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8.
바람이 절정에 다다랐을 때 세상이 멈췄다.
다채로움으로 물들어 있던 정원의 색이 잿빛으로 물들었고, 미증유의 기운을 가진 존재가 입을 열었다.
-《지혜》.
소용돌이치던 바람이 모여 사람의 형상을 이뤘다.
이진한은 그 가운데 부릅뜬 두 눈으로 고개를 들어 자신 앞에 강림한 정체 모를 이를 바라보았다.
“넌 누구지?”
Lv.? 「????」
대현자의 눈으로도 판별되지 않았다.
상대와의 격차가 큰 경우에 레벨이 표시되지 않은 적은 있었지만, 이름을 비롯해 다른 파라미터조차 보이지 않은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녀는….
바람으로 이루어진 손끝이 자신을 가리켰다.
이진한은 긴장한 표정으로 인벤토리에 손을 넣은 채 무슨 일이 일어나는 즉시 반응할 수 있도록 감각을 곤두세웠다.
‘뭐 이런 괴물이.’
풍환석에 봉인되어 있던 괴물일까.
처음엔 바람의 정령왕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이토록 일그러진 기운을 내뿜는 것이 정령일 리가 없었다.
-널 원망하지 않았다.
“….”
용아청성창과 그라나다의 자루를 움켜쥔 이진한의 손이 우뚝 멈춰 섰다.
바람으로 이루어진 존재는 무언가를 전하려는 듯 형체가 없는 입을 뻐끔거리며 이질적인 목소리를 토해내었다.
“원망하지 않는다고? 그녀? 대체 무슨 소리지?”
-그녀는….
파스스스─.
그 존재는 다시 입을 열었지만, 이내 형태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다리와 팔 끄트머리서부터 가루가 되어 흩어지더니 스스로 바람을 만들어내 멀리 흩어졌다.
-널 원망하지 않았다.
오직 그가 남긴 마지막 말만이 정지된 세상 가운데 쓸쓸히 울려 퍼졌을 따름이었다.
슈우욱.
바람이 사라져갔다.
머리카락을 펄럭이던 기류가 가라앉고, 무채색의 세상이 다시 그 찬란한 빛깔을 찾았을 때 멈춰 있던 시간의 초침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이게 뭐죠?”
이리아는 산발이 된 머리카락을 억누르며 혼란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나도 잘 모르겠는데….”
영문을 모르는 건 이진한 역시 마찬가지였다.
미간을 찌푸리며 주위를 둘러보자 재단 위에 있던 풍환석이 저적, 하고 갈라졌다.
후우웅─!
이전과도 같으면서 다른 미증유의 기운이 재차 휘몰아쳤다.
그 거센 기세 속에서 맡을 수 있는 농밀한 정령의 향기에 정체를 깨달은 이리아의 두 눈이 커다래지며 짤막한 이름을 뱉어냈다.
“실피드?”
바람의 정령왕.
지난 천여 년간 《창조》 이후 그 누구도 계약을 맺지 못했다는 존재.
이만한 힘을 지닌 것은 그밖에 없었다.
“….”
이진한은 무의식적으로 용아청성창을 다잡았다.
정령왕의 강함은 성룡과 같은 취급을 받는다. 아무리 못해도 마룡 벨라시온 정도의 힘을 지니고 있을 터.
절대 무시할 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쉬이익.
다시금 바람이 그들 앞으로 모여들었다.
다른 점이라면 이전과 같이 형체가 없는 것이 아니라, 뚜렷한 인간의 모습을 이뤄냈다는 것이었다.
-….
새하얀 머리카락을 지닌 장신의 남자였다.
그는 천천히 눈을 뜨더니 옅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아이고, 그 양반 드디어 갔나 보네. 천 년 동안 이게 무슨 고생인지. 참 고집도 강해요. 내가 대신 해주겠다고 그리도 말했거늘.
곁에 감도는 기품과는 달리 살짝 가벼운 어조로 어깨를 떨구며 그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주위에 흩어진 기운들을 어루만졌다.
-거기선 편히 쉬십쇼. 뒤는 내가 잘하고 있을 테니까.
혼자만의 세계의 빠져 있는 모습에 이진한은 용아청성창의 끝을 가볍게 바닥에 찍어 소리를 내었다.
“너는?”
-어이쿠, 인사가 늦었습니다. 그리고 오랜만입니다. 《지혜》여. 제가 당대의 바람을 다스리는 실피드입니다.
바람의 정령왕 실피드.
그는 가는 미소를 품은 채 그리운 사람을 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바, 바, 바, 바람의 정령왕!”
이리아는 손끝을 떨며 그리 외쳤다.
《창조》의 핏줄 중에서도 역대 급의 재능을 지녔다고 판단되는 그녀의 친화력으로도 계약을 맺어 거느릴 수 있는 건 아직 상급이 한계였다.
그런 가운데 최상급을 건너뛰고 나타난 바람의 정령왕의 현신은 경악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오랜만이라고? 날 아나?”
-아, 당신께서는 절 잊어버릴 만도 하지요. 천년이란 시간은 인간에게 있어서 짧은 것이 아니니. 당시 저는 그분이 부리는 상급 정령 중 하나였습니다.
“…그분?”
재차 되돌아온 질문에 실피드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한쪽 눈을 찡긋했다.
-당신과 같은 영웅이자, 연인이셨던 《창조》 말입니다.
이진한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이슬란에게서도 제대로 듣지 못했던 그 시절과의 연결점이 갑작스럽게 눈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이런.
그때, 실피드의 형태가 끝에서부터 무너져 내렸다.
“왜 그러지?”
-지금의 현신은 풍환석을 기반으로 한 건데, 잔류 사념으로 남아있던 전대 양반이 당신에게 말을 전하기 위해 대부분의 기운을 끌어다 사용했습니다. 애초에 그리 시간이 많지 않았군요.
“그럼…!”
네가 알고 있는 이야기라도 빨리 말해달라.
이진한의 다급한 표정에 실피드는 고개를 저었다.
-저도 전부 알고 있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단시간에 전달할 이야기도 아니군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너와 계약이라도 맺어야 하나?”
-평범한 방법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당신은 틀림없이 인간 중에서는 손꼽을 정도로 강하나, 정령사로서는 아직 저와 계약을 맺을 수준까진 오르지 못했으니까요.
“…매개체, 매개체가 필요한 거로군.”
-예. 템페스트라는 이름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잊을 수 있을 리가.”
이진한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템페스트.
바람의 가호가 깃든 검이었다. 과거 《창조》의 주무장으로, 자신이 직접 만들어 선물해준 것이기도 했다.
-원래의 템페스트는 이미 이 세상에 없겠죠. 하지만 당신이라면 대체할 무언가를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면 그 이후에는?”
-저 아이에게 도움을 받으십시오. 그분의 핏줄을 이었으니 저를 다시 소환할 수 있을 겁니다.
“알겠다.”
-네, 그럼 다시 그때에.
실피드의 신형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그 자리에 남은 것은 반으로 갈라져 처참하게 부서진 풍환석 뿐. 이진한은 그것을 착잡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리아가 《창조》의 핏줄을 이었다는 것은.’
그녀가 자신과 헤어진 이후, 다른 사람을 만나 가정을 꾸렸다는 이야기였다.
행복하기를 바랐지만, 막상 그 진실을 들으니 마음이 씁쓸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리아.”
“…네, 넷!”
멍하니 있던 이리아가 그 부름에 화들짝 놀라 대답했다.
“상황은 이해했지? 대장간을 빌리고 싶은데.”
“아, 네. 곧바로 준비하겠습니다.”
“부탁하지.”
이진한이 로브 자락을 휘날리며 몸을 돌렸다.
허공을 노닐던 까망베르는 자신의 자리인 후드로 내려앉으려 하지만, 그 주위에 감도는 무거운 분위기에 눈치를 보고는 슬쩍 방향을 바꾸어 미르엘의 품으로 향했다.
삐이.
“…그래, 그래.”
미르엘은 살짝 움찔하면서도 이전보다는 더 자연스러운 태도로 까망베르를 받아들였다.
“당분간은 조용히 있자.”
그녀는 그 매끈한 털들을 쓰다듬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
캉! 캉!
대장간 안쪽으로부터 쇠를 두드리는 망치 소리가 균열하게 울려 퍼졌다.
벌써 사흘째의 날. 해가 뜨자마자 그 앞을 서성이던 미르엘은 뺨을 긁으며 뒤이어 도착한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더 걸릴 것 같군요.”
“하긴 정령왕이 담길 매개체가 되는 무기잖아요. 하루 이틀로 완성되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겠죠.”
벽에 기대선 일레이나가 짧게 고개를 끄덕이자 슬쩍 안을 들여다본 엘레오노라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저러다 몸이 상하지 않을지 걱정이에요.”
“…하긴. 몸은 튼튼해도 마음이 흔들리면 아무리 초인이라 할지라도 병들기 마련이니.”
“사흘째 물 한 모금도 드시지 않은 채 망치만 두드리고 계시잖아요.”
“분위기를 봐요. 말이라도 걸면 용서치 않을 기세던데. 저는 말리지 않겠지만, 적어도 저런 상태면 조금 더 기다리는 게 맞다고 봐요.”
“…그렇긴 하지만.”
일레이나의 말에 엘레오노라는 침음성을 흘렸다.
그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만큼 더욱 걱정이 들 따름이었다.
투두두두.
그때, 옅은 진동과 함께 저 멀리서부터 말 한 필이 달려왔다.
그 위에 타고 있던 이가 익숙한 얼굴임을 본 엘레오노라는 표정을 정돈한 뒤, 정중히 그녀를 맞이했다.
“이리아 경.”
“…베르너 님의 작업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까?”
“더 시간이 걸릴 것 같네요.”
“그렇습니까.”
이리아의 두 눈동자로 걱정이 스쳤다.
그것이 평범한 감정이 아니라는 것을 놓칠 만큼 엘레오노라는 녹록한 여자가 아니었다.
“일단 조금 더 기다려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참, 시간이 되신다면 함께 식사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조금 있으면 점심이니….”
이리아는 조심스럽게 제안을 건넸다.
며칠 동안은 부서진 풍환석이나 다른 일의 처리로 바빠 이곳저곳 돌아다녔지만, 이제야 겨우 시간이 났기에 한숨을 돌리러 온 것이었다.
“저는 괜찮아요. 다들 괜찮죠?”
“네, 뭐.”
“저도 괜찮습니다.”
엘레오노라의 물음에 일레이나와 미르엘 역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까망베르는 여전히 마음껏 창공을 노닐며 지치면 미르엘에게 다가와 휴식을 취하는 것을 반복 중이었다.
곧 렝케 가문의 저택으로 돌아간 그들은 식사를 이어나갔다.
유서 깊은 가문의 저력을 보이려는 듯 잔뜩 힘이 들어간 요리가 나왔기에 모두 제법 만족한 식사 자리였다.
곧 한적한 티타임이 이어졌다.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은 두말할 것도 없었고, 일레이나 역시 마탑주의 제자로 예법을 익혔기에 모두 자연스러운 태도로 자리했다.
“그래서, 이리아 경은 베르너 님께 반했나요?”
“풉…!”
아무런 맥락 없이 튀어나온 말에 부드럽게 이어지던 분위기가 한 번에 깨어져 나갔다.
“그, 그게 무슨.”
이리아는 채신머리없이 뿜어낸 차를 닦아내며 애써 평정을 유지했다.
하지만 엘레오노라는 그 주홍빛 눈동자를 가늘게 뜨며 재차 말을 이었다.
“아니, 그렇잖아요. 검은 현자니, 드래곤 슬레이어니 이전에 그런 외모니까요. 한눈에 반해도 무리는 아니죠.”
“…아.”
이리아는 짤막한 탄성을 토해내며 납득했다.
단순히 외모 만으로만 봐도 자신이 이제껏 살아오며 마주친 어느 남자 보다 수려했다.
거기에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명성과 힘은 일국의 왕과 기사단장조차 납작 엎드리게 할 정도였으니 오죽할까.
‘…그리고.’
《지혜》의 검은 현자.
고대 영웅 중 한 명이라는 그 정체는 단순히 남녀 관계를 떠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가슴을 설레게 하기엔 충분한 것이었다.
“솔직하게 말할게요. 저는 아마 베르너 님이 당신을 이 파티에 들이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어요.”
“….”
일레이나와 미르엘 역시 입을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창조》의 계승자인 그녀는 자신들과 같이 그의 파티원으로 함께 하기에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다.
거기에 과거 연인의 후손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많은 생각이 드는 것도 당연한 일이리라.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죠?”
그럴 생각이 있느냐.
“…저는.”
그 말에 이리아는 떨리는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