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5.
“무엇이랑 싸웠냐고?”
“네.”
나탈리는 진지한 표정으로 이진한을 바라보았다.
“현자 님께서도 아시다시피 드래곤은 중간계에 수호자이지만, 안쪽 세상의 균형을 바로잡는 것만이 역할의 전부가 아닙니다.”
“그렇다는 건?”
“외부 차원으로부터의 보호.”
색다른 의미를 갖는 말이었다.
이곳 아르테니아 말고 다른 세상이 있음을 인정하는 말임과 동시에, 그들이 옛적부터 다른 존재들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역설하기도 했다.
“직전에 있었던 싸움에서 이계의 기운이 포착되었습니다. 그러니 제가 직접 이곳으로 온 것입니다. 상황을 파악하고 위쪽에 보고를 해야 하니 말이죠.”
“보고? 누구한테.”
“누구겠습니까. 세계의 창조주이신 여신님께요.”
“…여신? 신이 진짜 있다고?”
이진한의 물음에 나탈리는 오히려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모르셨나요? 분명 영웅들은 여신님과 대면으로 이야기를 나눴다고 적혀 있었는데.”
“난 과거 기억이 없다니까.”
“아, 그렇네요.”
잠시간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했다는 표정을 지은 그녀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일단 상황 파악은 모두 끝냈어요. 마인 무리가 쳐들어왔고, 이곳 렝케 가문의 당주인 이리아 렝케를 납치했다죠? 그녀는 현자 님의 동료였던 《창조》의 후손이고요.”
“그래.”
이진한은 그때를 곰곰이 회상했다.
이리아를 납치한 것은 자신을 꿰어내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고치 안에서 나온 그녀에게 깃들어 있는 건 분명 예사롭지 않은 존재로 보였으니.
“참, 이리아는?”
자신조차 막기 힘들 정도로 기이한 기운이었다.
혹시라도 난동을 부린다면 다른 이들로는 감당하기 힘들 터.
나탈리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깨어나시기 전에 모두 검사했고, 아무 문제 없다는 걸 확인했어요. 일단 저로서는 알아낼 수 있던 건 없었네요. 그 본인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고요.”
“그런가….”
이진한은 입술을 깨물었다.
머리가 복잡했다. 마치 꼬인 실타래를 굴려 놓은 것처럼 어디가 시작이고, 중간이며, 끝인지 알 수 없었다.
누군가 나와 명쾌히 풀어주었으면 좋으련만.
그와 동시에 무언가가 뇌리를 퍼뜩 스치고 지나갔다.
‘실피드.’
바람의 정령왕.
애초에 이곳에 머문 목적이 실피드를 불러내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전해 듣기 위함이었다.
템페스트는 거의 완성되었다. 마지막 조율을 끝내고 이리아의 도움을 받는다면 어렵지 않게 소환할 수 있을 터.
일단 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면 앞뒤 사정을 대략이나마 추론하는 것이 가능해질 것이었다.
“나탈리. 여신에게는 직접 보고해?”
“네. 관리자 직책을 물려 받았으니 제가 해야겠죠. 돌아가는 길로 즉시 여신님께 보고할 생각이에요.”
“그러면 우리 잠시만 미루자.”
“…네?”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나탈리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가 다른 세상에서 온 건 알지.”
“…네. 기록에 그리 쓰여 있었어요. 여신님께서 악신을 쓰러뜨리기 위해 불러들인 이들이라면서요.”
“그 이후에는?”
“다들 원래 세계로 돌아가셨거나 현자 님처럼 이곳에 남기를 선택한 분들도 계셨겠죠.”
“그렇다고 누가 확언할 수 있지?”
“확언이요?”
그럴 필요가 있느냐는 표정이었다.
“나를 봐봐. 기억을 잃은 채 수백 년의 시간 동안 내 탑에 갇혀 있었어. 당장 유추할 수 있는 건 여신이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 시간의 흐름을 강제로 멈추고 후일을 기약했다는 것이겠지.”
“너무 비약하신 것 아닙니까?”
“가능성은 열어두자는 거지.”
여신은 완전한 존재가 아니다.
그렇기에 홀로 세상을 멸망시키려던 악신을 쓰러뜨리지 못해 우리를 불렀으며, 그 뒤에는 무슨 연유에선지 되돌려보내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그리고, 그때 녀석이 했던 말도 많이 거슬리거든.”
“이리아의 몸에 깃든 존재가 말입니까.”
“그래. 녀석은 명백히 날 아는 눈치였다.”
이계의 힘.
천 년 전의 자신을 아는 존재.
그렇다면 그 정체는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악신의 추종자나 하수인 같은 것이겠지. 그러면 이계의 힘을 사용하는 것이나, 나를 비롯해 동료들과 싸운 전적이 있다는 걸 설명할 수 있으니까.”
이진한은 고개를 들어 물었다.
“우리가 천 년 전에 싸운 건 정말로 세상을 멸망시키려던 악신이 맞아?”
“….”
일순간 나탈리의 말문이 막혔다.
여신은 완전무결한 존재이며, 이 세상을 창조한 창조주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 불경한 대화가 나도는 것을 어째서 막지 않는 것일까.
사실은 여신 역시 자신들처럼 불완전하고, 그 한계가 명확한 존재라면.
“악신이라는 것도 여신이 만들어낸 프레이밍일 수도 있지. 자신의 경쟁자를 밀어내고 주신의 자리를 거머쥐기 위해서 말이야.”
“…아무리 그래도.”
너무 비약적인 이야기다.
나탈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어찌 되었든 중간계의 수호자입니다. 그 책임을 져야 할 의무가 있고, 주어진 운명에 순응해야 합니다.”
“만일 여신이 그 균형을 망치려 한다면?”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애초에 나와 영웅이라 불리는 이들의 존재 자체가 어긋난 균형이다. 여신은 그걸 방치했지.”
“…궤변입니다.”
“당장 내가 날뛰면 막을 자신 있어?”
“드래곤은 저 혼자만이 있는 게 아닙니다.”
“그래 여럿이 있겠지. 그중 적지 않은 수가 내 손에 큰 피해를 볼 테고.”
아군이라 생각했던 이가 태세를 바꾸자 그제야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듯 나탈리의 표정이 굳었다.
작금 깨어 있는 드래곤은 거의 모두 자신과 같은 갓 성룡이 된 이들.
정말로 《지혜》의 검은 현자 장본인과 싸우게 된다면 적지 않은 손해를 볼 것이 분명했다.
“표정 풀어. 너희랑 싸우겠다는 이야기가 아니야. 흐름이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니 신중히 움직이자는 거지.”
“…일단, 알겠습니다.”
나탈리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아직 뭐가 뭔지 얼떨떨하기 짝이 없다.
드래곤이라는 태생 때문에 여신이라는 존재에게 지니고 있던 절대적인 믿음이 한순간의 대화로 깨어져 나갔고, 자신의 위치가 얼마나 얄팍하기 짝이 없는지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정말로, 정말로 여신이 중간계의 균형을 어지럽히는 자라면 수호자인 자신은 어떻게 해야하는 것인가.
“일단 이리아를 좀 보러 가자.”
“…알겠습니다. 저는 발견하지 못했어도, 현자 님이라면 알아내실 수 있으니까요.”
어느 정도 몸이 회복됐기에 침상에서 일어나 외투를 걸치자, 나탈리 역시 뒤를 따랐다.
저택은 요 며칠 사이에 부서진 잔해를 말끔히 치운 채 수복 중으로, 여러 인부가 돌아다니며 활발한 분위기를 보였다.
“…베르너 님?”
“미르엘. 몸은 좀 괜찮아?”
이리아가 기거하는 당주실에 도착하니 렝케 가문의 기사들과 함께 그 입구를 지키고 있던 미르엘이 그들을 맞아주었다.
“예. 저는 전부 회복했습니다.”
“다른 이들은?”
“쉬고 있습니다. 일정 시간마다 번갈아 가면서 이곳을 지키기로 했거든요.”
미르엘의 눈동자가 살짝 가늘어졌다.
적으로부터 지킨다는 뜻만이 아닌 것으로 들렸다.
또 언제 돌변할지 모르니 감시한다는 것일 터.
이진한이 들어가도 되겠냐는 시선으로 기사를 바라보자, 그는 안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당주님. 베르너 님께서 오셨습니다.”
“들어오시라 말씀해주세요.”
어렵지 않게 허락이 떨어졌다.
기사들은 곧 양옆으로 비켜섰고, 이진한은 나탈리와 함께 당주실의 안으로 들어갔다.
“…베르너 님.”
침상에서 몸을 일으킨 이리아는 아직 창백한 안색이었다.
이진한은 손을 들어 일어나려던 그녀를 막고는 한쪽에 있던 의자 두 개를 가져와 그 앞에 내려놓았다.
“이쪽은 알지?”
“아, 네. 《나찰》의 나탈리라함은 중앙에서 유명한 이름이니까요.”
“그녀는 사실 드래곤이다. 레드 일족으로, 현재는 유희 중이지.”
“…네?”
이리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갑자기 만나자마자 꺼내는 말이 며칠 전 이곳을 찾아온 나탈리라는 용병의 정체가 드래곤이라니.
“레드 일족의 나탈리다. 영광으로 알도록 해.”
“…어어.”
가벼운 마력의 파장이 일어났다.
인간의 것과는 확연히 다른 깊이, 그것에 이리아는 엉거주춤한 표정으로 이불을 걷었다.
보통 유희 중인 드래곤을 만난다면 위대한 존재를 알현한다며 예의를 표해야 한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 낌새를 눈치챈 나탈리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손을 저었다.
“됐어, 고리타분한 방식은.”
“그래도….”
“그리고 현자 님도 있는데.”
“아. 그런데 베르너 님은 드래곤 슬레이어가 아니신가요? 어떻게 드래곤이랑 같이….”
“내가 마경에서 죽인 드래곤은 일족 가운데서도 마룡(魔龍)이라 불리던 존재였다. 골칫덩이를 정리해준 셈이니 오히려 은인이지.”
“은인까지는….”
나탈리가 모호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지만, 이진한은 양보해줄 생각이 없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래서 널 찾아온 이유에 대해서 말인데.”
“네. 그런데 이미 나탈리 님께 말씀드렸다시피 그때 일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요.”
“하나도?”
“네. 마인에게 붙들려서 고치 같은 것에 갇히게 되는 것이 마지막이었어요. 그다음에 눈을 뜨니까 베르너 님이 피를 쏟으시면서 쓰러져 계시더라고요.”
이리아는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가 자신의 몸에 깃들어 소란을 일으켰다.
하마터면 동경하는 이를 죽일 뻔했기에 지금도 그것을 생각하면 등줄기를 타고 식은 땀이 흘러내렸다.
“매정하더라. 하마터면 목이 뜯겨서 죽을 뻔했어.”
“그건, 죄송해요….”
이리아는 자신이 한 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조금 놀리려 한 것뿐인데 정말 진지하게 반응하는 그 모습에 잠시 헛기침을 내뱉은 이진한은 이내 말을 이었다.
“일단 네 몸을 좀 검사하고 싶거든. 아직 그 존재의 잔재가 남아있을지 모르니 말이야.”
“아, 네.”
이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체 모를 무언가가 자신의 몸을 빼앗는 것은 사양이었다.
“나는 아마 네 정신 쪽에 가능성을 두고 싶은데.”
“정신이요?”
“그래. 무의식 쪽. 나탈리 너도 그곳까지 탐색하기는 힘들었겠지.”
“네. 아예 헤집고 찾는 건 몰라도, 후유증이 없게 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내 쪽은 조금 피곤해질 뿐이긴 한데, 괜찮겠어?”
“아, 네. 얼마든지요.”
이리아는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자칫 잘못하다가 그를 죽일 뻔했으니, 이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와 동시에 이진한은 양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조심스럽게 움켜 쥐었다.
“…어, 어.”
눈동자와 눈동자가 마주했을 때, 이리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라 홍당무가 되었다.
정신을 탐색한다니 설마 뺨을 잡고 이렇게 지척에서 서로를 마주 보게 될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이리아의 얼굴 터질 것 같은데요. 탐색하기 전에 먼저 터져 죽겠네.”
“집중해야 하니까 조용히.”
대마도사 클래스 초월 마법 「마인드 펄」
방안을 가득 채운 술식이 전개된다. 그 마법은 드래곤인 나탈리로서도 생소한 것이기에 두 눈을 크게 뜨고 유심히 관찰하는바.
곧 이진한의 의식은 이리아의 무의식 속으로 빠져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