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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147화 (147/210)

◈ 147.

이리아의 몸이 석상처럼 굳었다.

마치 치명적인 비밀을 들켜버린 아이처럼 한참 동안 눈동자를 굴린 끝에서야 겨우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겨우 입을 열었다.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쿵─.

이진한은 이 주위의 공간을 장악했다.

초월지경에 이른 강함이 절대적인 지배력을 행사한다. 이리아 정도라면 가볍게 손가락 하나 까딱이는 것으로 존재를 지워버릴 수 있을 만큼의 강한 힘이었다.

“….”

마찬가지로 그 사실을 깨달은 이리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정령 기사단의 부단장으로 그녀 역시 실력자라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눈앞에 부닥친 거센 파도와도 같은 기세는 감히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불가해의 존재.

정신이 견딜 수 있는 한계에 다다르자, 시야가 검게 물들었다. 그것을 본 이진한은 주위를 장악한 기세를 거두어들이고는 가볍게 그녀를 부축했다.

“이래도 믿기 어렵나?”

“…아, 아.”

목이 잠겨 제대로 쇳소리가 나왔다.

믿지 않을 수가 없는 강함이었다. 하지만 이리아는 주위를 짓누르던 기세가 사라졌음에도 여전히 두려움에 잠긴 채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피할 따름이었다.

‘너무 심했나.’

이진한은 뺨을 긁적였다.

확실하게 인식을 심어주기 위하여 가볍게 존재감을 내뿜었는데 그것만으로도 거의 실신 직전에 이를 줄은 몰랐다.

손을 뻗어 그녀의 몸에 온기를 불어넣어 주려 할 찰나, 후드에 있던 까망베르가 먼저 박차고 나가 이리아의 품 안으로 달려들었다.

“앗!”

얼떨결에 녀석을 안게 된 이리아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곧 가슴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온기에 까망베르가 자신을 위해준 것임을 깨닫고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설사 그렇다 한들 곧장 믿기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베르너 님께서 고대 영웅 중 한 분이신 《지혜》의 현자라니.”

“증인은 여럿 있다. 원한다면 불러오지. 이터널 학파의 마탑주, 베르하임 왕국의 국왕, 아니면 레드 일족의 드래곤 정도?”

“….”

어느 하나 쉬이 볼 수 있는 이름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이리아는 쓴웃음을 토해내며 겨우 두려움을 떨쳐내고는 고개를 들어 이진한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제가 《창조》의 후손이라는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말했잖아. 내가 검은 현자라고. 네 외모와 마력의 파장은 그녀와 똑 닮아 있어. 환생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말이야.”

괜히 처음부터 착각한 것이 아니었다.

“….”

이리아는 자신을 꿰뚫어 보는 듯한 그 날카로운 눈에 침을 꿀꺽 삼켰다.

달곰씁쓸한 분위기로 흘러갈 줄 알았던 생각과는 정반대였지만, 이것 역시 방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잠시간 말을 고르던 그녀는 이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제가 속한 렝케 가문은 《창조》의 직계. 천여 년에 달하는 세월 동안 그 핏줄을 지켜왔습니다.”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나?”

이진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이 베르하임 왕국을 건국할 때 일조했던 것처럼 《창조》 역시 가모라 왕국이 설립될 때 큰 도움을 주었고, 이곳에 정착했다는 기록이 있었다.

그렇다면 그 핏줄은 분명 개국공신의 대우를 받을 터.

영웅의 핏줄인지라 우수한 능력을 지녔을 테고, 필히 중요한 인재로 등용됐을 것이었다.

“…그것엔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리아는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외쳤다.

“저, 저는 가문을 떠날 수 없습니다. 이곳에서 남아 선조들이 이어온 책무를 완수해야 합니다. 그러니…!”

“뭐, 그건 상관없는데.”

“…예?”

“왜?”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이진한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이리아는 허둥지둥하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자, 자기를 따라오라고 정체를 밝히신 거 아닌가요? 내 여자가 돼라! 이런 식으로….”

“아니. 내가 원하는 건 네 가문에 있는 《창조》의 기록인데.”

“읏.”

이제껏 엄청난 착각을 했었다는 사실에 이리아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달아왔다.

‘그러면 그렇지! 그렇게 미인인 세 여성과 함께 다니시는데 나로 눈에 찰 리가…!’

이진한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내 파티에 합류하고 싶었나?”

“…아, 아닙니다!”

강한 부정이었다.

***

연회가 끝이 나자 도시는 다시 일상 속으로 되돌아갔다.

이리아는 일단 왕도로 돌아가 보고한 뒤 이진한의 부탁대로 가문에 남아있는 《창조》의 유산을 안내해주기로 했다.

족히 며칠의 시일이 걸릴 예정이었지만, 왕도로 출발하기 직전 위쪽에서 내려온 명령에 이리아는 당황을 금치 못했다.

“…보고서를 받았으니 서면 보고는 괜찮다고 합니다. 이례적인 일이로군요.”

이리아가 슬쩍 눈치를 보며 말했다.

아마 그를 의식한 것이리라. 드래곤 슬레이어 정도 되는 강자를 왕도로 들이기에는 위험 부담이 큰 것일 터. 그렇기에 자신 역시 돌아오지 않아도 된다는 뜻으로 돌려 말한 것이었다.

“괜찮아, 그런 시시콜콜한 것들은.”

이진한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을 더 단축할 수 있게 되었으니 더 좋았을 따름이었다.

랭케 가문이 다스리는 바스마할 영지는 나스닥 항구에서 마차로 사흘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아쉽게도 그리 큰 영지가 아닌지라 텔레포트 게이트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기에 그대로 시일을 소비할 수밖에 없었다.

“크기는 대충 미들턴 정도인가.”

“왕국 자체의 크기도 비슷하니까요.”

“《창조》의 가문이라 기대되네요.”

이리아는 입을 닫은 채 이진한과 대화를 나누는 여성들을 바라보았다.

처음엔 그저 그 화려한 외모에 끌렸지만, 내막을 전해 들으니 하나 같이 심상치 않은 이가 없었다.

《영원》의 계승자로 차기 이터널 학파의 마탑주를 이을 후계자, 일레이나.

검은 현자의 제자로 가르침 받는 중인 오스칼 제국의 전(前) 황녀 엘레오노라.

그리고 그 수호 기사로 《정의》의 검을 계승 받은 미르엘까지.

우습게도 《정의》의 검을 계승하고 있다는 맥락에서 미르엘 본인도 놀랐다. 자신이 배우고 있던 검이 영웅의 것임을 몰랐던 듯했다.

“그래서, 너희는 어째서 너희가 《창조》의 핏줄을 이었다는 걸 숨기는 거지?”

이진한은 그것이 의문이었다.

당장 이터널 학파만 하더라도 《영원》의 계승자임을 널리 알리고 있었고, 베르하임 국왕은 아예 이마에 《지혜》의 검은 현자의 열렬한 추종자인 블랙 워커를 쓴 채 왕국 전체가 그것을 표방하고 있었다.

그 외에도 여럿 비슷했지만, 어째서 그들은 자신들의 계승을 숨기고 있는가.

“위협이 많았거든요.”

렝케 가문이 《창조》의 핏줄을 이었다는 것을 아는 것은 당대 국왕과 몇몇 결사뿐이었다.

“위협?”

“네. 정령에 친화적인 핏줄이라는 건 극히 희귀한 것이니까요. 탐내는 곳이 많았어요. 일국의 귀족이라 할지라도 심심치 않게 습격받거나 납치되기도 했죠.”

“…지금은 안 그런 거 같은데.”

이진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 귀중한 인재인데 와이번이 습격하는 한 가운데 방치해놓는가.

이해되지 않는 듯한 표정에 이리아는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지금은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까요. 이제 그런 것도 희미해졌고, 정령 기사단으로 자리를 잡아서 계승의 의미가 많이 퇴색되었어요. 이제는 그저 왕국의 귀족일 뿐이죠.”

영지에 접어들자 렝케 가문의 저택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살짝 작은 규모에 연식이 되어 보이는 양식이다. 여차하면 오스칼 제국의 수도에 있는 자신의 저택이 두 배는 더 클 것이리라 이진한은 생각했다.

“오랜만입니다, 당주님.”

“오랜만이에요. 니켈. 준비는 해놓았죠?”

“예. 손님들께서 묶으실 방과 식사, 그리고 창고 개방까지 마쳐놓았습니다.”

“고마워요.”

저택에 가자 노집사가 맞아주었다.

창고 개방이 끝났다는 말에 이리아는 이진한을 바라보며 물었다.

“바로 가실 건가요?”

“창고라고 했지.”

“네. 대대로 저희 계승자들이 수련하는 곳이에요. 원래는 직계만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지만, 베르너 님과 다른 분들이라면 괜찮겠죠. 당대 당주인 제가 허락할게요.”

그녀는 짐짓 가슴을 두드리며 자신을 보였다.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 모습을 바라본 이진한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이리아는 위풍당당한 발걸음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끼이익.

창고는 정말로 창고였다.

작은 공간 안으로 쓰지 않는 잡다한 물건들이 잔득 쌓여 있다. 이리아는 개의치 않은 태도로 그것들을 가로질러 정중앙의 바닥 쪽으로 향했다.

툭툭.

가볍게 발끝으로 두 번 바닥을 두드리자 밑에서부터 무언가 조립되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얼마가 지나자 앞쪽으로 바닥이 열리며 지하로 내려가는 통고라 그들 앞에 나타났다.

“…이곳도 이렇게 되어 있나.”

“다른 곳들도 가보셨나요?”

“그래.”

베르하임 왕국 쪽 역시 영웅의 유산이 잠들어 있는 비고는 지하에 자리했다.

계단을 내려가니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천장에는 환한 불빛이 비치고 있었고, 곳곳으로는 아직 하급 정령이 되지 못한 원시 정령들이 돌아다녔다.

“우와.”

그 수려한 광경에 엘레오노라가 감탄을 터트렸다.

이리아는 짐짓 자랑스러운 태도로 내부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렝케 가문의 계승자가 대대로 강한 정령사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혈통뿐만 아니라 이 공간에서도 비롯되었죠.”

“확실히. 이런 공간에서 수련한다면 빠르게 성장할 수 있겠네.”

이진한도 상급 정령까지는 부릴 수 있기에 잘 알고 있었다.

파아앗!

그들이 안쪽으로 발을 내딛자 원시 정령들이 다가와 주위에 머물렀다.

잠시간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이리아는 의외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어쩌면 엘레오노라 님은 정령사에 재능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제가요?”

자신의 곁에 머문 원시 정령을 신기하단 표정으로 바라보던 엘레오노라가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네. 원시 정령은 친화력에 따라 몰려들거든요. 일레이나 님이나 미르엘 님의 농도는 평범한데, 엘레오노라 님 쪽은 생각보다 짙어요. 이건 평범의 범주를 벗어난 거예요.”

“그건 괜찮네. 배틀메이지는 정룡의 보조를 받는 게 제일 좋거든.”

직접 마법을 펼치며 싸우는 것보다, 정령에게 보조를 받는 것이 더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

삐이이.

후드를 벗어난 까망베르 역시 기분이 좋은 지 장내를 신나게 날아다녔다.

“이 앞쪽으로 있는 비석은 모두 《창조》와 역대 계승자께서 쓰신 글귀들이에요. 이것이 저희가 천여 년 동안 보관해온 유산이죠.”

“저건 뭐지?”

《창조》나 그 계승자들이 쓴 기록보다도 이진한의 눈을 잡아끄는 무언가가 있었다.

비석 가운데 있는 재단 위, 사람 머리만 한 돌에게 엄청난 마나가 집중되어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정령석이에요. 바람의 정령과 소통할 수 있는 풍환석이죠.”

“정령석.”

“한 번 건드려보시겠어요?”

“그래도 돼?”

“당주인 제가 허락할게요.”

“흠.”

이진한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하다못해 정령 친화력이 늘어 초월지경에 들거나 그에 근접해지면 더 바랄 것이 없다. 그런 기대를 가지며 천천히 풍환석을 쓰다듬었다.

[바람의 가호가 깃듭니다.]

몸이 살짝 시원해지는 감각과 동시에 한 줄기 바람이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동시에 스탯이 조금 증가했고, 일시적으로 바람의 가호라는 버프가 깃들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조금 아쉽네.”

뭔가 확연한 변화가 있을 줄 알았거늘.

그래도 원래 목적은 《창조》가 남긴 기록이었기에 몸을 돌릴 찰나, 이변이 발생했다.

쿠우우웅─!

장내의 바람이 마치 폭풍이라도 몰려온 것처럼 요동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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