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1.
가도라 왕국 항구의 도착까지 하루가 남았다.
이진한은 와이번 습격이 있었던 뒤로 쭉 소파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 와중이었다.
“….”
슬슬 한 곳만 응시하며 넋을 잃고 있던 것이 질렸기에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비싼 돈 주고 잡은 방이라 그런지 전망이 좋다. 창밖을 통해 시원하게 갈라지는 운하의 물살이 눈에 들어왔다.
푸른색, 푸른색, 푸른색.
하늘과 강, 어딜 보아도 푸르렀기에 오히려 시야가 어지러워지는 듯했다.
‘파란 머리가 그녀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이진한은 헛웃음을 토해냈다.
지금까지 지나온 이들 중 파란 머리를 지닌 이가 몇 명이나 있었던가. 가까운 예로 신성 왕국에서 찾아온 이단 심문관인 도미니온 유리아도 그와 같은 색이었다.
…물론 물망초 빛깔을 빼다 박은 것은 그 정령 기사단의 부단장뿐이었지만,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정신 나갈 것 같네.”
“그래 보여요.”
바로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이진한은 시선을 돌렸다.
조금 전까지 분명 낮이었건만, 어느 사이 시간이 흘러간 듯 깜깜한 밤이 되어 있었다.
“자러 간 거 아니었어?”
자신의 방 한쪽에서 테이블에 앉아 쑥덕거리던 그녀들 역시 어느 순간 조용해졌기에 자러 간 줄로만 알았다.
“그랬죠. 잠깐 산책하다가 여전히 청승맞게 이러고 계신 걸 봐서요.”
가벼운 차림의 엘레오노라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손에 든 것을 들어 보였다.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와인 한 병과 유리잔 두 개가 창문에서 들어온 달빛에 비춰 존재감을 드러내었다.
“머리가 복잡해 보이시는데, 한 잔 어때요?”
“나쁘진 않네.”
이진한은 몸을 일으키며 그녀가 앉을 자리를 내어주었다.
엘레오노라는 냉큼 그 옆에 가까이 앉고는 이전보다 사뭇 능숙해진 손놀림으로 각 잔에 와인을 따랐다.
“미르엘이랑 일레이나는 자고 있어요.”
“조용히 마실 수 있다는 건가.”
즉, 방해꾼은 없다는 이야기다.
엘레오노라는 속내를 숨긴 채 잔을 내밀어 이진한의 것과 가볍게 부딪쳤다.
붉은 과실의 액체가 출렁이며 청아한 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졌다.
“둘하고는 따로 마신 적이 계신가요?”
“너하고 마신 걸 빼면 없었던 것 같은데.”
가끔 술자리를 하면 전부 다 같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마실 뿐, 그녀를 제외하면 개개인과 따로 밤을 보낸 적은 없었다.
그 말에 엘레오노라는 살짝 기분이 좋아진 듯 손안에서 잔을 가볍게 돌렸고 가볍게 향을 음미한 뒤 한 모금 마셨다.
“배에 적재된 상품을 사 온 건데 생각보다 괜찮네요.”
“그러게. 나는 떫은 것보단 이렇게 살짝 달짝지근한 게 좋더라.”
“저도요.”
사실 엘레오노라의 취향은 끝 맛이 살짝 떫은 것이었지만, 자연스럽게 그의 말을 맞춰주며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저요, 사실은 잘 알고 있어요.”
“뭘?”
“처음부터 끝까지.”
엘레오노라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베르너 님의 도움이 되지 않고 있다는 걸요.”
“…아니, 그렇게까지는.”
“저, 그렇게 양심 없는 사람은 아니에요. 차라리 짐이라고 하면 더 잘 어울리겠죠.”
쪼르륵.
빈 잔을 채웠다.
와인의 도수가 꽤 높은 것인지 한 잔을 마신 것으로 취기가 감돌았다. 그렇기에 엘레오노라는 이전부터 속에 담아두었던 말들을 좀 더 수월하게 꺼낼 수 있었다.
“마르딘에서도 그랬잖아요. 베르너 님은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이 얼마나 험한지 알고 계셨겠죠. 그래서 저희가 한계 이상의 고통을 맞닥뜨려서 고생하지 않도록 일부러 매몰차게 끊어내신 거고요.”
남겨질 이쪽을 배려해 냉정하게 끊어준 것이리라.
마르딘 공작의 배신 여부가 어찌 되었든 그 뒤로도 적당한 곳에 방치하고 떠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짐이 될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자신들을 품에 안았고, 결국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
“저도 막연하게 느끼고는 있었어요. 그래서 차마 붙잡지 못했고요. …거기서 만약에 제가 더 매달렸으면 떠나지 않으셨을까요?”
“글쎄.”
이진한은 손안에 쥔 잔을 바라보았다.
시간의 유예라는 제약이 있었으니 어떤 식으로든 떠나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도 그녀가 간곡히 부탁해왔다면 그곳을 근거지로 둔 채 대륙을 돌아다니지 않았을까.
“그럴 때는 입에 발린 말이라도 해주시는 거예요.”
“입에 발린 말을 하기엔 그때 너무 매몰차게 거절했잖아.”
“맞아요. 조금 상처받기도 했다니까요.”
둘은 다시금 술잔을 나누며 작게 웃었다.
그 뒤의 대화 주제는 이전과 같았다. 여기까지 도달하기까지의 여정과 고생.
그리고 그리운 사람들까지.
“헤으응과 호에엥 자매는 잘 지내고 있을까요?”
“이쪽 일이 끝나면 한 번 들릴까? 오랜만에 온천에도 푹 담그고 싶고.”
“좋죠. 미르엘이나 일레이나도 좋아할걸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 엘레오노라는 다시 와인을 한 모금 마신 뒤 살짝 가늘어진 눈으로 입을 열었다.
“베르너 님은 할 일이 다 끝나시면 나중에 뭘 하실 건가요?”
“이전에도 했던 질문 아니야?”
“그때는 제대로 답해주시지 않으셨잖아요.”
그녀는 제대로 된 대답을 듣기 전까지 물러나지 않겠다는 듯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할 일을 다 끝내면 말이지….”
“네. 가끔 베르너 님을 보면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리는 게 아닐까 걱정이 들거든요. …아무래도 천년이란 간극이 있으니 말이에요.”
이진한은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서로 간의 간극은 천년이란 시간이 아니라 사는 세상 차이에 있었다.
아이슬란은 자신들을 이방인이라 칭하지 않았던가.
애초에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존재였으니 그보다 더 알맞은 단어는 없었다.
“말도 없이 떠나진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어쨌든 떠나신다는 거예요?”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그러길 바라는 것 같네. 나 싫어해?”
“들켰나요?”
엘레오노라는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대꾸했다.
하지만 그 눈동자 속에 스친 감정은 이진한이 자신들을 떠나지 않았으면 하는 걱정이었다.
“…할 일을 다 하면 말이지.”
그는 턱을 쓰다듬었다.
제일 문제는 시간의 유예였다. 시시각각 떨어지는 제약이 붙어 있는 이상 시한부나 마찬가지인 삶이 아닌가.
그것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정도로 긴 유예를 얻던가, 유예 자체를 없애버리던가 둘 중 하나라도 조건이 충족되어야 했다.
“전에 말했던 것처럼 일단 오스칼 제국의 황실을 싹 밀어버리고 그 자리를 자치해야겠지.”
“베르너 폐하, 좋네요. 그러면 그때는 저를 황후로 받아주실 건가요?”
놀리는 듯한 어조였다.
이진한은 오히려 기껍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생각해보니 좀 귀찮을 것 같은데 네가 황제 할래? 애초에 황족이었으니 제왕학 같은 건 배웠을 거 아니야. 잘할 것 같은데.”
“…그것도 제법 괜찮은 이야긴데요. 그러면 베르너 님은 바지사장?”
“그렇지. 나는 이곳저곳 놀러 다니면서 유유자적한 삶을 살아야지. 황실 금고만 맡겨 줘.”
“책임 없는 쾌락인가요. 살짝 괘씸해지려 하네요.”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쿡쿡 웃었다.
그 많던 와인도 이제 절반 정도 비어버린 상태다. 엘레오노라는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 이진한 쪽에 있던 병을 가져오려 할 찰나, 취기 탓인지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앗…!”
그녀의 몸이 소파에 엎어졌다.
필연적으로 그 위에 거의 눕듯 기대어 있던 이진한의 몸으로 겹쳐 포개지고 말았다.
“….”
코앞에서 서로의 시선이 마주쳤다.
둘 다 얇은 옷차림이라 서로의 온기와 감촉이 여실 없이 느껴지는 상황.
취기가 달아오른 가운데 와인의 달콤한 향이 섞인 숨결이 서로의 감각을 자극했다.
엘레오노라는 손끝을 살짝 떨면서도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오히려 녹아내릴 듯한 표정으로 천천히 그의 가슴에 손을 얹었을 따름이었다.
“…베르너 님.”
매끄러운 입술이 이름을 불러왔다.
그 사이로 내뱉어진 들뜬 숨결은 그녀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뚜렷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
잠시간 주저하며 망설이던 이진한은 오른손에 걸치듯 쥐고 있던 잔을 내려놓으며 천천히 그녀의 머리카락을 끝에서부터 가볍게 쓸어올렸다.
엘레오노라의 몸이 살짝 떨렸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피하지 않으며 그대로 그 손길을 받아들였다.
강물에 비친 달빛이 창을 통해 들어온다.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은 실내를 비추는 희미한 램프의 불빛과 더불어 현실이 아닌 듯한 몽환적인 분위기를 내뿜었다.
머릿결을 쓸어올리던 손이 뺨에 닿았다.
그 험난한 여정 가운데서도 잡티 하나 허용치 않은 순백의 피부가 제 머리카락과 같이 붉게 물들었다.
취기 탓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선지 이진한으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이윽고 둘의 얼굴이 더욱 가까워졌을 때.
댕-댕-댕!
“…!”
습격을 알리는 종소리가 깊은 밤의 적막을 깨뜨리며 거세게 울려 퍼졌다.
화들짝 놀란 이진한과 엘레오노라가 고개를 들자, 창밖으로 보이는 강의 표면 위를 스쳐 지나가는 거대한 그림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쿵. 쿵.
무언가 묵직한 것이 떨어진 듯 큰 소음과 함께 선체가 흔들린다. 전날 쫓아냈던 와이번들이 야음을 틈타 또다시 습격해온 것이었다.
-제기랄!
-밤이라 시야 확보가 먼저다!
-낮보다 더 안전에 주의해!
곧 사람들이 깨어났는지 위쪽에서 부산스러운 인기척마저 느껴졌다.
엘레오노라는 천천히 이진한의 위에 엎드려 있던 몸을 일으키고는 옷매무새를 고쳤다.
“…엘레오노라?”
이진한은 움찔하며 조심스레 그녀를 불렀다.
조금 전까지 녹아내릴 듯 잠겨 있던 엘레오노라의 얼굴 위로 더없이 흉악할 정도의 귀기가 서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진한은 엘레오노라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녀가 진심으로 화낸 것은 처음 보았다.
화를 내지 않던 그녀가 진심으로 화를 냈기에 피부가 섬찟해질 정도로 소름이 돋기까지 했다.
“….”
엘레오노라는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표정을 풀고는 생긋 미소를 지었다.
물론 그 이마에 툭 튀어나온 시퍼런 힘줄은 숨기지 못했지만.
“베르너 님은 여기서 쉬고 계세요.”
“아니, 그래도….”
“와이번 가죽이 제법 비싸게 팔렸죠?”
“…비싸긴 하지.”
“상품 가치가 남아있을 정도로 힘 조절을 할 수 있을진 모르겠는데.”
엘레오노라는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어쨌든 베르너 님이 나오실 일 없이 제가 다 쓸어버리고 올게요.”
쿵 쿵 쿵.
대답도 듣지 않은 채 방을 떠나가는 그녀의 발걸음에는 깊이를 파악할 수 없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
***
엘레오노라는 거칠게 선실의 문을 열었다.
묶던 방으로 돌아가 무장을 끝내고 밖으로 나오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지만, 이미 수많은 사람이 밖으로 나와 와이번 무리와 교전 중이었다.
“어? 어디 갔다 왔어요? 먼저 나간 줄 알았는데.”
뒤쪽에서 불의 고리를 만들어내 와이번이 배로 접근하는 것을 막고 있던 일레이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밑에서 바람 좀 쐬고 있었어요.”
“…지하는 바람이 안 불지 않나?”
의문을 표할 찰나, 일레이나는 엘레오노라의 곁에서 와인 냄새와 함께 익숙한 체취를 맡을 수 있었다.
‘이건.’
살짝 달콤한 시트러스 향수.
베르너, 그 남자가 사용하는 것이었다.
“…당신.”
“말리지 마요. 저 오늘 여기 있는 와이번들 다 찢어 죽일 거예요.”
일레이나가 의심 어린 시선으로 말해오거나 말거나 엘레오노라는 완드를 움켜쥔 채 와이번 무리를 죽일 듯 노려보았을 따름이었다.