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3.
“…하율?”
지금껏 봐왔던 이리아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그렇기에 아주 조금의 희망과 적지 않은 기대를 담아 그 이름을 입에 담는 순간, 이진한은 그제야 그녀의 한쪽 눈이 망가져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런.”
때는 깊은 밤에서 새벽으로 넘어가는 시간대.
어디선가 흘러 들어온 한 줄기 바람에 물망초 빛깔의 머리카락이 살랑거렸다.
몇 달 만에 보는 것만 같은 얼굴에 그가 무심코 손을 들었을 찰나, 하나 남은 눈동자에서 일렁거리고 있던 기묘한 기운을 발견할 수 있었다.
“….”
등줄기를 타고 싸한 기운이 올라왔다.
낯선 거부감이 혀끝에 감돌았고,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과 더불어 눈앞의 그녀에게서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느낌을 받았다.
이진한은 본능적으로 ‘저것’이 이리아나 진하율과는 다른 무언가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탓!
생각은 짧았고, 행동은 빨랐다.
순식간에 땅을 박차고 오른 그는 얼마간 거리를 두며 물러섰다.
그러면서 몸을 살짝 숙이면서 상대의 반응을 기다렸지만, 그녀는 여전히 제자리에 멈춰선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퓌이이!
그때, 마인들과의 싸움 때문에 잠시 떨어져 있던 까망베르가 하늘에서부터 날아와 이진한 앞에 내려섰다.
녀석은 네발로 땅에 우뚝 선 채 작은 날개와 꼬리를 곤두세운 모습으로 격렬하게 위협적인 소리를 토해냈다.
“까망베르?”
왜 그러냐는 물음에 연신 쇳소리를 토해내던 까망베르가 재빠르게 이진한에게로 달려가 다리를 타고 오르더니 자신의 전용석인 로브의 후드 안으로 쏙 하고 숨어들어 머리까지 감춰버렸다.
오들오들 떨리는 몸의 움직임이 목을 통해 느껴졌다.
조금 전의 그 모습은 허세인 듯 평소와 달리 머리조차 내밀지 않은 채 쥐 죽은 것처럼 몸을 낮추고 있을 뿐이었다.
‘예사 존재는 아니라는 소린가.’
이진한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까망베르는 아직 어리지만, 창공의 군주라 불리는 태초의 와이번의 새끼다.
그 육감은 절대 무시하지 못할 종류의 것.
자신이 받는 느낌 역시 비슷했기에 경계를 최대한으로 올렸다.
파아앗!
다시금 용사 클래스의 힘이 활성화되었다.
농밀한 신성력이 그 전신을 뒤덮었고, 검 위로 찬란한 빛이 흩뿌려지며 짙어진 어둠을 몰아내었다.
그러자 이리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처음으로 선명한 반응을 보였다.
“가증스러운 기운이구나.”
“너는 누구지?”
마치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봤다는 듯 경멸 어린 눈동자였다.
그것으로부터 그녀의 몸에 깃든 존재가 고위 악마나 마족 따위임을 짐작한 이진한은 좀 더 강한 힘으로 검을 다잡았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는 짤막한 심호흡 이후, 왼발을 내디디며 무게중심을 몸 앞으로 실었다.
쉬아아악!
백색 궤적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일말의 여유조차 주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이리아의 지척까지 쇄도한 이진한은 있는 힘을 담아 검을 내질렀다.
물론 그녀가 다칠 것을 우려해 검날이 닿지 않도록 간극을 조절해 신성의 힘으로 그 안에 깃든 존재를 쫓아내고자 했다.
파아앗!
신성에 베인 이리아의 몸이 오히려 회복된다. 곳곳에 있던 자잘한 상처가 나아가고, 뭉개진 한쪽 눈 역시 새하얀 성화에 감싸이며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딱히 그 이외의 반응은 없었다.
“…?”
오히려 당황한 것은 이진한 쪽이었다.
메피스토와 맥스웰 정도 되는 고위 악마들이라 할지라도 이 신성을 이겨내지 못했다.
그렇다면 작금의 상대 역시 무슨 반응을 보여야 정상이건만, 어째서인지 무덤덤한 표정으로 자신의 몸을 감싼 신성을 바라볼 뿐이었다.
“시답지 않다.”
가볍게 손을 휘둘러 그것들을 털어낸 이리아는 가만히 고개를 들어 이진한을 바라보았다.
그사이 회복된 것인지 온전한 한 쌍의 눈동자로 묘한 기운이 일렁거렸을 때, 그 작은 입술이 열렸다.
“그 얼굴은 기억에 있군. 우리 앞에 선 일곱 중 한 명이었지.”
“…뭐?”
“허나 이상하다. 그 후로부터 꽤 시간이 지났을 터인데. 꼴을 보아하니 반신에 이르지도 못했는데 어찌 인간의 몸으로 그 여파를 견뎌내었지?”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시선이었다.
이진한은 그것보다 그녀가 내뱉는 의미 모를 말에 머리털이 곤두서는 듯했다.
마치 자신을 알고 있는 듯한 눈치가 아닌가.
차라리 진하율이 살아 돌아왔다면 그것만큼 좋은 일이 없었지만, 어조에 깃든 뉘앙스를 보아하니 이쪽에 호의적인 태도는 아니었다.
퉁.
그는 다시금 땅을 박찼다.
동시에 그녀의 손이 들어 올려진 것을 보곤 힘껏 방향을 바꿔 하늘로 뛰어오르고는 두 팔을 양쪽으로 뻗었다.
“「주박의 사슬」”
촤르륵!
사방에서부터 솟구친 보랏빛 사슬이 이리아의 전신을 구속했다.
이전과 달리 몇 배나 더 강해진 그것은 설사 예전에 유적지에서 싸웠던 고대 마수인 베히모스가 살아 돌아오더라도 쉽사리 끊기 힘들 정도의 강도를 자랑했다.
파각!
하지만 그런 자신감이 무색하게도 이리아는 너무나도 손쉽게 주박의 사슬을 끊어내고 말았다.
조각난 사슬을 쥐고 있는 그 눈동자가 너무나도 무덤덤한 탓에 마치 이것밖에 안 되는 것이냐 말하는 듯했다.
[??? ?? ????]
[-warning-]
돌연 깨진 문자열과 함께 처음 보는 유형의 경고 메시지가 시야 한쪽으로 떠올랐다.
근원의 마탑에서 깨어났을 때처럼 상태창이 고장 난 건가 싶어 일순간 숨이 턱하고 막혀왔지만, 다른 기능은 멀쩡한 것을 보니 이리아의 스테이터스를 파악하는 데만 오류가 난 것으로 보였다.
[해석 불가]
[해석 불가]
이름과 레벨을 표시하는 규격조차 뜨지 않는다. 그렇다면 대체 눈앞의 존재는 무엇이란 말인가.
츠즈즈즈─.
들어 올려진 이리아의 손으로 검붉은 기운이 피어올랐다.
마기와는 또 다른 것으로, 이루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불길한 느낌을 주는 힘이었다.
동시에 파지직 거리며 스파크를 내뿜는 것은 마치 이 세계에 허락받지 못한 것을 사용하는 것처럼 거부당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
땅을 박차고 하늘 높이 떠 오른 이진한은 본능적으로 전투태세를 취했다.
주위로 십수 개의 마법을 구축했고, 장궁을 꺼내 시위에 여러 대의 화살을 걸어 팽팽해질 정도로 잡아당겼다.
마음만 먹는다면 1초 남짓한 시간에 융단 폭격을 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막아내지 못한다면?
“씁.”
이런 답답한 전개는 그리 좋아하는 것이 아니었다.
생각해보니 먼저 적의를 드러낸 것은 자신. 그러니 기운을 거두고 다시 대화를 시도한다면 받아주지 않을….
“어째서 망설이지?”
“…!”
어느 순간에 그 먼 거리를 뛰어올라 지척까지 다다른 것인지 소리도 없이 코앞에 도달해 있던 이리아가 사뭇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퉁.
이진한은 본능적인 위기감에 손을 놓았다.
촉에 농밀한 신성력이 농축되어 있던 화살이 쏘아지고, 완성된 마법이 발동하며 눈부신 섬광을 내뿜었다.
‘이런.’
이미 상황은 기호지세였다.
입술을 깨문 이진한은 곧바로 후속 조치를 하기 위해 활을 버렸지만, 이내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쉬아아악!
이리아가 자신의 손에 일어난 파멸적인 기운을 마치 검처럼 다루며 닥쳐온 모든 것을 베어냈다.
일순간 이진한조차 그 움직임을 놓쳤을 정도로 쾌속한 속도. 그것도 모자라 허공을 박차 그에게로 쇄도해왔다.
웅웅웅─!
인벤토리에서 뽑혀 나온 검이 눈부신 신성으로 뒤덮인다. 이진한은 그 가운데 자신의 전력을 다했다고 할 수 있었다.
가슴 속을 파고드는 위기감에 여력을 아끼지 않았고, 용사 클래스의 힘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며 진심으로 그녀를 베고자 했다.
파각.
하지만 그 위에 서린 파멸의 기운은 단 일 합 만에 농밀한 신성을 잡아먹은 채 검마저 파괴해버렸다.
부러진 조각들이 비산 했을 때, 멍한 시선으로 그것들을 바라보고 있던 이진한은 기겁하며 몸을 빼냈다.
그러자 서걱, 하는 소리와 함께 섬뜩한 감촉이 목을 베고 지나갔고, 새빨간 피 분수가 어둠 가운데 뿜어져 나왔다.
“컥!”
목 끝을 스쳤을 뿐인데 절반이 넘게 베어 갈라졌다.
그는 경악한 얼굴로 덜렁거리는 목을 부여잡은 채 지상으로 떨어져 내렸다.
단순히 피가 뿜어져 나오는 것뿐만 아니라 상태창에 표시된 HP가 한 번에 쭉 빠져나갔다.
설사 조금 전에 싸웠던 히드라의 독을 전신에 뒤집어써도 이 정도의 타격을 입진 않을 터.
자신에게 걸린 온갖 가호와 방어력을 무시하고 몸에 직접적으로 타격이 내리꽂히는 것을 보아, 위력 이전에 상성이 최악이라는 이야기였다.
털썩.
겨우 낙법을 취해 꼴사납게 파묻히는 건 막았지만, 그 여파로 인해 다시금 피가 터져 나왔다.
단시간에 피를 너무 많이 흘린 것인지 시야가 흐려지며 손끝에서부터 힘이 빠져나갔다.
그와 동시에 저 위쪽에 있던 이리아의 신형이 어느덧 자신의 지척으로 다가온 것을 볼 수 있었다.
여전히 무심한 얼굴인 그녀는 끝장을 볼 심산인 듯 손 위로 엮어낸 기운을 검처럼 쥐어 위쪽을 향해 들어 올렸다.
‘이런 씹…!’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하는 것은 한 번으로 족했다.
악마화, 광폭화, 회광반조.
이진한이 손을 뻗어 비장의 카드를 발동시키려던 찰나, 머리 위쪽으로부터 몰려드는 막대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쿠구구궁─!
시뻘건 불길이 쏟아져 내렸다.
무작위로 퍼부어지는 것이 아닌, 명확한 표적을 정한 채 떨어지는 폭격.
이리아는 아무런 미련 없이 자리에서 물러나 자신을 집어삼키려 하는 불길을 피해냈다.
“…일…레이…나.”
“이게 무슨 일이에요.”
지상으로 내려선 일레이나는 보랏빛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귀기 어린 표정으로 이리아를 노려보고 있었다.
「사계」
《영원》의 근간인 삼라만상을 기반으로 만든 그 기조가 이전보다 더 뚜렷한 색채를 보인다. 마음 같아선 칭찬이라도 해주고 싶었지만, 실시간으로 울컥울컥 빠져나가는 피 때문에 제대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아쉬울 따름이었다.
타다다닷!
그때 이리아가 쏟아지는 불길을 피하며 이쪽으로 접근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를 갈며 이진한의 상태를 살피려던 일레이나는 어림도 없다는 표정으로 「사계」를 움직여 새로운 마법을 발동했다.
파아앗!
이 주위를 뒤덮은 불길이 모여 새로운 형상을 이룬다. 마치 바실리스크처럼 커다란 모습으로, 기다란 몸을 꿈틀거리며 새빨간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을 태워 나갔다.
“「이그누트(Ignute)」”
일레이나의 오리지널 마법인 듯 이전에 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이리아는 파멸의 기운으로 「이그누트」의 목을 베어냈지만, 그것은 형태가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분열하며 그녀를 압박해갔을 뿐이었다.
“…몸의 내구도는 이전과 다름이 없나 보군요.”
냉철한 시선으로 상대의 분석을 마친 일레이나는 이내 울먹이며 여전히 땅에 엎어져 있던 이진한에게 손을 뻗었다.
“당신, 괜찮아요? 제발 괜찮다고 해줘요.”
쨍그랑.
이진한은 막 인벤토리에서 엘릭서를 꺼내 들이마신 뒤였다.
빈 병을 바닥에 내던져 시원하게 깨뜨렸지만, 어째서인지 베인 상처는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불굴」은 어째서 발동하지 않는 거지?’
이때까지 포션이나 엘릭서가 통하지 않은 상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용사 클래스의 스킬인 「불굴」은 자신의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바퀴벌레 같은 생명력으로 상처를 치유할 터.
그렇다면 어째서 지금은 회복되지 않는 것인가.
의문이 들었지만, 일단 응급처치가 우선이었기에 손 위에 새하얀 신성력을 피워 올려 자신의 목으로 가져갔다.
파직─!
“꺅?!”
그와 동시에 검붉은 스파크가 튀며 거부 반응을 일으켰다.
이진한은 그 시점에서 겨우 깨달을 수 있었다.
「불굴」이 발동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불굴」은 이미 끊임없이 자신의 몸을 치유하고 있는 상태였지만, 이 정체 모를 힘에 밀려 계속해서 상태가 악화하고 있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