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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142화 (142/210)

◈ 142.

“부단장님, 부단장님. 저것 보세요.”

“….”

이리아 렝케는 당혹스러웠다.

가모라 왕국 정령 기사단의 부단장으로서 그녀는 운하를 지나는 선박들을 지킬 의무가 있었다.

근래 와이번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기에 상황을 예의주시했고, 그 덕분에 선박이 큰 피해를 입기 전에 와이번들의 습격을 저지할 수 있었다.

물론 후속 조치인 만큼 어느 정도 손실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기에 이쪽 선박에 합류했을 때는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름이 베르너, 라고 했지.”

“예. 진짜로 그 드래곤 슬레이어가 맞는 걸까요?”

여성 기사단원이 두 눈을 반짝이며 숨길 수 없는 동경의 시선을 드러냈다.

자신에게는 보인 적이 없는 것이었기에 살짝 괘씸함이 들었으나, 그녀가 이리 호들갑 떠는 것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간밤에 있었던 습격 후, 왕국 항구에 도착하기 몇 시간 전 또 발생했던 또다시 와이번들이 닥쳐왔다.

이번에는 정말로 작정하고 왔는지 이전보다 두 배는 될 법한 숫자.

자칫 잘못한다면 배가 침몰할 수도 있었기에 모두가 잔뜩 긴장했었다.

하지만 구석에서 조용히 있던 한 남자가 나선 직후, 상황은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이리아는 아직 그때 보았던 선명한 마력의 향연이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듯했다.

“….”

하지만 그건 그것이고, 지금은 조금 다른 이야기였다.

수십 마리의 와이번을 격퇴해낸 베르너라는 남자가 자신을 향해 노골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이쪽에서 보기 드문 흑발에 솜씨 좋은 화가가 그린 듯 그림 같은 외모. 우수에 젖은 듯한 그 검은 눈동가 바라보는 시선의 끝이 바라보는 곳은 누구라도 알 정도로 명확했다.

“….”

이리아는 랭케 가문의 후계자와 동시에 정령 기사단의 부단주로 널리 유명해진 인사였다.

그 때문에 여러 곳에서 구혼 제안이 많이 왔다. 하지만 그런 정략결혼을 비롯해 이성 쪽은 당장 생각이 없었기에 전부 거절했었다.

하지만 이토록 노골적이고 열렬한 관심은 처음이었다.

더군다나 그 외모와 분위기가 자신의 취향과 살짝, 아주 살짝 닮아있다면.

…사실 얼마 전 읽었던 로맨스 소설의 주인공 중 한 명이 흑발의 차가운 미남이었다. 베르너란 남자의 분위기도 그와 비슷했기에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자꾸 눈길이 그쪽으로 향했다.

“와이번 무리가 전부 이 상공을 벗어난 걸 확인했습니다. …부단장님? 아이넬. 무슨 일이 있었나?”

“아, 그게요.”

정령 기사단의 상급 기사 두르함은 부단장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단 번에 간파해내곤 수하에게 물었다.

그러자 아이넬이라 불린 여기사는 히죽 웃으며 작은 목소리로 전후 사정을 이야기했다.

이리아는 부끄러웠기에 그러지 말았으면 했지만, 여전히 베르너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기에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며 제 할 일을 했다.

“드래곤 슬레이어라고?”

“아마도요. 그런데 그럴 확률이 높을 거예요. 흑발흑안. 행색도 그렇고 저만한 미남은 흔하지 않잖아요. 동료들도 소문이랑 비슷하고.”

“흠.”

두르함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이리아 부단장은 정령 기사 중에서도 그 능력과 별개로 마스코트 취급을 받았다.

렝케 가문의 후광과 뛰어난 재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인정할 정도의 노력을 이어왔고, 역대 최소의 나이로 부단장의 직위까지 올랐다.

그와의 나이는 삼촌과 조카뻘의 차이. 애초에 정령 기사단의 평균 연령은 높았기에 모두 조카를 보는 심정으로 이리아를 응원하고 있었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드래곤 슬레이언지 뭔지 어디서 굴러 들어온 개뼈다귀 같은 놈이 부단장에게 추파를 던지는 꼴을 눈 뜨고 봐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제가 가서 한마디 하고 오겠습니다.”

“…아, 아니.”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정중하게 하겠습니다.”

두르함은 연약하게 소매를 잡아 오는 그 손길이 자신을 걱정하는 것이리라 생각했지만, 정작 그녀는 괜한 행동을 하지 말았음을 피력하는 것이었다.

…사실은 그 시선이 그리 싫지 않았다.

아니,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살짝 즐기고 있었기에 괜히 나서주지 않았으면 했다.

하지만 그녀의 속마음을 하나도 파악하지 못한 두르함은 당당한 발걸음으로 배 한 구석에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이진한에게로 다가갔다.

“실례합니다. 가모라 왕국 정령 기사단의 상급 기사인 두르함 멜모셔스이라 합니다.”

“베르너. 용병이다.”

“혹시 드래곤 슬레이어이신 베르너 님이 맞으십니까.”

“그래.”

“그렇다면 저희 부단장님께는 무슨 용무이신지?”

“…?”

이진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용무라는 게 무슨 뜻인가. 마치 자신이 그들에게 관심이라도 주었다는 듯한 뉘앙스였다.

“…모르셨어요? 계속 저기 바라보고 계셨던데.”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이 짐을 정리하는 사이, 먼저 그것을 끝내고 밖에 나와 그 옆에 자리에서 연구 자료를 살피던 일레이나가 무심한 표정으로 툭 내뱉었다.

“내가 바라봤다고?”

“네. 저런 분이 취향이신가요. 유리아 사제도 푸른 머리에 비슷한 체형이신 것 같았는데 대응이 딴 판이라서요.”

“…음.”

이진한은 머리를 긁적이며 두르함을 올려다보았다.

“미안하군. 의식하고 그런 건 아니었다.”

“아닙니다. 그나저나 혹시 숙소는 잡으셨습니까. 이쪽에 큰 도움을 주셨으니 기사단 차원에서 보답을 드리고 싶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이쪽에서 숙소를 준비해드려도 되겠는지.”

“사양하지 않겠다. 배려는 감사히 받지.”

“알겠습니다.”

두르함은 이진한의 하대를 가볍게 받아들였다.

애초에 드래곤 슬레이어가 가지는 위상은 거의 일국의 왕과 같다. 기사 나부랭이인 자신이 쉬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자연스럽게 넘겼다.

“…아.”

정작 그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이리아는 자신을 향한 시선이 사라지자 살짝 아쉬운 듯한 신음을 토해냈을 따름이었다.

***

수많은 사람과 적지 않은 화물을 실은 배는 곧 가모라 왕국의 대표적인 항구인 ‘나스닥’에 닿았다.

으레 그렇듯 사람과 물자가 오가는 도시는 활기를 띠기 마련.

배에서 내린 이진한과 그 일행들은 사뭇 화려해 보이는 그 광경에 작게 감탄을 토해냈다.

“민물 고기 요리점이 많군요.”

“운하와 맞닿아있으니까 말이지. 그런데 어떻게 항구 이름이 나스닥이냐.”

“무슨 뜻이 있습니까?”

미르엘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이진한은 쓴웃음을 지으며 실소를 내뱉었다.

대충 몇천은 날려 먹은 개미 출신이었기에 갑자기 감상이 들었을 뿐이었다.

‘…지금 내 인벤토리에 있는 보물이랑 재화를 현실로 옮길 수만 있다면 볼만 할 텐데.’

그래도 세계 부자 순위 100등에 오를 수는 있지 않을까.

그 정도라면 저쪽에서도 재밌게 살 수 있을 텐데.

아예 ‘월드’ 같은 게임을 하나 더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가시죠, 안내하겠습니다.”

먼저 하선해서 기다리고 있던 두르함이 그들을 맞아주었다.

본래는 이리아가 일행을 대표해 그들을 안내하려 했지만, 두르함이 자처해 안내역을 맡았다.

그렇기에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보고를 위해 기사단 본부로 되돌아갔고, 두르함만 남아 이진한 일행을 도시에서 제일 좋은 숙소로 인도했다.

“벨라루스라고 합니다. 기사단의 중요 손님들이 묶는 곳이지요. 푹 쉬시다가 피로를 푸신 뒤 기사단으로 찾아와주십시오. 추후 보상은 그곳에서 드리겠습니다.”

보상은 숙소를 잡아주는 것으로 끝이 아닌지 정중히 고개를 숙이는 것을 끝으로 자리를 떠났다.

가볍게 손을 흔들어 그를 배웅한 이진한이 몸을 돌렸을 찰나, 엘레오노라가 슬쩍 얼굴을 들이밀었다.

“…왜?”

“아뇨, 이리아 부단장이랑 《창조》가 그렇게 닮았나 해서요.”

“외모는 똑닮았지. 그대로 복사해놓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이진한은 턱을 쓰다듬으며 그녀의 얼굴을 떠올렸다.

물망초 빛깔의 머리카락, 동글동글한 눈동자.

체형도 제법 비슷한 것 같다. 복장만 제대로 갖춘다면 완전히 그녀를 가져다 놓았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으니 그 흡사함은 이루어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렇게 노골적으로 시선을 보내셨던 거군요.”

“말에 가시가 있는데.”

“찔리시는 부분이라도 있으신가요?”

“있을 리가.”

“전날 밤에는 그렇게 제 몸을 더듬으셨으면서 용케 다른 여자 생각이 나시는가 보네요. 아니면 그만큼 제가 매력이 없다던가?”

“더듬기는 누가 더듬었다고! 애초에 발 헛디딘 척하면서 덮쳐온 건 엘레오노라 네 쪽이….”

숙소 입구에 서서 우두커니 그리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 둘은 옆에서 바라보는 시선들을 느꼈다.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고 있는 일레이나와 한쪽에 서 있던 미르엘이 입을 다문 채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던 것이었다.

“왜요. 계속해봐요. 아웅다웅하고 보기 좋더만.”

“하하….”

일레이나는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그리 말했고, 미르엘은 애매한 웃음을 토해냈다.

곧 엘레오노라는 제정신이 들었는지 새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아, 뭐.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는 고대 속담도 있잖아요. 이해는 해요. 한창때의 남녀니까. 그런데 우리 이전에 북쪽 숲에서 이야기한 게 있지 않나요?”

“이야기?”

“당신 말고요.”

이진한의 말을 일축한 일레이나가 고개를 들자 엘레오노라는 살며시 눈을 피했다.

서로 선의의 경쟁은 좋지만, 새치기하거나 먼저 치고 나가는 치사한 짓은 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독주를 감행한 엘레오노라의 행태는 쉬이 넘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엘레오노라 님은 왕성하시군요.”

“와, 왕성하다니!”

그 와중에 미르엘이 툭 내뱉었다.

엘레오노라는 설마 자신의 오랜 친우가 그런 소릴 할 줄 몰랐다는 듯 옷자락의 끝을 꽉 붙들며 부끄럼에 외쳤다.

“그러니까, 하고 싶은 말은 그거예요. 어설프게 덤비다가 들킬 거라면….”

일레이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한창때의 남녀인 만큼 들러붙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직접 두 눈으로 보면 눈꼴 시리니 알아서 처신 잘하라고 말하려 했다.

우우우웅─.

하지만 그보다 먼저 기묘한 공명이 그들의 등줄기를 훑고 지나갔다.

어찌나 기다란 소리였는지 벽이며 바닥이며 모두 잘게 떨리며 잔상이 남을 정도의 것이었다.

“…뭐지?”

그 갑작스러운 현상에 일레이나가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을 때, 일레이나는 황급히 창가로 나아가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하지만 특별히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기에 인상을 찌푸린 채 주위를 둘러보던 중 그녀는 돌아다니던 사람들이 모두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고 보니.’

아직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그림자의 농도가 짙었다. 마치 무언가가 하늘을 가리고 있는 것 같은….

“…베르너 님.”

흘깃 하늘을 올려다본 미르엘은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이진한은 곧바로 그 옆으로 다가갔고, 이내 하늘을 뒤덮은 무언가에 헛웃음을 토해내며 막연한 감상을 토해냈다.

“겁나 크네.”

와이번.

마경에서 싸웠던 벨라시온이나, 이전에 만났던 크루시아의 본체인 드래곤보다 더 큰 와이번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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