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7.
정령왕 실피드는 자신이 아직 상급 정령일 때를 회상했다.
대략 천 년 전.
현시점에서는 고대라 불리는 그 시대는 전운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찬란히 빛나는 이들이 가득했다.
자신의 계약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른 세상에서 건너와 이 세상 모든 정령과 계약을 맺은 희대의 천재.
속성 간의 친화력은 조금 차이가 있긴 하지만, 정령들 사이에서도 과거부터 미래까지 그만한 존재는 없으리라 거론되곤 했다.
정령은 상급부터 자아를 가지기 시작한다. 실피드는 아직 실피온이었을 무렵의 자신을 쓰다듬어주던 그 손길을 기억하고 있었다.
“악신을 쓰러뜨리기까지 여정은 굳이 말하지 않겠습니다. 특별할 것도 없고 그리 좋은 여정도 아니었으니까요.”
“그래.”
“작금 세상이 돌아가는 걸 보면 예상할 수 있는 것처럼 영웅 분들은 각자 대륙 각지로 흩어졌습니다. 자신들이 한곳에 있으면 괜한 경계를 받는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죠.”
이진한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한 명 한 명이 국가 단위의 전력이었다. 영웅이라는 이름 아래 하나로 묶이긴 하지만, 전부가 모인다면 경천동지의 힘을 보일 수 있었다.
더군다나 추종하는 세력까지 합친다면 기존 왕국들이 위협을 느끼는 것도 당연한 일.
그렇기에 서로 거리를 벌리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각자 몇 가지 규칙을 정했습니다. 정해진 날을 제외하고는 서로 접촉을 금지. 세력을 이루거나 사람을 거느리는 건 상관없지만, 자신들끼리 분란을 조장하지는 말자거나….”
“그래서 곳곳에 그들의 흔적이 남아 있는 거군.”
“그래도 인연을 계속 이어나갔습니다. 이 넓은 세상에서 같은 본향을 지닌 몇 없는 이였으니까요. 하지만.”
“하지만?”
“《정의》께서 세우신 왕국이 갑작스럽게 세력을 부풀려 나가는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정의》가? 아니, 그 사람이 왕국을 세웠다는 이야기는 없었는데?”
“당연하지요. 멸망했으니까. 그 시간대의 이야기는 영웅 분들께서 의도적으로 역사에서 지우셨습니다. 별로 좋은 것은 아니었으니까요.”
수많은 이가 자신 앞에 조아려 따르기를 원하자 욕심이 났던 것인지 《정의》는 본격적으로 자신의 세력을 구축했다.
산골짜기에서 머물던 작은 왕국이 《정의》 본인을 앞세워 주변 국가를 잡아먹고 강대국으로 성장했다.
곧이어 열강으로 불리는 부류와 전쟁을 이어나가는 듯싶더니 순식간에 그들을 고꾸라뜨리며 거대한 제국으로 성장했다.
“영웅 분들은 그때까지 아무런 생각이 없으셨습니다. 오히려 《정의》를 응원해주었죠. 현자님께선 이러다가 대륙 통일하는 것이 아니냐며 우스갯소리까지 하셨습니다.”
“내가?”
“예. 제가 직접 들었습니다. 하여튼 그럴 정도로 신경 쓰지 않으셨지요. 모두 약간 어딘가 세상일에 신경 쓰지 않는 세속에서 초월한 분위기가 있으셨습니다. 그 칼날이 자신에게 향하기 전까지는요.”
《정의》는 다른 영웅들을 동격으로 인정했다.
하지만 그 추종자들은 아니었다. 《정의》만이 유일한 영웅이며 나머지는 곁가지일 뿐이다. 그렇기에 오만방자한 행태를 보였고, 보다 못한 다른 영웅들이 《정의》를 찾아갔다.
“전쟁을 일으키는 것까진 상관하지 않겠지만, 자신들의 영역을 침범하지 말아라. 그리 말씀하셨지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겠군.”
이진한은 미간을 짚었다.
딸바보 아저씨가 어쩌다 그렇게 된 것일까.
권력에 취한 것일까, 아니면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지 못해 절망해서 자포자기한 것일까.
의아했던 점이 바로 그것이었다.
자신은 그렇다 쳐도 현실에 소중한 사람을 두고 온 이들이 몇몇 있었다. 《정의》 역시 유명한 딸바보이거늘 어째서 이곳에 남는 것을 선택했는가.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예.”
“우리는 이 세계에 남는다는 선택을 한 건가?”
“예, 지금 이렇게 계시지 않습니까.”
“어째서?”
“그걸 저한테 물으셔도.”
실피드는 난처한 듯 미소를 지었다.
“자세한 건 알지 못하지만, 아마 예전의 자신과 달라져서 돌아간다고 할지라도 적응하지 못할 걸 두려워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런가.”
“아니면 이 세상에서의 삶이 더 낫다고 생각하셨을 수도 있고요.”
이진한은 입을 닫았다.
실피드의 말은 사도가 했던 것과 달랐다.
여신의 배신.
그녀는 자신들을 돌려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저버렸고, 끝내는 이 세상에 방치해버렸다.
당장 진실은 알 수 없었지만, 가장 큰 부분에서 모순점이 생기니 머릿속이 복잡해질 지경이었다.
“현자님께서는 그녀를 곁에 두실 생각이십니까?”
“그녀? 누구?”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와중 실피드가 말해왔다.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 헷갈려 되묻자, 그는 손을 뻗어 자신 옆에 자리한 이리아를 가리켰다.
“《창조》의 핏줄을 이은 아이입니다. 여러모로 쓸모가 많겠죠. 역대 선조 중에서도 가장 그 혈통이 짙게 발현되어 머지않아 최상급 정령까지 다룰 수 있게 될 겁니다.”
“흠.”
이진한은 침음성을 내뱉었다.
내심 고민하고 있던 문제였으나, 그녀의 의사가 먼저였다. 싫다는 사람을 강제로 데리고 다닐 수는 없지 않은가.
“그건 그렇고 핏줄이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외형이 닮을 수 있나? 아니면 네 말대로 혈통이 짙게 발현된 영향이야?”
“예? 아, 그런 건 아닙니다. 클론으로 만들어진 존재들이니 당연히 외형이 같지요.”
“…뭐?”
처음 듣는 이야기에 이진한은 두 눈을 크게 떴다.
거기에 당황한 것은 오히려 실피드였다. 그는 설마 몰랐냐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며 이리아를 가리켰다.
“정말 알지 못하셨습니까? 그녀는, 렝케 가문은 《창조》의 클론으로 만들어진 가문입니다. 그분께서는 죽을 때까지 당신만 그리워하셨는데 다른 남자와 가정을 이룰 이유가 있겠습니까?”
“무슨….”
이진한은 일순간 말문이 막혔다.
클론으로 세운 가문이라고? 영락없이 자신과 헤어진 뒤 다른 남자와 가정을 꾸려 가문을 세운 줄로만 알았다.
“하아…. 그 영감탱이 때문에 그렇군요.”
긴 한숨을 내쉰 실피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전대 실피드가 전언을 맡아두고 있었습니다. 대충 《창조》가 당신을 원망하지 않으며 끝까지 사랑했다는 그런 내용이지요. 렝케 가문에 대한 것도 설명이 있었을 텐데 오랫동안 풍환석에 봉인되어 있었다 보니 그 부분에 대한 기억이 날아간 듯싶습니다. 저는 당연히 설명한 줄로만 알고 있었지요.”
“하하….”
어깨에 힘이 쭉 빠졌다.
이진한이 비틀거리며 바닥에 주저앉아, 실피드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현자님께서는 앞으로 어찌할 예정이십니까.”
“무얼?”
“마계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건 알고 계시지요. 그들은 현재 대륙 각지에 봉인된 고대 악신의 잔재를 확보해 마왕 강림의 제물로 사용하고자 수작을 부리고 있습니다. 정령계도 비상이 걸렸지요. 각 정령과 계약을 맺은 자들을 통해 이야기를 전하며 움직일 것을 촉구하는 중입니다.”
사도가 했던 것과 일맥상통하는 이야기였다.
“거기에 현자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천년은 기존의 봉인을 좀먹고 풀려나기에, 충분한 시간. 다시 그 잔재를 봉인할 능력을 갖추신 건 작금 대륙에서 현자님뿐입니다.”
“내가 돌아다니면서 그것들을 다시 봉인해라?”
“예. 그래서 제가 굳이 템페스트를 빌미로 현자님과 계약을 맺은 것입니다. 도와드리기 위해서 말이죠.”
이진한은 손에 쥔 템페스트를 바라보았다.
사도는 물론이고 그 역시 믿을 수 없다. 대화하면 대화할수록 어딘가 꺼림칙하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었다.
지금으로서는 사도에게 조금 더 마음이 깃드는 것은 확연한 사실.
한쪽은 잔재의 봉인을 풀으라 말하고 있고, 한쪽은 다시 봉인을 새로이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어찌 되었든 잔재를 찾아야 한다는 말이겠네.’
봉인을 풀든 새로 하든 그것들을 찾아야 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허락된 시간은 여기까지인 것 같군요. 그럼 다음 이야기는 나중에 하지요.”
대답을 하기도 전에 실피드의 신형이 발끝에서부터 가루가 되어 흩날린다. 그것들은 곧 템페스트의 안에 흡수되더니 정지된 시간의 흐름이 다시 흘러감과 동시에 주변으로 세찬 기류의 바람을 흐트러뜨렸다.
「템페스트」
-〈레전더리〉
-바람의 가호가 깃든 검.
새하얀 손잡이 위로 연녹색 칼날이 은은한 빛을 내뿜으며 가볍게 진동했다.
“와아.”
무수히 퍼져 나가는 바람의 정령들에 바로 옆에 있던 이리아가 옅은 감탄을 토해냈다.
“정말 정령왕과 계약하신 건가요.”
“그래. 정지된 세계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령왕 정도 되면 시간도 정지시킬 수 있는 거군요.”
이리아는 내심 부럽다는 시선으로 템페스트를 바라보았다.
“…엄청나네요.”
“맞아요. 까딱하면 드래곤보다 쌘 것 아니에요?”
“엘레오노라 님.”
일레이나 역시 두 눈을 크게 떴다.
엘레오노라도 함께 감탄을 토해내자, 그 옆에 있던 나탈리를 의식한 미르엘이 그녀의 옆구리를 살짝 찔렀다.
“실피드인가요. 나중에 한 번 이야기하게 해주실 수 있나요? 저도 이프리트랑 계약하고 싶은데 말좀 전해달라고 부탁하게요.”
“그래. 어렵지 않지.”
나탈리의 말에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전해주는 것쯤이야 어렵지 않다. 대신 막대한 대가를 뜯어낼 생각이었지만.
파스스스─.
그 말을 알아들은 것인지 「템페스트」가 작게 요동쳤다.
엘레오노라가 다시금 신기한 눈빛을 바라보자 이진한은 그럴 것 없다는 표정으로 검을 살짝 흔들었다.
“지금껏 사용했던 것들도 다 비슷한데 뭐.”
‘월드’에서부터 사용하던 용아청성창이나, 마룡의 심장으로 만든 스태프인 블랙 다이아몬드 역시 같은 등급이었다.
이보다 높은 신화급은 ‘월드’에서도 구현되지 않은 것으로, 이 세계에 넘어오기 전 다다음 패치 때 업데이트된다고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니 이곳 아르테니아에도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이리아.”
“…네, 네?”
이리아는 갑작스러운 부름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물망초 빛깔 머리카락에 동그란 눈매.
클론으로 만든 핏줄이라기엔 아무리 보아도 그녀와 똑 닮아있다.
아니, 클론으로 만들었기에 더더욱 그런 걸지도 몰랐다.
“제안할 게 있다.”
“….”
그녀의 몸이 굳었다.
주위에 있던 이들 역시 올 게 왔다는 식의 분위기로 입을 닫으며 흥미진진한 시선으로 둘을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제안, 이요.”
이리아의 시선이 요동쳤다.
어디를 바라보아야 할지 모르는 것처럼 이곳저곳으로 방향을 옮기며 두 손을 꼼지락거린다. 종래엔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진한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내 파티에 들어오지 않겠어?”
덧붙이는 것 없이 직설적인 말이었다.
아니, 오히려 그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충분한 자신감, 누가 영웅의 파티원이 되기를 거부하겠는가.
하지만 자신에게는 가문이 있었다.
따르는 식솔들이 있었고, 책임이 있었으며, 동생이 있었다.
아무리 현자라고 해도 천 년간 이어온 렝케 가문의 이름을….
“내가 허락할게요.”
“…어?”
그때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이리아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