두 눈을 끔벅거렸다.

일레이나나 다른 이들 역시 그 모습에 흐뭇한 미소를 지어온다. 한쪽 옆에 있던 이진한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을 받았다.

“얼마 정도 말미가 있으니까 당장 결정 내리지 않아도 돼. 충분히 심사숙고한 뒤에 선택해도 늦지 않으니 떠나는 날 듣도록 하지.”

【1184:04:54】

시간의 유예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거의 나흘을 쓸모없이 보낸 건 아쉬웠지만, 그 대신 얻은 정보들이 많으니 그것대로 나름의 성과. 그렇기에 며칠 정도 이곳에 더 머무르며 몸을 추스를 생각이었다.

“그러면 이제 좀 쉬자.”

실피드와 계약하느라 힘이 다 빠진 이진한이 창백한 얼굴로 쓰러져 내렸다.

***

하루 뒤.

포션과 마법으로 축난 몸을 어느 정도 회복시킨 이진한은 겨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끄응.”

며칠간 침대에 누워 있기만 했으니 몸이 찌뿌둥하기 짝이 없었다.

다른 이들은 각자 일로 바쁜지 모습을 보이지 않는 상태.

홀로 저택 안을 거닐며 산책하는 도중 연무장 쪽에서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미르엘인가.”

가벼운 무장 상태로 그 가운데 홀로 서서 쉴 새 없이 검을 휘두르고 있다.

마나를 사용하지 않고 순수한 육신의 힘으로만 움직이는 것이라 그리 쾌속하지는 않았지만, 절도 있는 동작으로 끊어지는 그 움직임은 제법 감탄이 나오는 것이었다.

“어?”

도중 이진한은 무언가를 깨닫고 의문성을 냈다.

그 탓에 이쪽의 기척을 눈치챈 미르엘이 검을 거두고 고개를 들었고, 둘은 이내 시선을 마주쳤다.

“미르엘, 너.”

“…아, 네.”

이진한의 말에 미르엘은 살짝 부끄럽다는 듯 귀 뒷머리를 쓸어올리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저번 싸움으로 마스터 경지에 도달했어요.”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에서 잔이 넘치기 직전까지 물이 담겨 있던 그녀는 결국 과도기를 넘어 그 벽을 부수고 새로운 경지로 올라선 듯했다.

“그래도 아직 부족해요. 저택을 습격했던 마인들과의 싸움은 정말 형편없이 져버렸습니까요.”

꽈아악.

미르엘은 검을 다잡은 채 그날의 기억을 회상했다.

비록 그들이 인간임을 저버리고 마족에게 영혼을 팔아 힘을 취한 것이라곤 하지만, 강한 것은 강한 것이었다.

강함에 절대적인 규칙이나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강함은 상대적인 것.

절대적인 것은 그 상관관계에 따른 결과만 있을 뿐이었다.

그렇기에 자신은 패배했고, 피투성이가 되어 숨을 헐떡거리던 가운데 겨우 그것을 깨닫고 인정할 수 있었다.

“정답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걸요.”

웅웅웅─.

새하얀 검신을 지닌 프로스트 위로 새하얀 빛이 응어리졌다.

힘의 총량 자체는 전과 그리 차이가 없었지만, 그 안에 응집된 밀도는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아직은 미숙하나 분명한 소드 마스터의 기세.

이진한은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손대중 덜 해도 되겠네.”

스릉.

인벤토리에서 꺼내든 템페스트를 손에 쥐자, 미르엘은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훌쩍 뒤로 물러나 대련의 자세를 취했다.

“괜찮으시겠어요? 아직 몸이 편치 않으실 텐데.”

“원래 싸우면서 회복하는 거야.”

“저, 안 봐 드려요?”

“까불기는. 봐주는 건 백 년은 이르다.”

둘은 우스갯소리를 나누며 전의를 피워 올렸다.

그의 말대로 용사 클래스의 스킬인 「불굴」은 의지에 따라 표명되기에 투지를 불태울수록 더 강하게 활성화된다. 그러니 이런 대련을 거리낄 이유가 없었다.

퉁.

둘의 신형이 동시에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 직후 허공에서 몇 번이고 거친 소음이 터져 나오며 샛노란 불똥이 흩날린다.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니 이제 범인의 육안으로는 따라가기도 힘들 정도의 속도로 전투가 계속 이어지는 것이었다.

‘과연.’

찰나간 수십 번은 이어진 분광십이검의 초식을 모두 쳐낸 이진한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미르엘의 강함을 분석했다.

사실 레벨이나 스펙만으로 따지자면 이전과 그렇게 차이가 나지 않겠지만, 벽을 허물고 이뤄낸 경지의 상승은 비약적인 강함을 이루어냈다.

단순한 수치로는 표시되지 않은 인간 자체의 단단함.

그러니 옛날처럼 쉽게는 쓰러뜨리기 어려운 수준까지 올라오게 되었다.

“그래도.”

아직은 멀었다.

미르엘의 검이 빛살처럼 쏘아졌다.

분광십이검 참호격(斬虎擊).

어지러이 움직이는 서른여덟 개의 잔영에 이진한 역시 검 끝을 바로 세웠다.

선택한 검술은 그녀와 같은 참호격.

자신과 같은 검술로 나오는 이진한의 모습에 미르엘의 두 눈이 부릅 뜨였다.

파가각!

범의 발톱처럼 날카로운 그 검격이 서로 맞부딪치며 산산조각이 난다. 그녀와 같은 경지에 맞춰 휘둘렀다고 할지라도 검술의 실력에선 큰 차이가 있으니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큭!”

미르엘이 신음을 토해내며 물러났다.

“소드 마스터인가.”

테라스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엘레오노라는 살짝 답답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수하의 아니, 오랜 친구의 성장은 분명 기뻐해야 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녀는 솔직하게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엘레오노라의 경지는 아직 5클래스 마스터.

나이에 비해 충분히 높은 경지고, 빠른 성장이었다.

하지만 주변에 비해 뒤처지는 감각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영원》의 계승자로 애초부터 천재로 이름이 높았던 일레이나, 《정의》의 검술을 물려받은 것으로 그 찬란한 재능을 개화한 미르엘.

자신은 검은 현자의 마법을 직접 전수받는다고 하지만, 생각만큼 시원하게 진도를 나아가지 못했다.

어서 빨리 벽을 뛰어넘어 진정한 마법의 시작이라는 6클래스 마도사에 이루고 싶은 마음만 굴뚝 같을 뿐이었다.

“뭐해요?”

그때, 테라스로 다가온 일레이나가 왼손에 든 커피잔을 내밀며 슬쩍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서로 함께 한 건 몇 달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밀도가 남다르니 표정이나 기색에서 어렵지 않게 속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너무 조급해하지 말아요. 마법은 그럴수록 빨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리고 저 사람이 가르치는 방식이 워낙 어려워야죠.”

“《영원》의 마법도 어렵잖아요.”

“아뇨, 복잡한 거죠. 어려운 거랑 복잡한 거랑은 달라요. 그리고 나는 인생을 거기에 바쳤으니까 이 정도는 당연한 거죠.”

“저는….”

“나처럼 마법에 인생을 바쳤었다고 할 수 있겠어요?”

엘레오노라는 쓴웃음을 지으며 짧게 고개를 저었다.

황녀로서의 삶에서 나름대로 노력했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저 교육의 일환으로 즐긴 것뿐이었다.

일레이나처럼 인생을 걸지도, 미르엘처럼 필사적으로 수련한 적도 없었다.

“그리고 좀 괘씸하지 않아요?”

“괘씸하다뇨?”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엘레오노라가 고개를 들었다.

“이리아요. 파티원으로 제안할거라는 건 이미 예상하고 있었지만, 저희에게 이야기 정도는 해줬어도 괜찮았잖아요.”

“…뭐, 베르너 님도 그간 일이 많으셨잖아요. 다치기도 하셨고.”

“그것도 그렇지만.”

애초에 자신들 역시 억지로 따라온 것이 아닌가.

그 부분을 따지자면 할 말이 없기에 일레이나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건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네 말 대로 일이 많아서.”

연무장 한가운데서 대련 중이던 이진한이 어느새 테라스 난간 위로 올라와 있었다.

가볍게 땀을 닦아내며 머리를 털자, 하늘을 날고 있던 까망베르가 그 어깨에 내려앉았다.

하루 다르게 커진 녀석은 이제 어린 강아지 정도의 크리고, 삐익 거리며 제 주인에게 교태를 부렸다.

흐뭇한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이진한은 고개를 돌려 일레이나와 엘레오노라를 향했다.

“사실 원래 이리아를 합류시키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어.”

“그러면요?”

“하지만 상황이 바뀌었지.”

“상황, 인가요.”

엘레오노라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일레이나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그날 밤을 회상했다.

“그때 그녀 속에 깃든 존재가 그냥 마족은 아니군요.”

“그래. 나도 자세한 건 아직 확정 짓지 못해서 제대로 말해주지 못했지만….”

까딱 잘못한다면 이때까지 자신들이 알고 있던 진실 자체가 전부 부정당할 수도 있었다.

물론 그마저도 상대의 기만일 수도 있다. 지금 단계에선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는 판별할 수 없는 노릇이니까.

“그러니까, 이제 하나씩 차근차근 알아봐 가야지.”

아직 시간은 충분히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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