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4.
기사단 본부는 시장터를 방불케 했다.
수백 마리에 이르는 와이번의 습격은 도시로서도 절멸의 위기에 이를 수 있는 위험.
하물며 그것이 이곳 나스닥뿐만이 아니라 가모라 왕국 전역에 닥쳐왔다면 국가적인 재난이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후우….”
정령 기사단의 단원인 다르함은 진땀을 뺐다.
와이번들은 곧 물러갔지만, 왕국 자체에 비상 체재가 걸렸다.
기사단의 정예들을 비롯해 주요 군단은 수도로 몰려갔고, 국왕과 함께 방어선을 구축한다고 했다.
이곳에 있는 부단장을 비롯한 남은 단원들에겐 작금의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방책을 찾으라는 특명이 내려온 상태였다.
하지만 그들이라고 무슨 뾰족한 수가 있을까.
하다못해 경험이 많은 용병들을 고용해 상황을 파악하려 했지만, 자신들이 유리한 입장임을 아는 그들이 행패를 놓고 있었다.
“그러니까, 단원 말고 관리자급과 이야기를 하고 싶단 말이오!”
“앞서 말했듯 부단장님께선 현재 부재중이시다. 밖의 급한 일을 처리하고 금방 돌아오실 테니….”
“아니, 막말로 당신이 무슨 권한이 있는데!”
“최고 대우를 약속하겠다. 그러니 진정 부탁한다.”
국가급의 재난 상태였다.
용병들은 이것을 초유의 기회로 여겼고, 자신의 몸값을 최대한 부풀리기 위해 강짜를 놓았다.
더러는 다르함에게 상급자를 불러오라며 큰소리를 치기까지 했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같은 단원인 아이넬은 울컥한 얼굴로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평상시라면 눈도 마주치지 못할 족속들이 자신들의 유리함을 빌미로 이렇게 막 나가다니.
상황이 가라앉으면 뒷감당을 할 수 있냐고 외치려 했지만, 다르함이 굳은 표정으로 짤막하게 고개를 저으며 그녀를 말렸다.
‘원래 이런 놈들이다. 여차하면 선수금만 받고 도망칠 생각도 하겠지.’
그래도 지금 당장 아쉬운 것은 자신들이었다.
부단장이 올 때까지 최대한 어르고 달래 협상 테이블에 앉히는 것이 최대의 관건이었다.
“…미안합니다. 처리할 일이 많아서 늦었어요.”
그렇게 얼마 뒤 이리아가 본부로 되돌아왔다.
와이번에 납치된 동생을 구하지 못해 마음이 무거웠으나, 정령 기사단의 부단장으로서 작금의 상황을 해결책을 찾으라는 특명을 이행할 필요가 있었기에 최대한 담담한 태도를 유지했다.
“드디어 부단장 나리가 오셨군.”
“자, 이제 제대로 이야기를 해볼까.”
“….”
이리아는 단지 재능과 노력만으로 부단장의 자리를 꿰찬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순식간에 장내의 분위기를 꿰뚫어 본 그녀는 가늘어진 눈으로 용병들을 바라보았다.
“왕국의 비상사태로 선포된 만큼 의뢰 난이도의 랭크는 최소 A부터 시작합니다. 최우선 목표는 와이번들이 이곳으로 닥쳐온 이유를 조사하는 것에 대해….”
“그래서, 금액은 얼마부터지?”
용병 중 누군가 씩 웃으며 그녀의 말을 끊었다.
단순히 고용주와 피고용인의 관계를 떠나서 작위를 가진 기사와 용병 간에 성립될 수 없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었기에 이리아는 화를 꾹 눌러 참으며 말을 이었다.
“…선수금은 최소 10만 골드 이상. 이후로는 기여도에 따라 차등 지급하겠습니다. 정령 기사단 부단장의 이름으로 최상급의 대우를 약속드릴 테니 모쪼록 긴밀한 협조 부탁드립니다.”
“어지간히 급했나 보군. 선수금으로 10만 골드를 걸다니.”
“그래서 남은 건 우리가 전부인가. 와이번이 무서워서 도망치다니, 죄다 겁쟁이들 뿐이군.”
파격적인 조건에 용병들은 탐욕 어린 빛이 번들거리는 얼굴로 우스갯소리를 흘렸다.
‘…착잡하군.’
다르함과 아이넬을 비롯한 정령 기사단원들은 이런 이들을 믿고 함께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에 가슴이 착잡해졌다.
하지만 지금 당장 손 하나가 아쉬운 상황이니 어쩔 수 없기에 애써 감정을 감추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끼이익.
그때, 굳게 닫혀 있던 회의실의 문이 천천히 열렸다.
또 누군가 싶어 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을 때, 윤기가 흐르는 붉은 머리의 미녀가 안쪽을 향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아, 여기 맞네요.”
“실례할게요.”
“실례하겠습니다.”
엘레오노라를 시작으로 일레이나와 미르엘이 열린 문 사이로 들어왔다.
“…이분들은?”
갑작스러운 미녀들의 등장에 용병들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중 일레이나는 자신에게로 향하는 시선들에 코웃음을 치며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는 미들턴에서 짧게나마 모험가 길드의 간부를 맡았다. 그 때문에 저들의 생리를 적잖게 알고 있어 남의 절실함과 기회를 이용하려는 모습은 그저 경멸스러울 뿐이었다.
저벅.
그리고 그 뒤로, 한 남성이 걸어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일색으로 치장한, 묘한 기색을 풍기는 미남자. 황금 수실이 달린 푸른 창을 쥔 그는 문가에 기대며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떨거지들이 많이도 모였군.”
“…뭐, 멋!”
첫마디부터 내뱉어진 도발에 앞쪽에 자리하던 용병들이 발끈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하지만 한가락 한다고 알려진 이들은 대부분 그 위험한 분위기를 눈치채고는 남자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서로 시선을 마주쳤다.
“…드래곤 슬레이어?”
“인상착의는 같군. 동료의 숫자도 들어맞는다.”
“기사단에서 흘러나온 소문으로 이곳에 왔다는 이야기는 얼핏 들었는데….”
드래곤 슬레이어의 위명은 여전히 곳곳에 퍼져 있었다.
모험가 길드에서도 이미 인정을 한 상태였기에 공식적인 힘을 가진다. 적어도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그 끄트머리에라도 범접할 수 있는 용병은 없었기에 모두 눈치를 보았다.
“실력에 자신이 없는 버러지는 떠나라. 괜히 와이번에게 잡혀가서 발목을 잡힌다면 용서치 않을 테니.”
퉁.
용아청성창의 끝이 뭉툭한 소리를 내며 바닥을 내리찍었을 때, 이진한은 서슬 퍼런 기색으로 용병들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떨어지는 콩고물이라도 주워 먹고 싶다면 닥치고 내 말에 따르도록.”
***
이번 퀘스트는 이전과 비교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수십만에 다다르는 몬스터 대군이나 마물들이 닥쳐오는 것도 아니고, 악마나 마수 같은 네임드와 피를 흘리는 사투를 펼칠 필요도 없었다.
기사단도 협조하고, 용병들을 수족으로 부리며 도시 곳곳을 수색하는 것으로 되는 일.
그렇기에 이진한은 장내의 분위기를 순식간에 정리하고는 전후 사정을 설명했다.
“즉, 우리는 창공의 군주 「쿠르슈엘라」의 알인 백명란을 찾아야 한다.”
듣자 하니 와이번 공습의 소란은 이곳 나스닥뿐만 아니라 가모라 왕국 전역에 일어났다고 했다.
그러니 기겁한 국왕이 정령 기사단의 정예와 주축 군단을 전부 수도로 불러들여 방어선을 구축한 것이겠지.
“….”
이야기를 들은 정령 기사단이나 용병들이나 모두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봐왔다.
대체 어떻게 그것을 알고 있느냐는 얼굴이었기에 이진한은 다시 한번 창끝으로 바닥을 내려찍으며 물었다.
“이야기는 다 들었을 텐데, 얼른 튀어 나가지 않고 뭣 하지?”
“…수, 수색이다! 행상과 상인들의 창고 위주로 전부 샅샅이 수색한다!”
“와이번의 알 정도 되는 크기니 공간은 한정될 거다. 그 점을 감안하고 수색하도록!”
공권력이 이쪽에 있으니 참으로 편리하기 짝이 없다. 곧 기사와 병사들, 그리고 용병들이 각기 짝을 이루어 도시 곳곳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관계없는 일인데 이렇게까지 도와주시다니.”
수하들이 모두 회의실을 나갔을 때, 이리아가 머뭇거리며 다가와 조심스레 고개를 숙였다.
“동생은 무사할 거다. 저들이 원하는 건 백명란이니 그걸 구해올 때까지 살려두겠지.”
“그렇군요.”
와이번들이 원하는 것이 백명란임이 확실하다면 적어도 그때까지는 무사할 것이 틀림없었다.
작고 여린 동생이 받을 고통과 충격에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었지만, 실피온의 힘만으로는 와이번들의 뒤를 쫓기 어려웠다.
‘조금만 기다려. 반드시 구해줄게.’
이리아는 결연한 각오를 다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 자신도 백명란을 찾는 데 한 손을 보태기 위해서였다.
“이 보답은 추후 제가 반드시 갚겠습니다.”
“보답은 필요 없다. 대신 일이 다 끝나고 느긋하게 이야기나 조금 나누지.”
“…!”
그 말에 이리아의 어깨가 움찔했다.
배에서부터 뚫어져 자신을 바라보던 그 열띤 시선.
그리고 보답을 거절하면서까지 단지 이야기만을 나누고 싶다는 대답.
그것들이 의미하는 바는 남녀 경험에 경험이 없던 그녀로서도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다만, 그의 옆에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세 아리따운 여인들의 존재와 자신을 비교해본 끝에 살짝 시무룩해졌을 따름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이 이후에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리아 마저 떠난 뒤, 이진한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가볍게 어깨를 풀어주었다.
와이번을 쫓으며 힘껏 시위를 당겨서 그런지 근육이 살짝 뭉쳤다. 그렇기에 그곳을 문지르며 고개를 들자, 일행이 가늘어진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왜?”
“너무 노골적인 데요. 옛 연인을 잊지 못해 그녀와 닮은 여인에게 추파를 던지는 꼴이라니.”
“새로운 파티원이 되려나요.”
“흐음.”
일레이나가 입술을 삐쭉 내민 채 말해오고, 엘레오노라는 살짝 침중한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미르엘만이 자신은 어찌 되어도 상관없다는 듯 올곧은 자세로 허리를 꼿꼿이 세우면서도 살짝 책망하는 듯한 시선을 보내왔다.
“무슨 소리야. 말했잖아,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이리아 렝케.
렝케는 《창조》의 혈통을 이은 가문이라 알려져 있었다. 처음에는 믿지 않았지만, 저리도 빼다 박은 외모를 하고 있으면 생각이 흔들릴 수도 있는 법이 아닌가.
그렇기에 베르하임 국왕 때 그랬던 것처럼 《창조》에 관한 기록이나 유산이 있을까 싶어 알아보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왕국 기사단의 부단장을 어떻게 빼 와.”
“빼 올 생각은 있으셨다는 거군요.”
“…설마.”
이진한은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내심 그런 마음이 들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세간에서는 천 년 전의 역사라고 하지만, 그에게 있어서는 불과 몇 달 전의 이야기였다.
아직 마음의 정리도 안 된 시점이고, 계속 그녀와 닮은 얼굴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싱숭생숭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 아닌가.
“…자, 우리도 가자.”
이야기가 여기서 더 삼천포로 빠지기 전에 이진한은 분위기를 수습하며 자리를 옮겼다.
나스닥은 항구 도시라 오가는 물자도 많았고, 도시 자체의 규모도 제법 컸다.
〔70:48:24〕
「쿠르슈엘라」가 제시한 시간제한까지는 대략 70시간 정도가 남았다. 도시 하나를 전부 수색하려면 살짝 빡빡할 정도였기에 그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한시도 쉬지 않고 다들 바삐 돌아다닌 결과 20시간 정도가 남았을 때 도시 전반에 대한 수색이 끝났다.
“…없습니다. 와이번의 알 정도 되는 크기면 보관할 수 있는 공간은 제한될 터인데, 그럴듯한 장소에서는 전부 찾지 못했습니다.”
“용병들은?”
“마찬가지입니다. 더러는 슬슬 도망갈 낌새를 보며 눈치를 보고 있는 듯합니다.”
“쓸모없는 자식들.”
이진한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 본인도 대현자의 눈으로 도시를 훑으며 돌아다녔음에도 불구하고 와이번의 알은커녕 타조알 같은 것도 보이지 않았다.
“쯧.”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쿠르슈엘라」 본인이 모습을 드러낸 이상 이곳에 있을 확률이 유력하다는 것인데.
“…설마.”
그때, 이진한은 불현듯 뇌리를 스치는 가능성에 두 눈을 크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