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6.
두 눈을 뜨자 깊은 강이 나타났다.
그 안에 얼굴을 넣고 눈을 뜨자 이리아의 기억으로 보이는 장면들이 둥둥 떠올라 흘러 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당신 때문에 베르너 님이 얼마나 심각하게 다치셨는 줄 알아요!
-죄송, 죄송합니다….
쓰러져 실려온 자신을 뒤로한 채 이리아에게 윽박지르는 일레이나, 그리고 그녀를 말리는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의 모습이 비쳤다.
그렇게까지 화낼 필요는 없는데.
이진한은 쓴웃음을 지으며 강 안으로 천천히 들어가 헤엄쳤다.
깊은 곳으로 들어갈수록 시간의 흐름을 역행한다. 나스닥 항구 도시에서 일어났던 와이번 소동 때를 거슬러 올라 처음 배에서 만났을 당시까지 올라갔다.
더. 더. 더.
그녀의 삶을 흘려넘기며 이진한은 더 깊은 곳을 향해 헤엄쳤다.
자신이 보고 싶은 건 이리아의 삶이 담긴 기억이 아니었다.
그녀의 어딘가에 숨어 있을 무언가.
정체를 가늠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것이었다.
파지직─.
그때 검은 스파크가 튀며 시야가 암전되었다.
그 기현상에 이진한은 자신이 원하는 목적지를 향해 잘 찾아왔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
어둠이 걷히며 흐릿한 풍경이 지나갔다.
전쟁, 끝없이 늘어선 인간의 해일. 쏟아지는 화마와 마법.
바퀴벌레처럼 밀려 들어오는 이들.
누군가의 시선에서 보는 광경이었다.
이윽고 몸을 돌리자 그 등 뒤에 있던 한 존재를 볼 수 있었다.
‘윽.’
이진한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기억과 시야를 통해 간접적인 경험을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엄청난 존재감에 일순간 의식이 흔들렸다.
이미 펼쳐진 마법이 풀릴 뻔했을 정도로 영향을 받았으며, 얼마간은 자리에서 멈춰선 채 그것을 수습해야 했다.
파아앗─.
그렇게 얼마가 지나자 기다렸다는 듯 다시 주위가 시커멓게 암전되었다.
그 가운데 새빨간 한 쌍의 눈동자가 뜨이더니, 이진한에게로 천천히 다가왔다.
“너희는 누구지?”
그들의 정체는 대략 짐작이 갔다.
사실 전부 보여준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확실을 기하고자 질문을 던졌다.
“두 번째 만남이로군, 어리석은 영웅이여. 우리는 사도, 섬기는 자이다.”
“사도.”
마인들 역시 자신을 사도라 칭했다.
하지만 눈앞의 이 녀석은 그들과는 결이 다른 존재일 터.
“잘못된 흐름을 바로 잡아야 할 때가 도래했다.”
“잘못된 흐름? 네가 섬기는 신이 패배한 걸 뜻하는 건가?”
“그렇다. 그건 본래 세상을 다스릴 한 명을 선택하는 신성한 의식이었다. 하지만 그 가증스러운 여신이 비열한 수법을 사용해 의식을 망치고 자신이 그 자리를 거머쥐었지.”
“비열한 수법이라는 건….”
“너희 같은 이방인들을 뜻한다.”
사도는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
“불쌍하도다. 좋을 대로 이용당하다가 종래엔 키우는 개만도 못하는 취급으로 전락해버리다니.”
“…그게 무슨 소리지?”
“너희는 소모품에 불과하단 소리다. 사도인 나는 너희를 곁에서 지켜봐왔다. 여신의 달콤한 말에 넘어간 뒤 배신당한 너희들의 말로를.”
정신이 무너져 내리고, 육체가 풍화되어 흔적도 남지 않게 되었다.
그 말에 이진한의 눈가가 떨렸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자신이 알고 있던 것과는 사뭇 다른 이야기였다.
지구로 다시 돌아가진 못했어도 이쪽에서 나름대로 좋은 삶을 보낸 것이 아닌가.
각자 대륙 곳곳으로 흩어져 여행도 하고, 나라도 세우고, 자신의 이름을 딴 유적지나 영지도 운영하고.
그렇게 행복하게 살다가 끝을 맞이 않았을까,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비참한 말로를 맞이했다니.
“쯧쯧, 인과율이라는 건 그리 만만치 않다.”
혀를 찬 사도는 딱하다는 목소리로 답했다.
“다른 세계에서 넘어온 것을 용납받으리라 보는가. 세계는 거대한 흐름에 의해 움직인다. 여신이 그것을 감당해주었다면 애초에 주신의 자리를 자치한 뒤 너희들을 돌려 보내주었을 테지.”
“그런….”
“나는 지금 네가 멀쩡히 살아 있는 것이 의문이다. 하지만 설사 그렇다고 한들 모종의 금제가 걸려 있겠지.”
“….”
이진한이 멈칫했다.
그렇다면 시간의 유예는 지난 천여 년의 여파가 아니라, 다른 세계에서 왔기에 인과율을 감당하지 못한 대가란 말인가.
“그럼 그렇지. 그 추악하고 더러운 여신이 순순히 자신의 사냥개들을 놓아주었을 리 없지.”
사도는 두 눈에 서린 붉은 빛을 내뿜으며 말했다.
“여기서, 제안이다.”
“제안?”
“그래. 오랫동안의 기다림이 드디어 끝에 도달했다. 너는 대륙 각지에 봉인된 우리가 섬기는 신의 잔재를 해방하여라. 그리한다면 다시 천여 년 전의 싸움을 재현해 이번에야말로 자웅을 겨룰 것이니.”
이진한은 헛웃음을 흘렸다.
“다시 세상을 멸망시키려고?”
“멍청한 소리가 따로 없군. 주신의 자리를 두고 싸우는 것인데, 세상을 왜 멸망시킨다는 것이지?”
“하지만 분명….”
“그건 그 가증스러운 여신이 지어낸 거짓이다. 멍청한 너희들이 보기 좋게 속아 넘어간 것이지.”
사도는 땅을 짓밟으며 말했다.
“하지만 우리는 학습했고, 진화했다. 여신이 그런 수법을 사용했다면 우리 역시 사용하는 것이 이치. 그렇기에 너에게 제안하는 것이다.”
이진한은 입을 닫았다.
무엇이 사실이고, 거짓인가.
과연 이들의 말을 믿어도 좋을까?
“…내가 만일 너희를 도와준다면, 대가로 무엇을 해줄 수 있지?”
“뒤틀린 걸 바로 잡아주겠다고 그분께서 약속하셨다.”
“…뒤틀린걸? 나를 고향으로 돌려보내 주겠다고?”
“너뿐만이 아니다. 여신의 손에 농락당해 풍토 된 그들까지 전부.”
“너희가 거짓말을 할 지는 어떻게 알고.”
의심하는 듯한 그 말에 사도는 코웃음을 쳤다.
“너에게 있어서 이 제안은 밑져야 본전이다.”
“밑져야 본전이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네 말을 따라야 할 이유를 찾을 수가 없는데.”
“이리 세상 물정을 모를 수가. 영웅이라는 이름이 아깝구나. 이미 마계는 중간계를 치기 위한 출정 준비를 모두 끝냈다. 모종의 준비를 끝낸다면, 조금 더 정확히는 마왕들이 현현할 제물을 모두 확보한다면 정말로 마무리되는 것이지.”
“…그리고 그 제물이 신의 잔재이고?”
이진한은 북쪽 숲, 지하에 있던 고대 신의 잔재를 떠올렸다.
뿔 한 귀퉁이, 그것에 서린 것만 하여도 감히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강한 기운이었다.
“그래, 멍청한 놈들이지. 단순히 기운이 많이 서려 있다고 덥죽 물고 있고 말이야. 애초에 격이 달라 감당할 수 없는 힘이거늘, 화를 자초하는지도 모르고. 한낱 마족 나부랭이가 신의 힘을 감당할 수 있을까.”
“음.”
그 부분에 대해선 자신도 많은 힘을 흡수한 적이 있기에 이진한은 슬쩍 입을 다물었다.
“사도들이 곳곳에서 움직이고 있지만, 영웅이란 작자들이 펼쳐놓은 봉인을 푸는 것에는 난항을 겪고 있다. 그 당사자인 너라면 어렵지 않게 해주할 수 있겠지.”
“그래.”
“그러니 너는 그 봉인을 모두 해제해라. 그리한다면 그 뒤는 나를 비롯한 사도와 주인께서 해결해줄 것이다.”
이미 자신들과 손을 잡았다는 말투였다.
묘하게 반발심이 일어났지만, 그럴 상황은 아니었기에 애써 억누르며 고개를 들었다.
“잔재가 서린 곳은 몇 군데 알고 있다. 그래도 섣불리 너희 말을 믿을 수 없으니 나도 나름대로 확인을 해야겠어.”
“조심성이 있는 건 나쁘지 않지. 하지만 그리 여유가 없다. 출정 준비를 끝낸 마계가 닥쳐오거나 그 가증스러운 여신이 눈치를 채곤 방해해올 수 있으니까.”
저저적─.
어둠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마인드 펄」의 시간이 끝나가는 것이었다.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할 말이 있다면 우리 쪽에서 가도록 하지.”
의식이 각성하며 순식간에 원위치로 되돌아왔다.
이진한은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채 고개를 들자, 멀뚱멀뚱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이리아를 볼 수 있었다.
“…된 건가요?”
“어. 혹시 안쪽에서 봤어?”
“아니요. 저는 그냥 손을 가져다 때신 것만 봤는데요.”
“그래.”
차라리 다행인 이야기였다.
이진한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일단 급한 건 템페스트 쪽이다. 이리아, 바로 계약을 준비할 수 있어?”
“아, 네. 저는 가능해요. 그런데 베르너 님은 괜찮으시겠어요? 온몸이 식은땀 범벅이신데.”
“그 정도는 괜찮아. 준비하고 올 테니 곧바로 부탁해.”
“네, 알겠어요.”
사도 쪽의 이야기가 정말이라면 쉬이 넘길 사안이 아니었다.
일단 템페스트로 실피드와 계약해 사실 확인을 하는 것이 먼저였기에 조금 무리를 해도 시간을 앞당기고자 했다.
그렇게 그들은 다시 렝케 저택의 지하, 《창조》의 정원으로 향했다.
“바로 움직여도 괜찮겠어요? 거의 죽기 직전이었는데.”
“괜찮아. 이 정도로 안 죽어.”
“그래도….”
그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일레이나가 우려를 드러냈다.
그만큼 이진한의 상태는 심각했던 차. 이제 겨우 움직일 정도로 회복했는데 당장 무리하는 게 우려되는 것이었다.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 이거만 하고 그 뒤는 좀 쉴 테니까.”
“…알았어요.”
일레이나가 한숨을 내쉬며 물러나자, 엘레오노라와 미르엘 역시 그 뒤를 따랐다.
절그럭.
이진한은 부서진 풍환석 앞에 템페스트를 내려놓고 이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럼, 시작할게요.”
“그래.”
곧 이리아가 가볍게 몸짓하며 소환 의식을 시작하자 뒤쪽에 있던 나탈리 역시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드래곤도 정령왕 급과 계약을 맺으려면 적어도 3천 살 이상이 되어야 했다. 아직 1천 살인 그녀도 최상급 정령 밖에 계약 맺질 못했기에 정령왕 소환 의식은 처음 겪는 것이었다.
“…윽.”
템페스트 앞에 선 이진한은 입술을 깨물었다.
다수의 마나석을 깔아 보조를 받았지만, 그래도 정령왕이라는 이름값 때문인지 막대한 마나가 한 번에 쑥 하고 빠져나갔다.
일순간 현기증이 일어나 비틀거릴 찰나,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와 템페스트 위에 깃들었다.
[바람의 정령왕 ‘실피드’가 계약을 제안합니다.]
기다리고 있던 문장이 눈앞에 떴다.
고민할 것도 없이 수락을 누르자, 미풍은 순식간에 거센 기류가 되어 그 주변을 감쌌다.
츠즈즈즈─.
동시에 세상의 시간이 조금씩 느려지기 시작한다. 종래에는 아예 멈춰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아주 느린 경지에 도달했다.
“놀라셨습니까. 흐름과 흐름 사이의 간극을 조절하는 것. 바람의 정령왕이기에 할 수 있는 기예이지요.”
“나도 이 정도는 할 수 있다.”
“반응이 싱겁군요, 아쉽습니다.”
실피드.
바람의 정령왕이 그 앞에 나타났다.
인간의 형태로 의태한 그는 새하얀 백발의 미남자였다.
검은 정장을 입고, 머리에는 중절모까지 쓴 것이 한껏 멋 부린 모습이었다.
그는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새로운 계약자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다시 한번 인사드리겠습니다. 저는 바람을 관조하는 자, 모든 바람의 주인인 실피드입니다.”
“내 소개는 굳이 할 필요는 없겠지.”
“흥취가 없으시군요. 삭막하십니다.”
“그럴 여유는 없어서.”
“음.”
실피드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였더라면 정령왕이 되고 처음으로 맞이하는 계약자와 조금 더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그 눈동자에 서린 기색이 너무나도 진지했기에 이번만은 자중하고자 했다.
“그래서, 무슨 이야기를 먼저 해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