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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150화 (150/210)

◈ 150.

이리아는 온몸이 결박된 채 누군가의 어깨에 들려 납치되어가는 중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 귀에 대고 소리를 지르거나 물어뜯기라도 하고 싶었지만, 입에도 재갈이 물려있던 탓에 옴짝달싹도 하지 못한 채였다.

쉬아아악!

뒤따라오던 실피온이 거칠게 날갯짓하며 계약자를 구하기 위해 날카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이리아를 들쳐메고 있던 괴한은 흘깃 그것을 보고는 성가시다는 표정을 짓더니, 가볍게 주먹을 말아쥐어 허공에 내질렀다.

콰아앙!

가벼운 주먹질 한 방에 공간이 찢어져 나갔다.

실피온은 이때까지와 같이 유려하게 선회하며 그 궤적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뒤쪽에서 불쑥 솟아오른 또 다른 인영에 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저 아이와 계약한 정령인가. 애먹고 있군, 퀘벡. 하긴 너는 인외 종족과는 그리 상성이 좋지 않으니.”

촤아악!

혈광과 함께 번뜩이는 창날이 무참히 실피온의 몸을 찢어발겼다.

전신이 결박된 채 꿈틀거리던 이리아는 실피온이 역소환된 것을 느끼곤 몸부림쳤지만, 퀘벡이라 불린 남자는 두꺼운 손으로 그녀의 목을 꽉 붙잡으며 살기 어린 얼굴로 말했다.

“한 번만 더 귀찮게 하면 팔다리를 뽑아주마. 우리가 필요한 건 네놈의 피지, 온전한 몸이 아니니까.”

“허어, 여성분께 그리 거칠게 대하면 쓰나.”

14번째 사도, 노벰버는 한쪽으로 틀어 묶은 금발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퀘벡의 어깨에 들쳐진 이리아의 허리를 매만졌다.

“얌전히 협조해준다면 네 영지에 더는 피해를 주지 않겠다고 약속하겠네. 자신을 희생해 다수를 구하다니,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마치 희극의 배우를 보는 듯한 태도였다.

이리아는 자신의 등허리까지 올라온 그 손길에 경멸 어린 시선을 보냈다. 입에 재갈이 묶여 있어도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는 여실 없이 느껴졌기에 노벰버는 씩 웃으며 그녀의 얼굴로 손을 가져갔다.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 눈깔이로군.”

퍽.

“…!”

우악스럽게 얼굴을 붙잡은 그 기다란 손가락이 이리아의 눈을 파고들었다.

왼쪽 눈의 시야가 암전되며 핏줄기가 사방으로 튀어 오른다. 머리를 꿰뚫는 그 통증에 그녀가 하나 남은 눈을 크게 뜨며 경련을 토해낼 찰나, 노벰버는 이리아의 귓가에 자신의 입을 가까이 가져갔다.

“하나 남은 눈이라도 간수하고 싶다면, 숨소리조차 내지 말도록 하여라. 배우는 자신이 맡은 배역에 충실해야 하는 법이거든. 이리아 렝케, 네가 맡은 배역은 비련의 공주이니 말이야.”

“….”

이리아의 얼굴이 공포에 질렸다.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저 인간의 거죽을 뒤집어쓰고 있을 뿐인 괴물들이었다.

피부를 스치는 날 선 살기가 그것이 현실임을 선명히 말해주고 있었다.

“가지.”

노벰버의 퀘벡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이래도 괜찮은가.”

“뭘 그리 걱정하는가. 두 개이니 하나 정도는 터트려도 문제없지. 아니면, 작은 아이라고 동정이라도 하는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였다.

하지만 퀘벡은 같은 사도 중에서도 제정신이 아니라고 알려진 노벰버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기에 담담히 고개를 저으며 재차 이리아의 신형을 들쳐 맸다.

쿵.

둘의 신형은 이내 어둠을 가로지르며 영지와는 조금 떨어진 숲에 도착했다.

기다리고 있던 것은 몇 명의 인원. 그들은 퀘벡에게서 이리아의 신형을 건네받고는 공터 한쪽에 설치된 재단 위에 그녀를 올려놓았다.

“뭐야, 눈 한쪽이 없네?”

“붙잡는 과정에서 반항이 조금 심했거든.”

“고작해야 상급 정령 나부랭이를 다루는 녀석이 심해봤자 뭐가 심해. 그냥 자길 보는 눈깔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터트렸겠지. 정말 악취미라니까.”

“…네 눈깔도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데, 터트려 줄까?”

“하.”

13번째 사도, 트루마크 마이크는 실소를 흘렸다.

“사도 노벰버. 지금 항명하는 것인가.”

“웃기지도 않는 소리. 사도의 숫자는 상징을 나타내는 것이다. 상위 넘버를 제외하고는 위계질서 운운하는 것은 개소리이지.”

“개소리? 한 번 시험해볼까?”

마이크는 거구를 지닌 흑인이었다.

자신의 민머리를 매만지며 씩 웃고 집채만 한 도를 들어 올린 그는 당장이라도 노벰버의 몸을 양단해버릴 듯한 날카로운 기세를 보였다.

“나쁘지 않군. 네놈처럼 무식하고 교양 없는 녀석이 나보다 앞선 숫자를 받은 것이 이해되질 않았으니.”

휘리릭.

노벰버 역시 진득한 혈광을 흘리며 자세를 잡았다.

서로 충돌하게 될 일촉즉발의 분위기. 하지만 다른 이들은 그저 재미있겠다는 표정으로 히죽거리며 둘을 바라볼 뿐이었다.

“정숙. 인디아 님의 앞입니다.”

이곳에 있던 사도 중 유일한 여성인 줄리엣이 엄숙한 태도로 말했다.

“…쯧.”

사도 중 한 자릿수인 솔로 넘버는 조금 다른 의미와 무게를 지닌다. 그렇기에 둘은 혀를 차며 어쩔 수 없다는 듯 기세를 거두며 뒤로 물러났다.

“그래서, 예의 그 용사는 어떻게 됐지?”

“우리가 습격할 때까지 여전히 그 대장간에 틀어박혀 있었네. 영지를 빠져나올 때가 돼서야 겨우 상황을 눈치챘지.”

“슬슬 얼마 남지 않았는가.”

“그 정도 실력자라면 금방 뒤따라오겠지.”

이리아를 납치해온 투르마크 퀘벡은 고개를 들어 주위를 바라보았다.

15번째 사도인 자신을 비롯해 파파, 오스카, 노벰버, 마이크, 리마, 킬로, 줄리엣, 그리고 솔로 넘버인 9번째 사도 인디아까지 한자리에 모였다.

모두 용사라 불리고 있는 베르너란 남자를 잡기 위해서.

“…다들 알겠지만, 우리는 실험용 쥐다. 용사라는 존재의 전력이 얼마나 될지 가늠하는 용도겠지. 그분들이 나서기 전에 말이야.”

“다들 알고 있는 이야기를 또 구구절절 말하는가. 참으로 멋이 없군, 마이크.”

“노벰버. 너 역시 마찬가지다.”

“상관없네. 배우는 맡은 배역에만 충실하면 되는 것이니.”

사도는 각자 섬기는 마족이 다르다.

그렇기에 한데 모이는 일은 드물었지만, 오늘은 용사의 존재가 그들을 한 곳으로 불러 모은 것이었다.

“…이 아이가 《창조》의 후손인가.”

재단 앞에 자리하던 인디아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새빨간 머리카락을 틀어 올린 모습으로, 자신의 앞에 있던 이들과 달리 주술사 같은 상당히 유약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의 강함이 두 자릿수인 자신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알기에 다른 사도들은 쥐 죽은 듯 입을 다물었다.

철컥.

인디아는 이리아의 입에 물린 재갈을 풀어주었다.

재갈뿐이 아니었다. 몸을 구속하고 있던 결박을 모두 풀어주었지만, 그녀는 어째서인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어, 어떻게….’

어찌 사람이 발하는 기운이 이토록 사이하고 무거울 수가 있는 것일까.

혼절하지 않도록 의식을 꽉 붙드는 것이 이리아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대견하구나. 나를 앞에 두고도 의식을 잃지 않는다니.”

인디아는 그 새하얀 손을 들어 이리아의 머리를 이리저리 쓰다듬었다.

그러곤 눈가에 흘러내린 피를 보더니 가볍게 혀를 내밀어 눌어붙은 그것을 핥았다.

“피는 역사를 상징한다. 강자의 힘은 그것을 타고 후대로 유전되지. 그리고, 영웅이라 불리는 이들의 피는 한층 더 특별함을 지니기 마련이란다.”

딱.

그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재단 위로 푸른 불꽃이 피어올랐다.

“….”

동시에 의미를 알 수 없는 언어가 입에서 새어 나왔다.

이리아는 귓가를 어지럽히는 그 목소리에 손끝을 잘게 떨다가 이내 온몸을 휘감는 듯한 무형의 기운에 두 눈을 크게 떴다.

“무, 무슨…!”

“용사가 나타난 것은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다. 그들은 여러 존재에게 큰 피해를 남겼지. 당연히 그때를 잊지 못한 채 복수하고 싶어 하는 이들도 많아서 말이야.”

드드드드─.

피가 끓어올랐다.

시야가 새빨갛게 물들었고, 그 누구도 붙잡지 않았음에도 몸이 천천히 들리며 재단 위에 떠 올랐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 사도라 할지라도 섣불리 불러내기 위험한 존재들. 하지만 영웅 중 한 명인 《창조》의 피라면 충분하겠지.”

“으으윽…!”

뜨거운 무언가가 목을 타고 훅 넘어갔다.

그 타는 듯한 갈증에 그녀가 제 목을 붙잡았을 찰나, 인디아는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너무 슬퍼하지 말도록 하여라. 너뿐만 아니라 대륙 곳곳에 있는 영웅의 후손들 역시 비슷한 상황일 터이니.”

촤아악!

이리아의 눈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수백, 수천 개의 선을 이뤘다. 그것은 이내 고치처럼 그녀의 몸을 휘감았고, 이내 거대한 번데기가 되어 호흡마다 거친 박동을 반복했다.

“이쪽은 되었고….”

인디아는 느긋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들’을 불러내기 위한 최소한의 준비는 마쳤다.

이제 남은 것은 의식이 무사히 끝날 때까지 시간을 벌면 되는 일. 그 새빨간 눈동자가 밤의 어둠을 꿰뚫으며 저 너머를 바라보았다.

“오는구나.”

“….”

나지막하게 내뱉어진 한 마디에 의식을 바라보고 있던 마인들이 몸을 돌렸다.

“용사라.”

“방심하지 말아라. 고위 마족이신 메피스토 님과 맥스웰 님을 쓰러뜨렸다. 베르하임 왕국에서 하위 사도들이 모조리 쓸려나간 걸 생각하면….”

“쫑알쫑알 시끄럽군. 그리 걱정되면 빠지던가.”

“네놈이 제일 먼저 죽겠군.”

사도들은 서로 티격태격하는 것을 멈추지 않으며 투기를 피워 올렸다.

그리고 그 가운데, 어둠을 가로질러 쇄도한 인영이 한 쌍의 검은 날개를 펄럭이며 내려앉았다.

“교단은 아니었나.”

이진한은 담담한 얼굴로 주위를 바라보았다.

미르엘은 상대를 악마 숭배 교단이라고 말했지만,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을 보아하니 이전 베르하임 왕국을 비롯해 곳곳에서 싸웠던 ‘사도’ 녀석들인 듯했다.

“용사 베르너.”

퀘벡과 노벰버가 선두에 섰다.

인디아를 제외한 다른 여섯 마인들은 그 뒤에서며 거칠게 기세를 내뿜었고,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 흉흉한 살기를 흩뿌렸다.

“이리아는 어디 있지?”

“그녀는 의식을 위한 제물이다.”

대답한 것은 재단 위에 있던 인디아였다.

그는 담담한 태도로 번뜩이는 눈빛을 품은 채 자신들 앞에 내려선 용사를 바라보았다.

“용사가 이곳에 온 건 예상치 못한 일이었지. 와이번 무리의 습격도 마찬가지였어. 덕분에 계획에 조금 차질이 생겼지만, 그걸로 끝이다. 흘러가는 역사는 인간의 그 나약한 손으로는 바꿀 수 없는 일이지.”

“네놈들이 하는 게 역사적인 일이라고 포장하는 건가?”

이진한은 그 말에 기가 차지도 않다는 듯 헛웃음을 토해내었다.

웅웅웅─.

어느새 그 손에 쥐어진 용아청성창이 시퍼런 뇌광과 함께 농밀한 신성력을 줄기줄기 뿜으며 미친 듯한 기세를 보였다.

그 하나만으로 작금 마인들이 보이는 총량을 넘어설 정도로 강대한 것이었다.

어찌나 분노하고 있는지 평소 강적과 싸우기 전에 유지하던 평정심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미르엘이 죽을 뻔하고, 이리아는 납치까지 당했다.’

과거의 잔재에 시선을 빼앗겨 주위에서 시선을 거둔 자신의 미련함 때문이었다.

이전처럼 주의를 놓지 않은 채 조금만 신경을 기울였다면 마인들이 내뿜는 기척을 놓치지 않았을 터인데.

“네놈들은 오늘 뜨는 해를 보지 못할 것이다.”

확고한 선언.

그리고 미래를 향한 예언.

용아청성창을 부여잡은 손등 위로 선명한 핏줄이 불쑥 튀어 올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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