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9.
캉. 캉. 캉. 캉.
닷새.
약 114시간. 6,800분. 41만 초.
5초마다 기계처럼 떨어져 내리는 망치의 울림이 8만 번을 넘어섰을 때, 이진한이 두드리던 쇠뭉치가 뚜렷한 형태를 이뤄냈다.
「템페트스(Tempest)」
고된 작업 끝에 그 형태가 완성되었다.
이제 바람의 가호가 깃들기까지 조금만 기다리면 이리아의 도움을 받아 바람의 정령왕인 실피드를 소환시킬 수 있으리라.
덜그럭.
망치를 놓고 일어난 그는 이마에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 냈다.
기존의 것보다 수십 배는 더 뜨거운 초고열 용광로를 만들어 가까이하고 있던 탓에 피부가 너덜너덜했다.
가볍게 그 위를 쓸어내리자 죽은 피부가 찢어졌고, 새하얗게 돋아난 새살이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말하며 모습을 드러냈다.
“물 좀.”
물의 정령에게 부탁해 가볍게 세수를 마친 이진한은 자리에서 옅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창문 사이로 슬쩍 비치는 두 개의 초승달이 보인다. 녹과 적, 각기 다른 색의 빛을 내뿜으며 묘한 마력을 선사했다.
“끄응.”
자리에서 일어나자 가벼운 탈력감이 전신을 휘감았다.
삐걱거리는 허리를 가볍게 두드려주었을 때, 그는 자신이 템페스트를 만드는 데만 너무 몰두해있었음을 깨달았다.
“…너무 무신경했나.”
그래도 닷새간의 여정 끝에 템페스트의 제련 작업은 얼추 끝났다.
늦어도 하루 뒤에는 완성할 수 있을 터.
실피드의 소환 의식에만 성공한다면 걸릴 일은 없었다.
턱.
창틀을 잡고 선 이진한은 다시금 옅은 한숨을 뱉어내었다.
도원경에서 한달 동안 자지 않은 채 수련했을 때보다, 닷새 동안 망치질한 지금이 정신적으로 더욱 지친 듯했다.
할 수 있다면 숙소로 돌아가 곧바로 자고 싶었지만, 아직 마무리 작업이 남아있으니 그럴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템페스트를 두드리는 것으로 빽빽하게 밀집되어 있던 신경이 분산되자 그 틈으로 온갖 상념이 물밀듯 밀려 들어왔다.
그 가운데 이진한은 한 가지 의제에 눈을 돌렸다.
자신들은 어째서 이 세상에 오게 된 것일까.
단순히 게임을 하다가?
지난 반년 동안 이곳에 와서 느낀 것은, 원인이 없는 현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을 할 수 있는 존재는 어렵지 않게 추려낼 수 있었다.
“…어디, 이세계 물 라노벨도 아니고.”
무슨 작품처럼 여신이 나와 치트 능력을 주고 세상을 구해달라, 했을 수도 있는 일이겠지.
이진한은 피식 웃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누군가 자신을 비롯한 ‘월드’의 랭커들을 이곳, 아르테니아에 소환했다면 필연적으로 그에 따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당장 생각할 수 있는 건 고대 악신의 토벌.
하지만 전승에서 알 수 있듯 자신들은 토벌에 성공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남기를 선택했을까.
…아니, 어쩌면 자의가 아니었나.
좋을 대로 편리한 장기 말로 써지고, 악신을 쓰러뜨린 뒤 토사구팽을 당하는 것도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하나의 가정이 꼬리를 물고 늘어지며 새로운 가정을 계속해서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멍하니 밖을 바라보던 이진한은 문득 한 가지 요소에 시선이 닿았다.
“시간의 유예.”
【1273:12:35】
섭리를 거스르는 고도의 술식이다.
적어도 초월지경에 다다라 새로운 지평을 연 존재만이 구축할 수 있는 경지였다.
그렇다면 누가 그것을 만들어 주었을까.
자신은 절대 아니었다. 현자 클래스의 초월지경인 대현자가 등장한 것은 깨어난 이후의 일.
그렇다면 꼽을 수 있는 후보는 《불멸》, 《안식》, 《영원》. 이 셋이 유력했다.
“《영원》일 가능성이 크겠지.”
시간에 관련된 흐름이라면 그녀와 테마가 일치하고, 나름대로 꽤 친했던 사이다.
만일 모종의 존재에 의해 약속을 배신당하고, 그것을 복수하기 위해 준비하려 했다면 자신 만큼 적당한 이가 없을 터.
모든 클래스를 사용할 수 있고, 대현자의 개화로 인해 초월지경의 가능성이 열렸다.
모든 클래스가 초월지경에 다다른다면, 도원경 속의 대현자는 그 위의 경지가 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그것이야말로 정말 ‘신’이 아닐까.
“…나라면 그냥 곱게 돌려보내 주었을 것 같은데.”
한 명 한 명이 인지를 초월한 힘을 지닌 존재들이었다.
세상을 관리하는 신의 입장에선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품에 안고 있는 기분일 텐데 어째서 굳이 이곳에 붙들어 놓은 것일까.
“…후.”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결론은 나지 않았기에 이진한은 가볍게 고개를 털어 그런 의문들을 씻어내었다.
이제 얼마 있지 않으면 템페스트로 실피드와의 계약을 맺을 수 있다. 그렇다면 자신이 알지 못했던 여러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터.
물론 그 역시 전부 알고 있는 건 아니라고 했지만, 얼추 얼개는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
문득 귓가에 들려온 옅은 숨소리에 이진한의 고개가 돌아갔다.
슬쩍 밖으로 나가 밑을 바라보니 벽에 기대 눈을 감고 있던 한 인영에 눈에 들어왔다.
“엘레오노라.”
깊은 잠에 빠졌는지 부름에도 숨소리가 흐트러짐이 없다.
이진한은 굳이 그녀를 깨우지 않은 채 조심스럽게 안아 들어 대장간 한쪽에 있는 소파에 내려놓은 뒤 자신의 외투를 벗어 덮어주었다.
“으음.”
갑작스럽게 뒤바뀐 잠자리 탓인지 엘레오노라는 몸을 뒤척이며 꿈틀거렸다.
이진한은 그 모습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짓고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정돈해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은 혼자가 아니었다.
엘레오노라가 있으며, 미르엘이 있었고, 일레이나도 함께 했다.
이제껏 거쳐온 수많은 이들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대적 관계로 남은 이들도 있었지만, 그보다 많은 이들이 자신을 응원하며 함께 따르기를 원했다.
“…다 끝나면.”
정말로 나라라도 하나 세워서 그들과 오순도순 지내볼까.
일개 소시민이었던 이전과는 사뭇 다른 배포였기에 작은 웃음을 토해내고는 천천히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산뜻했던 봄과 뜨거웠던 여름이 끝났고, 어느덧 선선한 가을밤의 공기가 피부에 와닿았다.
사라락.
발밑으로 풀을 밟는 느낌이 그리 좋지 않을 수가 없다. 이리아가 배려해준 덕분에 주변에는 사람 한 명조차 찾아볼 수 없었기에 마음 놓고 기지개를 켰다.
툭.
그때, 하늘에서부터 누군가가 떨어져 내렸다.
이미 한참 전에 그 기척을 눈치채고 있던 그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렸고, 일레이나는 그런 이진한의 모습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 끝났어요?”
“얼추. 이제 아무리 늦어도 하루면 다 끝나.”
“다행이네요. 엘레오노라는 안에 있나요?”
“자고 있어. 기다리느라 피곤했나 봐.”
“번갈아 가면서 당신 곁을 지키고 있었거든요. 어지간해서는 위험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요.”
“미안하네.”
“뭘, 이런 걸로요.”
잠시 걷자는 눈짓에 일레이나는 냉큼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시원한 바람을 타고 옅은 라일락 향이 풍겨 왔다.
이진한은 미소를 지은 채 수없이 많은 별이 반짝거리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아주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바람의 정령왕만 소환하면 되는 거군요.”
“그래. 그러면 이제 내 기억의 공백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을 수 있겠지.”
“다행인 이야기네요. 정령왕이 나타나고 나서부터 표정이 얼마나 무서웠는데요.”
“…그렇게 심각했어?”
“네. 그래서 저희도 말 한마디 못 붙이고 문가만 지키고 있었잖아요.”
“덕분에 마음 놓고 템페스트를 제련한 거지.”
“그렇죠. 아, 맞다.”
일레이나는 무언가를 깜빡 잊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그러곤 품에 손을 넣어 뒤적거리더니 곧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살짝 녹았네요. 보존 마법이라도 걸어놓을걸.”
“그게 뭐야?”
“초콜릿이요. 세간에서는 오늘이 여자가 남자한테 초콜릿을 주는 기념일이에요. 몰랐어요?”
“아, 발렌타인?”
“네.”
“그래, 고맙게 받을게.”
이진한은 가볍게 손을 뻗었지만, 일레이나는 짓궂은 미소와 함께 몸을 뒤로 내뺐다.
“뭐야?”
“잠깐만 있어 봐요.”
그녀는 경쾌한 손놀림으로 포장지를 뜯고는 초콜릿 한 조각을 집어 얼굴로 내밀어왔다.
“아.”
“그냥 줘. 내가 먹을게.”
“아!”
반론 따윈 허용하지 않겠다는 강경한 태도였다.
슬쩍 주위의 눈치를 살핀 이진한은 이내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자 초콜릿이 쏙 들어왔고, 입안으로 순식간에 씁쓰름한 달콤함이 퍼져나갔다.
“…맛있네.”
“그렇죠? 지금 대륙에서 제일 유행하는 거래요. 마음 같아선 손수 만들고 싶었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거든요.”
“음.”
첫맛은 달콤하고, 끝맛은 살짝 썼다.
오히려 그렇기에 물리지 않고 계속 먹을 수 있는 그런 느낌이지 않을까.
“아.”
“….”
목으로 꿀꺽 넘기자, 기다리고 있던 일레이나가 다시금 손을 뻗어왔다.
아무래도 전부 먹을 때까지 계속 그렇게 줄 모습으로 보였기에 그는 순순히 체념하며 연신 초콜릿을 받아먹었다.
“그러면 이제 돌아갈까? 엘레오노라가 깨어났을 수도 있으니.”
“그러죠.”
기어이 가져온 초콜릿을 전부 먹여준 일레이나는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둘은 나온 대장간으로 되돌아갔고, 여전히 소파에 누워 새근새근 잠자고 있던 엘레오노라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귀여운 아이죠? 하는 짓은 여우인데 이럴 때 보면 영락없이 순수해 보인단 말이에요.”
일레이나는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아 흐트러진 그녀의 머릿결을 정돈해주었다.
“여우인가?”
“거, 기회가 날 때마다 찰떡처럼 달라붙으신 분께서 그렇게 의문 조로 말씀하시면 실망스러운데요.”
“누가 찰떡처럼 달라붙어!”
“강한 부정은, 알죠?”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쓴웃음을 지은 이진한은 못말리겠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입을 열었다.
“날이 밝으면 이리아에게 말해줘. 템페스트가 완성되었다고.”
“알겠어요. 그러면 당신은 계속 이곳에 계실 건가요?”
“뒷정리가 조금 필요하거든. 그러니까 먼저 돌아가서 쉬고 있어.”
“알겠….”
쿠구구궁─.
일레이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축을 뒤흔드는 큰 진동이 발끝을 타고 느껴졌다.
“….”
이진한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일레이나 역시 그 방향을 가늠하고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숨을 삼켰다.
“…저긴.”
“내가 갈게. 여길 부탁해.”
“네.”
툭, 쐐애액!
대장간을 나선 이진한은 가볍게 땅을 박찼다.
그러자 귀청을 찢는 파공성과 함께 순식간에 그 몸이 나아갔고, 머지않아 렝케 가문의 저택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건.”
저택의 한쪽 면이 폭격이라도 받은 듯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
그 짧은 시간에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꺼지지 않은 불길이 생존자들의 비명을 자아내며 아비규환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미르엘! 이리아!”
이진한은 다급하게 그녀들의 기운을 찾아 저택 곳곳을 뒤졌다.
그렇게 얼마를 뛰어다녔을까, 한쪽 구석에 피투성이로 주저앉아 있던 익숙한 인영을 발견할 수 있었다.
“…베르너 님.”
그 짧은 시간 동안 얼마나 치열한 싸움이 있었는지 전신이 난자당해 있었다.
겨우 치명상을 피한 듯했지만, 흘러내리는 출혈의 양이 심상치 않다. 그는 황급히 포션을 열어 상처 위에 붙고는 힐링 마법으로 그녀를 치료했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저 때문에 기사님이….”
옆에선 이리아를 똑 닮은 동생인 니아가 울상을 지으며 손을 떨어왔다.
대충 상황을 파악한 이진한은 미르엘의 입으로 포션을 흘려 넣어주며 물었다.
“이리아는? 이리아는 어딨지?”
일선에서 상황을 지휘해야 할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그 물음에 겨우 정신을 차린 미르엘이 전신에 얼룩진 고통에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겨우 입을 열었다.
“…일단의 무리가 나타나 이리아 님을 납치해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