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4.
“일레…이나….”
“말하지 마요! 어떻게든 해볼 테니까!”
일레이나는 손을 덜덜 떨면서도 「사계」로 마법을 활성화했다.
평범한 힐링 마법과는 다른 고도의 술식인 것을 보니 그녀 역시 작금의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것이리라.
“왜, 왜!”
하지만 그 시도 모두 허사로 돌아갔다.
보랏빛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누군가 툭 치기라도 한다면 하염없이 울음을 토해낼 것 같은 사람처럼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들 뿐이었다.
자신은 그동안 무엇을 위해 수련했나.
일레이나는 허무함과 무력감에 휩싸여 피를 토해내며 헐떡거리는 그를 바라보았다.
“….”
이진한은 악마화를 위해 마기를 모으다 이내 포기하고 말았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인지 집중이 깨어져 최소치의 마기도 응집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반쯤 감긴 눈으로 상태창 위에 적힌 두 개의 스킬을 바라보았다.
「광폭화」, 「회광반조」
이 둘을 발동하면 당장 상태는 나아질지는 몰라도, 반동으로 인해 무조건 죽을 터였다.
물론 이전에도 말했듯 죽음을 회피할 방법 정도야 한두 가지 정도 구비하고 있었다.
시간의 유예 같은 특수한 제한이 아니라 이런 전투에서라면 어떻게든 부활할 수 있는 대비책이었다.
문제는 ‘월드’가 아닌 이 세계에서도 과연 그 방법이 통용될 것인지에 대해서였다.
‘다른 건 다 시험해봤지만, 이건….’
직접 죽어보지 않는 이상 시도해볼 도리가 없기에 해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하지만 HP가 거의 다다른 지금, 더는 망설일 여유가 없었다.
꽈드득.
두 개의 스킬이 연달아 발동되었다.
온몸의 근육이 조이는 감각과 함께 심장이 펌프질하며 전신으로 피를 순환시켰고, 흐려져 가던 의식이 선명해졌다.
광폭화의 영향으로 몸집이 점점 커지며 피부가 붉어지기 시작한다. 상처에서 솟구치는 출혈은 더 심해졌지만, 그 이상의 활력이 솟구쳤으니 문제는 없었다.
“일레이나.”
“…어, 어?”
일레이나는 갑작스럽게 다 죽어가던 이진한이 몸을 일으키며 멀쩡히 말해오자 입을 벌렸다.
그러곤 이내 두 눈을 크게 뜨더니 꽉 쥔 주먹으로 그의 가슴팍을 퍽퍽 때리며 결국 눈물을 터트렸다.
“진짜로, 진짜로! 이런 장난 치지 말라고 했잖아요! 정말 죽는 줄 알았잖아요!”
“맞아. 난 아마 곧 죽을 거다.”
“…네?”
그 모습과 상반되는 이야기에 일레이나의 눈이 다시금 떨렸다.
농담이라도 하는가 싶었지만, 그의 눈에 깃든 기색은 진지하다. 그녀의 입가가 다시 떨리기 시작할 찰나, 이진한은 선명한 투지를 불태우며 검을 쥐었다.
‘그 이전에 저 목을 벤다.’
북쪽 숲의 기억이 머리를 스쳤다.
패배의 무력감에 젖었던 과거, 그때는 각오를 다지지 못했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 회생하는 것으로 상황을 바꿀 방도를 찾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못했고, 자신을 농락한 메피스토를 쓰러뜨리기 위해 사력을 다해 싸우지도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달랐다.
죽이고, 죽는다. 이전과 같이 저들의 마수가 자신의 일행들에게 뻗어지는 것은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다시 돌아올 테니까 걱정하지마. 이전에 말한 거 기억하지?”
자신은 죽음에서 벗어날 방도가 있다.
그 말을 떠올린 일레이나가 고개를 들어 눈물에 젖은 보랏빛 눈동자로 이진한을 바라보았을 때, 그의 신형은 이미 그녀를 넘어 「이그누트」와 백중지세의 싸움을 벌이고 있던 이리아에게로 쇄도했다.
쿵─!
단순한 발돋움에도 지반이 버티지 못하며 무너져 내렸다.
한 줄기 섬광이 되어 쇄도하던 도중, 이진한은 대현자 클래스의 스킬인 「무신」을 발동했다.
‘지금 상태로 잡다한 기술을 쓰는 것은 제 살 깎아 먹는 일이다.’
초월 마법은 상당한 집중과 소모가 필요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모를까, 광폭화와 회광반조로 이성이 흐려진 가운데는 그리 적절치 않은 것이었다.
대현자 클래스 초월 스킬 「무신」
「대현자」 → 「그랜드 소드 마스터」
쉬아악!
눈부신 오러 블레이드가 검끝으로 기다랗게 터져 나왔다.
세상을 전부 베어버릴 듯한 강렬한 기세다. 이그누트와 싸움을 벌이고 있던 이리아 역시 그것을 눈치채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분명 목을 베었거늘.”
“내가 목숨 하나는 끈질기거든.”
콰아아앙!
냅다 후려갈긴 검격이 그녀의 좌측이 작렬했다.
이리아는 검을 들어 그것을 막아내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전부 흘려내긴 힘든지 붕 뜬 바닥에 깊은 족적을 남기며 밀려났다.
그 뒤로는 미친 듯한 공방의 연속이었다.
이진한은 이 찰나의 불꽃을 한순간에 불태워 버리겠다는 듯 한호흡의 틈도 주지 않은 채 검을 휘둘렀다.
부딪친 오러 블레이드의 파편이 부서지며 그 주위를 무수한 반짝임으로 물들인다. 몸을 스칠 때마다 작은 자상이 하나씩 늘어났지만, 둘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오히려 그 안으로 몸을 들이밀며 검을 휘둘렀다.
“…큭.”
그러던 도중 먼저 한계가 찾아온 것은 이리아 쪽이었다.
이제껏 단 한 번도 실수 없이 공방을 따라오던 그녀의 몸이 살짝 비틀거리며 틈을 보였다.
물론 이진한은 모처럼 찾아 들어온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을 따름이었다.
그랜드 소드 마스터 초월 스킬
「백야극광(白夜極光)」
곧게 뻗은 검 위로 이전과 사뭇 다른 기운이 휘몰아쳤다.
이전 검호에게서 베껴낸 검성류 오의는 세밀한 제어를 요하는 기술.
그러니 지금 상황과는 그리 맞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가 선택한 것은 가장 단순하면서도 발군의 위력을 내는 「백야극광」이었다.
츠즈즈즈─!
새하얀 빛이 마치 눈보라처럼 거칠게 주변을 뒤덮으며 쇄도해왔다.
조금이라도 휘말리게 되면 걷잡을 수 없이 잡아먹히고 말 터. 이리아의 몸에 깃든 존재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손 위로 파멸의 기운을 그러모았다.
하지만 이진한은 그녀의 손이 휘둘러지기도 전에 그 앞으로 닥쳐가 궤적을 틀어막았다.
“몸 자체는 강화할 수 없나 보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그 가녀린 신체를 바라보았다.
얼굴은 처음과 같이 태연하기 그지없지만, 관절과 근육들이 비명을 지르는 게 들려왔다.
육안으로 보아도 덜덜 떨리는 게 확연히 들어왔고, 조금 전에 보인 틈 역시 그러한 점에서 기인한 것이리라.
카각!
이진한은 그녀의 손을 받친 검을 힘껏 들어 올렸다.
그 요사스러운 기운에 상성이 좋지 않은 것일 뿐이지, 어차피 몸은 이리아의 것이었다.
정령 기사단의 부단장으로 왕국에서도 뛰어난 실력자라곤 하나 어차피 초월지경에도 이르지 못한 하수.
자신 역시 그리 좋은 상태는 아니지만, 저쪽이 먼저 한계가 찾아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흠.”
이리아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녀는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 듯싶더니 이내 고개를 들어 담담한 눈동자로 이진한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이번으로 인해 ‘길’은 트였다. 언제든 다시 나올 수 있으니 오늘이 끝은 아닐 터.”
“…또 나온다고? 징그러운 소리를.”
그 전에 목을 베어주마.
부푼 근육 위로 시퍼런 힘줄이 툭툭 튀어 올랐다.
광폭화와 회광반조에 여력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러니 그 기운을 모두 그러모아 일격을 날리려 할 찰나, 이리아의 몸을 뒤덮고 있던 파멸의 기운이 사그라들었다.
“…베르너 님?”
물망초 빛깔의 머리카락이 흩날리며 동그란 눈매를 지닌 여성이 고개를 들었다.
그 모습을 본 이진한은 이를 악물었다. 자신을 현혹하는 것인가, 아니면 정말로 이리아가 되돌아온 것인가.
‘월드’였었더라면 망설임 없이 목을 쳐냈겠지만, 그녀로부터 떠오르는 그리운 얼굴이 갈등을 자아냈다.
“시팔.”
마지막의 끝에서 이진한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검의 궤적을 꺾었다.
그 무리한 반동 때문에 근육이 터져 나가며 피를 뿜어냈지만, 이리아는 목을 베이지 않을 수 있었다.
“꺄악?!”
다만, 애꿎은 바닥을 때린 탓에 큰 폭발이 일어난다. 그 기세에 휘말려 날아가던 이리아는 바람의 정령을 일으켜 자신의 몸을 보호했다.
“….”
잠시간 자리에 우뚝 선 채 그녀를 노려보던 이진한은 그 몸에 깃든 사이한 존재가 사라진 것을 확신하고는 이내 무너져 내렸다.
***
다시 깨어난 것은 며칠이 지났는지 모를 어느 날의 오후였다.
반쯤 쳐진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따사로운 햇살이 뺨을 간지럽힌다. 이진한은 전신에서 느껴지는 탈력감에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차라리 한 번 죽고 새로 부활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솔직히 반쯤 죽음이란 것에 발을 담근 것 같긴 한데, 그 가운데 용케도 살려낸 것인지 피폐한 상태로 숨을 유지하고 있었다.
슬쩍 주위를 둘러보니 저 한쪽으로 피 묻은 붕대와 빈 포션의 병이 산더미를 이루고 있었다.
대수술이 있었던 것이리라. 온몸에 둘둘 감겨 있던 붕대 역시도 같은 내용을 말해주고 있었다.
“끄응.”
인벤토리에서 엘릭서 한 병을 꺼내 입에 문 이진한은 슬며시 몸을 일으켰다.
시간의 유예를 보니 이미 며칠은 지난 듯하다. 당연히 「광폭화」와 「회광반조」의 후유증은 가라앉았지만, 그 이후로 제대로 된 치유를 하지 못해 누적이 꽤 쌓인 듯했다.
“「불굴」은 문제없이 작동하고 있고.”
의식을 되찾은 뒤부터 용사 클래스의 스킬인 「불굴」이 팽팽하게 활성화하며 전신을 치유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실제로 직전까지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들 정도의 상태가 이제 조금은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호전되었다.
누군가 부를까 싶었지만, 그것마저도 지친 이진한은 다시 침대에 몸을 뉘었다.
‘이리아의 몸에 깃든 그 존재는 무엇이었을까.’
마인들이 그리 목숨을 걸고 지켜내려 했던 것을 보면 적어도 그들보다 더 중요한 상위의 존재일 터.
어디 고위 마족이나 악마일 가능성이 가장 컸지만, 녀석이 사용하던 힘은 절대 마기(魔氣)나 그 아종조차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신성력과 좀 닮은 것 같은데.”
제대로 연구해보지 않는 이상 섣불리 단언할 수도 없는 일. 그렇기에 머리를 꽁꽁 싸매고 있자, 밖으로부터 인기척이 느껴졌다.
자신의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일행이 왔나 싶어 고개를 들자 보인 것은, 어쩌면 의외의 얼굴이었다.
“…나탈리?”
“격조하셨나요? 아니, 고생이 많으셨군요.”
「나찰」의 나탈리.
아니, 드래곤으로서 유희를 보내고 있는 성룡 나탈리가 문가에 서서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꽤 거친 상대였나 보네요. 현자님을 이렇게까지 몰아넣다니.”
“그러게.”
이진한은 순순히 인정했다.
이리아의 몸에 깃든 존재가 사용하던 힘은 이제껏 싸워온 어느 상대의 것보다 불길했다.
심지어 미들턴에서 마주한 마왕 마르바스의 것보다 더더욱.
“흠.”
나탈리는 한쪽 구석에 있던 의자를 끌고 와 침상 앞에 앉았다.
그러곤 잠시 고민하더니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는 것으로 방을 둘러싸는 결계를 만들어냈다.
공간의 차단. 출입과 소리가 새어 나가는 것을 완벽하게 막아버리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런데 네가 무슨 일이지? 혹시 아이슬란의 전언이라도 가지고 왔나?”
굳이 결계까지 치는 것으로 보아 이곳에 온 것은 대륙에 명성을 울리는 용병인 「나찰」의 나탈리가 아니라, 중간계의 수호자인 드래곤으로서 온 것일 터.
그 물음에 나탈리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아이슬란 님은 동면에 들어가셨어요.”
“…뭐?”
그녀가 내뱉은 말은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것이었다.
직전까지 멀쩡히 움직이던 양반이 어째서 이렇게 갑작스럽게 동면에 들어가는가.
“이전의 동면으로부터 몇백 년 되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그게 정상이야?”
“아니요. 저도 지금 그래서 심히 당황스러워요. 더군다나 아이슬란 님은 지금 수호자의 구심점으로 중간계를 살피시던 위치셨는데, 이렇게 갑자기 동면하실 줄은 아무도 몰랐어요. 또, 그 자리의 후계로는 저를 지명하신 탓에 조금 곤란하게 됐거든요.”
“그래서 도움을 구하러 온 건가.”
“그것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에요.”
나탈리는 붉은 눈동자를 들어 온몸을 붕대로 꽁꽁 싸맨 이진한을 바라보며 물었다.
“현자님은 도대체 무엇과 싸우신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