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5.
와이번이 이곳 나스닥까지 직접 닥쳐와 모습을 드러낸 것은 자신들이 타고 왔던 배가 당도한 시점 이후였다.
“도시에 없으면 배에 실려 왔다는 소리겠지.”
습격까지 받았으니 제법 설득력이 있는 이야기였다.
이진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그들은 곧바로 항구에 정박 되어 있던 선박을 샅샅이 수색했다.
“지하 창고는?”
“물류가 적지 않게 실려있어 정리하는 대도 시간이 꽤 걸릴 듯합니다.”
“쯧.”
이리아의 말에 이진한은 직접 배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아직 스무 시간가량 남아있다곤 하지만, 만일 여기에 없으면 또 다른 곳을 수색해야 했다. 그것까지 생각하면 그리 많이 남은 것이 아니었기에 직접 발품을 팔며 움직일 생각이었다.
“술, 향신료, 고기….”
병사와 용병들이 적재된 물류를 하선하는 틈에 끼어 하나하나 그 안을 살폈다.
하지만 얼마가 지나도 원하는 것은 발견되지 않았고, 시간은 점점 더 촉박해지기만 했다.
“…차, 찾았습니다!”
그러던 중 병사 한 명이 창고 제일 안쪽에서 크게 소리쳤다.
이진한은 곧바로 그곳을 향했고, 큰 나무 상자 안에 보관된 사람 얼굴 크기만 한 알을 하나와 마주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작네. 와이번 알은 다 커다랗다고 하더니.”
“제가 수도에서 본 건 작은 것도 제 키만 한 것이었습니다. 이건 작아도 너무 작군요.”
“그래도 알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는 걸 보니 아닐 수가 없겠지.”
“그렇습니다.”
백명란(白明卵).
그 이름대로 흰 알 자체에서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을 보니 제대로 찾은 듯했다.
그런데.
“…그런데 이거 왜 깨져 있냐.”
이진한은 푹 한숨을 내쉬었다.
백명란의 위쪽으로 껍질이 박살 나 있었다.
흔들리는 배 안에서 벽에 부딪히기라도 한 것일까.
상자의 바닥으로는 새하얀 흰자, 양수가 흘러나왔는지 흥건하게 젖어 비릿한 냄새가 올라왔다.
“…?”
문득 이진한은 그 안에서 요리조리 움직이는 무언가를 볼 수 있었다.
옅은 황금빛 궤적.
분명 눈이 맞았지만, 이내 시커멓게 뒤바뀐 것을 보니 이리아가 들고 있던 불빛에 반사되어 비춘 듯했다.
“으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도 이런 쪽엔 전문가가 아닌지라.”
“전문가라고 해도 깨진 알을 어떻게 할 수 있겠냐. 여기서는….”
이진한은 천천히 마력을 방사했다.
우그러진 껍질을 다시 팽팽하게 새우고, 부서진 틈을 메워나갔다. 얼마간 그렇게 심혈을 기울여 복원하자 나름대로 괜찮은 결과물이 나왔다.
“감쪽같지?”
“…와이번들이 모를까요?”
“겉은 멀쩡하잖아.”
속은 어떻게 되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것까진 자신의 잘못이 아니었다. 애초에 발견했을 때부터 이렇게 되어 있는 걸 어쩌란 말인가.
“후우….”
이리아는 마음이 착잡해진 것인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진한은 그대로 알을 들어 표면에 묻은 흰자를 닦아내곤 조심스레 한쪽 팔에 안았다.
“시간 거의 다 됐지?”
“예. 한 시간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가자.”
둘이 배를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이들이 긴장 어린 표정으로 시선을 보냈다.
“알은 무사히 확보했다. 일단 모두 긴장을 풀지 않은 채 휴식을 취하도록.”
“…푸하.”
이리아의 말에 다들 긴장이 풀렸는지 숨을 토해냈다. 더러는 다리가 풀린 듯 바닥에 주저앉으며 옅은 웃음을 토해냈다.
“정말, 이게 무슨 일인지.”
일레이나 역시 밤새 탐색 마법을 펼치며 돌아다닌 탓에 피곤에 찌든 얼굴로 투덜거리며 다가왔다.
“다른 둘은?”
“뻗었어요. 특히 미르엘은 쉬지 않고 도시 곳곳을 뛰어다녔으니까요.”
어깨를 으쓱이며 말해오는 일레이나의 모습에 이진한은 슬쩍 고개를 가까이하며 목소리를 낮췄다.
“…일단 둘에게 돌아가서 여차하면 바로 튈 수 있게 준비해둬.”
“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의아하다는 듯 물어오는 그녀의 시선에 이진한은 슬쩍 알의 윗부분을 보여주었다.
“아.”
명백히 마력으로 형태를 조작한 흔적이 남아있다.
다른 사람이면 모를까, 마도사의 경지에 오른 그녀라면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는 수준.
그렇기에 표정을 굳히며 무어라 말하려 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일레이나가 보랏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자리를 떠나자, 기다리고 있던 이리아가 새초롬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동료분들께선 오시지 않는 겁니까?”
“피곤하다고 자러 간다고 하네.”
“…신뢰받고 계시는군요.”
“나름대로?”
서로 그렇게 구르며 고생했으니 이 정도 신뢰는 당연한 것이 아닐까.
그렇기에 방금 그녀처럼 어깨를 으쓱이자, 이리아는 왠지 동경 어린 시선을 담아 일레이나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저도 옛날에는 모험가를 꿈꿨습니다. 이곳저곳을 여행하며 여러 사람과 만나고 자유로이 살아가는 삶을요.”
“하면 되잖아.”
“…어릴 적의 꿈일 뿐입니다. 저는 지금 제 자리에 만족합니다.”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전혀 만족해하지 않은 것 같지만, 스스로 그렇게 말해오는 것을 어찌할 수 있을까.
이진한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닫았을 뿐이었다.
곧 시간의 유예가 끝에 다다랐다.
널따란 창공 위로 거대한 군주가 모습을 드러냈고, 수십의 와이번이 날갯짓을 하며 파멸의 전조를 자아냈다.
“이리아.”
“예.”
이진한의 부름에 그녀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실피온을 불러냈다.
둘은 그 위에 탄 채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천천히 하늘 위로 솟구쳐 와이번들이 있는 곳까지 다가갔다.
“백명란, 가져왔다.”
로브 안쪽에 고이 들고 있던 백명란을 꺼내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 주위를 돌고 있던 네 마리의 와이번이 천천히 활공하듯 다가와 앞에 멈춰 서며 손안에 들린 알을 응시했다.
구웅.
레드 와이번이 다가와 머리를 숙였다.
어렵지 않게 뜻을 짐작한 이진한은 백명란을 그 머리 위에 내려놓았고, 긴장된 시선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들키지 마라, 제발.’
어떻게든 마력으로 형태를 복원했다곤 하지만, 그 정도로 껍질이 파손되었다면 새끼가 어떻게 되었을지는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침을 꿀꺽 삼키고 숨을 내뱉었을 찰나, 레드 와이번 머리에 놓인 알이 흔들렸다.
“….”
이진한의 움직임이 멈췄다.
아니, 그 주위에 있던 와이번들까지 모두 움직임을 멈춘 채 옅게 떨리기 시작한 백명란을 바라보았다.
“…어, 어 저거.”
“쉿.”
이리아가 두 눈을 크게 뜨며 말하려던 찰나, 그가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티딕, 티디딕─.
죽지 않았던 걸까.
마력을 방사해 재구축한 껍질 위로 실금이 퍼져나가며 조각이 떨어져 내렸다.
알은 이제 레드 와이번의 머리를 굴러다니며 요동쳤다. 어서 빨리 밖에 나가고 싶은 듯 조각을 우수수 흩날렸고, 이내 위쪽이 퍽 하고 열리며 머리가 솟구쳤다.
삐이!
흠뻑 젖은 검은 색의 와이번이었다.
끽해봐야 작은 강아지 크기의 와이번은 호박색 눈동자를 끔벅거리더니 천천히 고개를 움직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여러 마리의 와이번, 그리고 그 뒤에서 이쪽을 내려다보는 창공의 군주까지.
그 장엄한 광경에 기가 죽은 것인지 꼿꼿이 솟아 있던 귀가 슬며시 내려가며 껍질 안쪽으로 다시 들어가려는 듯 몸을 웅크렸다.
그러던 찰나, 뒤쪽에 있던 이진한을 발견하더니 두 눈을 크게 떴다.
팍!
남은 껍질을 깨부수고 단숨에 하늘로 날아오른 와이번이 그에게로 몸을 날리듯 돌진해왔다.
졸지에 몸통 박치기를 맞게 된 이진한은 가슴에 닿는 묵직한 충격에 숨을 토해내면서도 그 품에 안긴 와이번을 바라보았다.
“…새카맣네.”
「쿠르슈엘라」처럼 새하얀 털을 지녔을 줄 알았건만, 블랙 와이번의 새끼였는지 온몸이 새카맣기 그지없었다.
녀석은 그의 가슴에 머리를 비비며 늘어 붙은 껍질을 떼어내고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애교를 부리더니, 이진한이 무슨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그 몸을 타고 올라 로브의 후드 속으로 쏙 들어가 자취를 감췄다.
“뭐야, 이거.”
“들은 적이 있습니다. 와이번 같은 마물은 처음 본 존재를 부모로 인식한다는 가설을요.”
“종도 다른데 부모로 인식한다고?”
구우우웅─.
「쿠르슈엘라」 역시 당황스러운 것인지 기다란 울음을 토해냈다.
로브의 후드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던 녀석은 그 소리를 듣고 움찔하더니 조심스럽게 이진한의 어깨에 머리를 올려놓고 위를 바라보았다.
삐이?
“…음.”
무심코 손을 올려 그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이진한은 생각하길 포기했다.
와이번들도 작금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겠는지 두 눈을 껌벅거리며 이쪽을 바라보기만 했을 뿐이었다.
삐이.
“…이름을 붙여달라고?”
서로 대화가 통한 건 아니지만, 이진한은 이 작은 아이가 왠지 그렇게 말해오는 듯했다.
수많은 별명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월드’에 있을 적 거느리던 소환수에게 붙여 주었던 이름들. 하지만 그것은 이런 귀여운 아이에게 어울리는 것들이 아니었다.
“검은, 블랙? 아니, 까망인가? 까망베르?”
삐익!
“까망? 이게 마음에 들어? 까망베르?”
삐이익!
무심코 입에 나오는 데로 부른 것인데 마음에 든 듯 힘껏 고개를 끄덕이며 화답해왔다.
[인게이지 완료]
Lv.352 「까망베르」
[「까망베르」가 당신에게 귀속되길 원합니다.]
“…어.”
이진한은 슬쩍 「쿠르슈엘라」를 바라보았다.
자신이야 거리낄 건 없지만, 「쿠르슈엘라」의 새끼인데 섣불리 귀속 계약을 맺어도 되는가.
구우웅.
그와 동시에 고고히 서 있던 「쿠르슈엘라」가 천천히 머리를 낮춰 그들이 있는 곳까지 다가왔다.
까망베르와 반대인 새하얀 몸이다.
자신들을 향하는 그 커다란 눈동자에 압박을 받은 이리아는 몸을 흠칫 떨며 물러났지만, 이진한은 가만히 그 자리에 서서 시선을 마주했다.
지이잉─.
시선이 맞자 정신이 공명하며 의식이 연결되었다.
저쪽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막대한 사념에 이진한은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마물의 1레벨은 1년을 의미했다.
즉, 「쿠르슈엘라」는 3천 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왔다는 것.
자신들이 고대 영웅으로서 악신과 싸울 때도 존재했었다.
“…그런가.”
이진한은 두 눈을 크게 떴다.
천 년 전 대전쟁 당시 「쿠르슈엘라」는 동족을 대부분 잃고 멸망의 직전까지 갔다.
그렇기에 고대 신이 봉인되고 난 뒤 지금까지 종족의 번영을 위해 힘썼고, 와이번이란 개체를 다시 세상에 흩뿌릴 수 있었다.
그것이 [태초의 와이번]으로서의 책무.
하지만 이제 수명이 끝나갔고, 후계의 계승을 위해 까망베르를 낳은 것이었다.
삐이.
로브의 후드 속에서 꾸물꾸물 움직여 등줄기를 타고 가슴 앞섬까지 이동한 까망베르가 그 옷깃에서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
털의 색은 다르지만, 똑 닮은 호박색 눈동자가 서로 마주했다.
까망베르는 이내 그 품 안으로 파고들어 모습을 감췄고, 「쿠르슈엘라」는 고개를 들어 이진한을 바라보았다.
“…그래, 일단은 내가 키우고 있으마.”
대화는 통하지 않아도 어렵지 않게 그 뜻을 가늠할 수 있었다.
[태초의 와이번이 당신을 자신의 반려로 인정합니다.]
“…예?”
아무리 그래도 이건 예상치 못한 것이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