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2.
푸쉬식.
메케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그 직후 한 발자국 먼저 땅에 떨어진 잘린 왼팔이 시커멓게 물들며 순식간에 썩어버렸다.
「불굴」의 특성이 빠른 속도로 비어버린 자리를 채운다. 이질적인 그 감촉에 주먹을 주억거린 이진한은 가늘어진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내 가호를 뚫을 정도의 독이라.”
이전 자신의 유적지에서 싸운 고대 마수 베히모스가 떠올랐다.
그 꼬리에 달린 죽음의 뱀 역시 강력한 부식액을 내뱉었다. 농도는 지금과 비슷한 수준.
문제는 히드라의 머리가 아직 여덟 개나 더 남았다는 것이었다.
“전부 독을 내뿜어도 끔찍한 데, 그럴 리가 없지.”
저러한 유형은 보통 머리마다 각기 다른 능력을 지니기 마련이었다.
마음 같아선 초월 마법으로 한 번에 쓸어버리고 싶지만, 이리아가 있는 고치의 앞을 떡 하니 지키고 있었기에 휩쓸릴 가능성이 컸다.
‘거기에 액티브 카운터까지.’
성가시기 그지없는 조합이다.
그냥 싸워도 복잡한데 여러 부가적인 능력을 덕지덕지 달고 있다니.
심지어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도 더러 있다는 점이 골치 아팠다.
웅웅웅─.
성검이 다시 빛을 발했다.
농밀한 신성의 응집으로 한층 더 무거워진 검을 다잡고 천천히 발을 떼자, 아홉 쌍의 붉은 시선이 자신의 응시해오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그렇게 힘들지는 않아.”
메피스토나 맥스웰 같은 고위 마족이 나온 것도 아니고, 항거할 수 없는 존재가 툭 하고 튀어나온 것도 아니었다.
주변에 쓰러졌던 마인들 역시 어느새 몸을 회복했는지 비척거리며 일어나 저마다 악마화를 하기 시작했지만, 이진한의 눈빛에선 날 서린 살기가 더욱 강하게 피어올랐다.
쉬아악!
부활한 마인들이 사방에서 닥쳐왔다.
저마다 계약을 맺은 마족들의 형태를 흉내 낸 상태.
이전보다 몇 배는 더 강렬한 마기를 뿜어냈지만, 성검에서 피어난 찬란한 빛이 사방을 뒤덮었다.
용사 클래스 초월 스킬 「신성의 증명」
그를 중심으로 일대에 어둠이 쫓겨나며 신성이 가득 차기 시작했다.
상반되는 그 성질에 악마화한 마인들조차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이진한은 검을 역수로 쥐어 들며 검 끝을 바닥에 콱 내리찍었다.
「세릴다의 성가대」
그의 등 뒤로 천사의 형상이 떠올랐다.
두 손을 꽉 붙잡고, 눈을 감은 채 감미로운 찬양을 부른다. 그것은 이내 사악을 멸하는 신성을 응집해 날카롭게 허공을 꿰뚫으며 쏘아 보냈다.
피이잉─!
강렬하디 강렬한 백색 선이 농밀한 궤적을 남겼다.
스친 마인은 누구랄 것 없이 사지가 찢겨나갔고, 더러는 반항조차 하지 못한 채 치명상을 입어 소멸했다.
쿵.
힘껏 땅을 박찬 이진한은 매서운 기세로 그 가운데를 갈랐다.
더 시간을 끌었다간 이리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몰랐다. 그렇기에 속전속결로 해결하고자 자신 앞을 가로막는 마인들을 넘어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인디아를 향해 곧바로 쇄도했다.
-….
아홉 쌍의 붉은 눈동자가 번뜩였다.
그는 이카루스의 날개를 활성화시킴과 동시에 신성으로 그것을 휘감았다.
마치 대천사가 강림한 듯한 장엄한 광경.
추가로 돋아난 두 쌍의 날개도 합쳐져 뒤를 받쳤다.
“흡!”
정점에 다다른 위치에서 성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예상했던 대로 아홉 개가 각기 다른 능력을 발휘하며 위협해오기 시작했다.
콰아아앙!
제일 먼저 생겨난 두꺼운 실드가 발목을 붙들었다.
이깟 것쯤 조금의 시간만 주어진다면 어렵지 않게 부수고 인디아의 목을 쳐낼 수 있었겠지만, 아쉽게도 그 밑에서 혀를 날름거리고 있던 히드라의 머리는 아직 여덟 개나 더 남아 있었다.
파아앗!
시뻘건 불꽃이 토해져 나왔다.
그 위력은 가늠할 수 없으나, 자신의 가호와 온갖 강화로 점칠 되어 있는 로브 자락까지 태운 부식 독과 비슷한 것일 터.
그렇기에 이진한은 실드 위에 부딪혀 그것을 타고 내리듯 몸을 굴리며 솟구치는 불꽃을 피해냈다.
솨아아아─!
뒤이어 쏟아진 것은 이빨로 보이는 작은 조각의 비였다.
대현자의 눈이 파악한 바로는 그 하나하나에 심상치 않은 독이 내포되어 있었다. 가볍게 검을 휘둘러 그것들을 막아낸 이진한은 곧 머리 위로 쏟아지는 부식 독에 인상을 구겼다.
“귀찮네.”
슉.
단거리 공간 이동 마법이 펼쳐졌다.
좌표는 바로 직전 녀석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을 때 마킹해놓은 그 장소.
인디아는 일순간 그의 신형을 놓쳐 곧바로 사방을 훑었지만, 그 찰나의 틈이 치명적인 결과를 불러왔다.
“「무신」 발동.”
대현자 클래스 초월 스킬 「무신」
클래스 변환
「대현자」 → 「신궁」
꽈아악.
팽팽히 당겨진 시위에 한 대의 화살이 걸렸다.
촉으로는 이미 농밀한 신성의 속성이 인챈트된 뒤.
용사 클래스와 비교하자면 차이가 크겠으나, 일점을 꿰뚫는 위력은 비교할 수 없으리라.
신궁 클래스 초월 스킬 「메테오 스트라이크」
툭.
시위를 놓자 가벼운 반동과 함께 무지막지한 파공성이 발밑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지닌 마나의 절반을 때려 박은 초월 스킬.
그 위력은 설사 본인이라도 쉬이 버틸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것이었다.
─쿠구구궁!
어찌나 파괴적인지 터져 나간 소음이 한 박자 늦게 울려 퍼질 정도로 둔중한 충격이 사방을 휩쓸었다.
대마도사 클래스의 초월 마법과 다른 점이라면, 신궁 클래스의 스킬은 하나의 표적을 상대하는 대 특화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웅웅.
곧바로 이리아가 갇혀 있는 고치 앞으로 내려선 그는 뒤이어 몰려온 후폭풍을 가볍게 막아내며 고개를 들었다.
“질기네. 그걸 맞고도 살아 있다고?”
화살촉에 농축된 신성력 이전에 신궁 클래스의 초월 스킬이다. 어지간한 보스 몬스터도 치명상을 면치 못할 터인데, 인디아의 아홉 머리 중 아직 두 개가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컥.
물론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었다.
뜯겨 나간 일곱 머리의 타격이 큰 것인지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다. 그러더니 이내 다시 인간의 형태로 돌아와 바닥에 엎드린 채 시뻘건 피를 토해냈다.
“흠.”
「무신」 스킬을 해제하고 그 앞에 다가간 이진한은 다시 검을 쥐었다. 농밀한 신성의 기운이 검날을 타고 줄기줄기 흘러내리기 시작했을 때, 인디아는 힘겹게 고개를 들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생긴 건 거창한데, 그리 강하지는 않더군.”
“으흐흐, 자만하지 말아라. 내 역할은 그저 여기까지였을 뿐이었다.”
인디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과 함께 왔던 중위 마인들은 전부 나가 떨어져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알수 없는 상태였다.
상위 서열의 사도들까지 함께 왔다면 결과가 달라졌을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주인님의 생각이 따로 있으리라 짐작만 할 뿐이었다.
“그녀를 구하러 왔다고? 이미 늦었다. 저 고치에 들어간 순간 네가 알고 있던 여자는 없….”
푹.
이진한은 검을 역수로 쥔 채 녀석의 등에 내리꽂았다.
“커어억…!”
“죽을 만큼 아플 거다. 그래도 죽진 않을 거야. 혹여나 이리아가 잘못된다면 곧바로 죽지 못한 걸 영원토록 후회하게 해주마.”
날 서린 목소리로 경고한 그는 몸을 돌려 재단 위를 향했다.
고치는 여전히 심장 박동과 같이 간헐적으로 꿈틀거리고 있던 상태.
이진한은 두 눈을 부릅뜨고 대현자의 눈을 극한으로 활성화했다.
[??? ? ????]
“…쯧.”
‘월드’에도 없던 것인지 해석되질 않았다.
그렇기에 그는 소매를 걷고 조심스럽게 그 위에 손을 가져갔다.
푸욱.
마치 크림을 만지는 것과 같은 두루뭉술한 감촉이다. 천천히 발을 내디디며 그 안으로 파고들자, 고치는 아무런 저항 없이 길을 내주었다.
“후읍.”
짧게 숨을 참는 것으로 고치 안에 얼굴을 들이 밀은 이진한은 이내 그 안쪽에 매달려 있던 이리아를 발견할 수 있었다.
“조금만 기다려.”
예상과는 달리 숨 쉬는 것에 제약이 없었기에 짤막하게 말을 내뱉고는 혹시 모를 위협에 대비하며 천천히 손을 뻗었다.
“….”
이리아는 의식을 잃은 채 고치에서 나온 수많은 실에 온몸이 속박된 상태였다.
이진한은 손날을 세운 것으로 실들을 모조리 잘라냈고, 조심스럽게 그녀를 품 안에 안아 들었다.
파앗!
그와 동시에 주변을 감싸고 있던 새하얀 고치의 벽이 전부 터져 나갔다. 분명 형태를 이루고 있던 그것들은 액체가 되어 사방에 흩뿌려졌고, 머지않아 바닥에 흡수되어 그 옅은 잔해만 남겼을 뿐이었다.
“…대체.”
이진한은 이리아의 신형을 든 채 인상을 찌푸렸다.
마기도, 신성도, 혹은 그 이외의 무슨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대체 이 녀석들이 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인가.
“크흐흐….”
그들이 밖으로 나오자, 여전히 검에 꽂혀 발버둥 치고 있던 인디아가 신음 섞인 웃음을 토해내었다.
“이걸로 내 목적은 완수….”
퍽.
돌연 그 얼굴이 터져 나갔다.
흩뿌려진 뇌수와 시뻘건 피가 주위를 뒤덮는다. 이진한은 경직된 얼굴로 재빨리 사방을 둘러보며 감각을 곤두세웠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 정도 일을 벌일 정도니 고위 마족? 아니면 마왕?’
폐부가 쥐어짜일 정도로 긴장감이 들었다.
피부는 소름이 돋았고, 머리카락을 비롯해 온몸의 털이 곤두설 정도의 숨 막힘이 온몸을 엄습했다.
미들턴에서 강림한 마왕을 쓰러뜨린 것은 천운에 지나지 않았다. 그 막대한 존재감은 지금에 이르러서도 감히 대적할 수 있을까에 대해 의문이 들 정도였으니.
“…?”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고요한 적막은 깨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극한까지 활성화된 감각이 그 주위에 살아 있는 건 자신들 빼곤 전무함을 알려왔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수색을 끝낸 이진한은 이내 옅은 한숨을 내쉬며 온몸의 긴장을 풀었다.
“대체 무슨 일인지….”
“….”
동시에 그는 바로 지척에서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다.
어느새 깨어난 이리아가 자신의 품에 안긴 채 조용히 이쪽을 올려다보고 있던 것이었다.
“아, 깨어났어? 무사해 보이니 다행이네.”
이진한은 쓴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그녀의 신형을 바닥에 내려주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흐트러진 매무새.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것들을 정돈해주고 혹시라도 어딘가 다친 곳이 없는지 세밀하게 그 전신을 살폈다.
“아, 오해하지 마. 혹시나 저놈들이 펼친 마법의 여파가 어디 영향을 끼친 게 아닌가 조사하는 거니까.”
마력까지 방사해 한 톨의 마기조차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마친 이진한은 겨우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
“아직 정신이 멍할수도 있어. 그래도 조금 지나면 괜찮아질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그녀를 바라보며 든든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럼 대체 누가 저 녀석의 머리를 터트린 것이지?’
외부에서 원인을 찾을 수 없다면 내부에서 일어난 작용인가.
쓸데없는 말을 하지 못하도록 녀석의 주인이 조치한 것일 수도 있었다.
원인을 알 수 없었기에 짤막하게 한숨을 내쉬었을 찰나, 돌연 이리아의 손이 그의 얼굴을 잡아 왔다.
“…이리아?”
갑자기 무슨 일일까.
이진한이 손을 들어 자신의 뺨을 잡은 그녀의 손을 덮을 찰나, 그 입이 천천히 열렸다.
“….”
곧 그 목소리를 들은 이진한의 두 눈이 잘게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